34. 내가 키우게 된 S급들 (15)
차우진은 강하나를 뒤따라 연구 센터 A동의 172호실로 들어왔다.
수업을 안 듣고 이곳에 와서 봉변을 당한 게 바로 어제인 터라 꺼림칙하면서도 의아했지만, 밀착 감시를 위해서 서로 떨어지면 안 된다는 강하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될 대로 되라 싶어졌다.
어차피 이곳에서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차우진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관계없이 강하나는 착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차우진이 옆에서 보채는 동생을 적당히 상대해 주는 동안, 강하나는 청소년 에스퍼 3명에게 극기 훈련을 시켰다.
바쁜 강하나와 달리, 차우진은 별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동생과 놀아 주었다.
적당히 이렇게 하루가 가나 싶었던 차우진에게 책더미와 종이 뭉치를 바리바리 든 강하나가 다가왔다.
“우진 씨, 많이 기다렸죠? 이제 우진 씨 교육을 해 드릴게요. 어제 짐을 보니까 교재는 따로 안 가지고 계신 것 같아서 제가 준비해 왔어요.”
강하나는 그 말을 마치고 차우진 앞에 종이 뭉치들을 우르르 늘어놓았다.
그 꼴을 본 차우진은 내심 당황했다.
저 남자가 이른 아침부터 노트북을 비롯해 각종 책자들을 잔뜩 챙겨서 여기까지 오는 것을 봤지만, 그게 전부 자신을 위한 물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본 것이다.
“일단 이것 먼저 볼게요. 협회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들으셨죠? 먼저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 질문 좀 드릴게요.”
“…….”
“기본 교육은 다 듣고 나면 시험을 봐야 해서 열심히 들으셔야 해요. 기본 교육을 수료하셔야 협회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요. 그건 수업에서 들으셔서 아시죠?”
강하나는 평소처럼 차우진에게 붙어서 사근사근하게 많은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은 평소처럼 적당히 흘려들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차우진은 알지 못하는 지식에 대해 강하나가 자꾸 확인을 해 대는 통에 살짝 기가 질렸다.
강하나의 말투는 친절하고 부드러웠지만, 질문의 내용은 차우진이 수업을 얼마나 성실하게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했음에도 강하나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자세하게 잘 알려 주겠다며 수업을 시작했다.
차우진은 평소와 같은 강하나의 모습에 안심했다.
강하나는 평소처럼 친절했고 차우진은 그제 강의실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갈 때쯤, 차우진은 주변에 사람이 더 늘어났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청소년 3명이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그에게 해를 가한 화려한 머리의 에스퍼가 강하나에게 말했다.
“선배, 이제 다 끝났어요? 우리 다 한참 기다렸어요. 고위험군 에스퍼 특별 교육 시간이라며~ 왜 초짜 가이드만 붙잡고 있어요~”
“훈련장 도는 기록 단축 많이 했나 보네? 기초 체력 운동까지 한참 전에 끝낸 거지? 이따가 기록 봐줄게. 지금은 이능 연습하고 있어 봐.”
“……훈련장 돌라고 말만 하고 계속 가이드랑 꽁냥대고 있었으면서 기록을 언제 쟀어요?”
“너희 출발할 때부터 영상 찍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록이랑 과정이랑 다 녹화 중이니까. 가서 하고 있어. 나 금방 끝나.”
강하나는 차우진과 그의 수업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꾸해 주며 애들을 쫓아냈다.
청소년들은 강하나가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었단 사실을 몰랐는지 얼굴을 굳히고 자리로 돌아갔다.
금방 끝난다고 한 것은 그냥 둘러댄 말이 아니었는지, 강하나는 금세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차우진의 앞에는 새로운 프린트물이 놓였다.
“좀 더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일단은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도 그냥 끝내 버리면 기억이 휘발되니까 이거라도 풀고 계세요. 방금 전까지 가르쳐 드린 거 확인 문제니까 쉽게 푸실 거예요. 일 좀 보고 와서 채점도 해 드릴게요. 시간 넉넉하니까 꼼꼼하게 풀어 보세요.”
강하나는 차우진에게 조잘조잘 설명을 늘어놓고 가 버렸다.
“…….”
덩그러니 남겨진 차우진은 그가 놓고 간 프린트물을 들춰 봤다.
무려 50개의 주관식 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문제지였다. 문장에 빈칸을 채워 넣는 형식이었으며 한 문제에 빈칸이 기본적으로 3칸이나 되었다.
“하아…….”
차우진은 꼴랑 20분의 수업을 해 놓고 이런 잔인한 문제지를 던져 주고 가 버린 강하나를 원망스레 바라보다가 착실하게 문제를 풀기로 했다.
이따가 채점도 하겠다고 했으니 빈칸을 채워야만 했다.
