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내가 키우게 된 S급들 (14)
탈출 정보를 모으기 편한 모습으로 만들어 준다며 청하지도 않은 도움을 주겠답시고 자신을 고양이로 만들어 버린 화려한 머리의 에스퍼를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차우진은 자신의 몸이 멋대로 줄어들며 구조가 바뀌는 끔찍한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에서야 인간으로 돌아와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가이드 국장에게 반동분자 취급을 당하며 으름장을 받지 않았는가.
믿는 구석이 있어 수업 좀 빼먹었다고 이런 취급이라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계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의 생각을 좀 했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억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차우진은 동생이 던져 놓은 크레파스를 발치에 맞고 현실로 돌아왔다.
“…….”
장식품 하나 없이 모든 게 새하얀 방에는 어린 동생의 놀잇감만 굴러다녔다.
조화롭지 못한 인테리어 공간 속의 어린아이는 홀로 주저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차우진은 멍하니 앉아 스케치북에 코를 박을 듯이 그림에 열중한 동생을 바라보