차우진은 옆에서 심심하다고 엉겨 붙는 동생도 뒤로하고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방금 들었던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생소한 내용으로 꽉 찬 50문장의 빈칸을 채워 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대며 머리를 싸매던 차우진은 교재를 훔쳐봐서 빈칸을 채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강하나는 수업을 끝내면서 문제지만 남기고 모든 수업 자료를 치워 버렸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차우진은 강하나가 멀리 치워 놓은 자료들을 애처롭게 노려보았다.
다른 에스퍼들은 다들 바빠서 자신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몰래 가져가서 봤다가 다시 갖다 놓으면 되지 않을까.’
차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에스퍼들을 보고 있을 때 한 명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제 생각을 읽었다며 자신을 괴롭힌 화려한 머리의 에스퍼였다.
“!!”
차우진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교재를 빼돌릴 계획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 에스퍼가 또 제 생각을 읽었다면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겠지.
차우진은 결국 요행을 포기하고 다시 착실하게 문제를 풀기로 했다.
그러나 차우진은 정직하게 문제를 풀었어도 민망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우진은 강하나에게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차우진은 그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본인이 했던 말을 빠짐없이 잘 지켰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인 한 시간 반이나 되는 문제 풀 시간을 줬으며, 짐 정리까지 거의 마치고 나서야 차우진의 문제지를 채점했다.
하지만 문제는 성적이 처참했다는 것이다.
주관식 50문제 중에 차우진이 제대로 답을 적은 건 고작 3문제뿐이었다.
물론 차우진은 나머지 47문제도 답을 적으려고 노력했으나 노력했다고 정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차우진은 동그라미 3개와 비가 많이 내리는 자신의 문제지를 노려봤다.
비록 결과는 나빴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애초에 이야기 흘러가듯 지나간 20분짜리 수업만 듣고 바로 이런 문제를 들이민 사람이 나쁜 거 아닌가.
하필이면 채점한 시간도 에스퍼 수업을 마무리한 직후라서 그의 점수는 청소년들에게까지 공개되었다.
수업이 끝났으면 퇴실이나 할 것이지 굳이 남아서 차우진의 성적을 확인한 청소년들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롱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차우진은 세상에 제일 멍청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그는 수치감에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강하나는 그런 차우진을 보지 못하고 처참한 채점 결과만 보고 있었다. 차우진은 그의 무심함이 얄미웠다.
‘다짜고짜 시험을 보게 해 놓고 진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걸까.’
차우진이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채점 결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강하나는 차우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자신보다 한참 작은 어린 남자가 멸시 어린 시선을 보낼 게 너무 뻔했기 때문에 차우진은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한심하다는 눈빛일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차우진은 잠시 당황했다.
동시에 강하나의 웃는 얼굴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차우진은 잠시 넋을 잃었다.
남자는 그런 차우진에게 평소와 같이 천진한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문제가 많이 어려웠나 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건 기본 내용이라 우진 씨가 꼭 알아 두셔야 해요. 아니, 아니. 우진 씨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요. 모를 수도 있죠. 모르면 이제 잘 외워 보면 되니까~ 그러니까 괜찮아요. 제가 잘 도와드릴게요.”
“…….”
“일단 틀린 걸 많이 반복해서 써 보면 다 외워지거든요. 한 서른 번 정도? 여기 문제로 나온 문장 빈칸 채워서요.”
“여기요…?”
“네, 네. 다 합해서 50문제인데, 좀 길죠? 노트 드릴 테니까 30번씩 써 보세요.”
“이걸 손으로 다 쓰라고요?”
“그렇죠. 손으로 직접 쓰는 거죠~ 오늘 안에만 다 쓰시면 돼요. 시간 넉넉하니까 부담 갖지 말고요.”
“…….”
강하나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많은 말을 하면서 매우 부담스러운 숙제를 안겨 줬다.
하지만 차우진은 그저 농담이나 빈말로 치부하려 했다.
갑자기 학창 시절에나 해 봤을 깜지를 쓰라고 하다니.
자신에게 열성적으로 호감을 내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치고는 너무 황당한 말이라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강압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이라 얼마든지 농담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우진은 곧 그가 두꺼운 노트와 필기구를 손에 쥐여 주는 것을 보고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강하나는 차우진이 기필코 깜지를 쓰도록 시켰다.
강하나의 태도는 언제나 그랬듯이 상냥했지만 상냥함이 억압성을 온전히 가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강하나는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점심을 먹으러 온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잠깐도 차우진에게 깜지를 쓰라고 종용했다.
게다가 차우진이 싫은 티를 내면 곧바로 3일 뒤 치러질 시험에서 차우진이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겁을 주었다.
“…….”
물론 강하나가 윽박지르거나 비꼬지는 않았지만, 그가 덧붙인, 가이드 국장이 차우진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는 말은 겁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차우진은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중년 여자를 떠올렸다.
‘어제 만난 범상치 않은 기세의 그 여자’
그녀는 이곳의 지도자 위치쯤 되었으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했던 연구 센터에 보내 버리겠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불이익을 주는 건지는 몰랐으나, 약간 겁을 먹은 차우진은 강하나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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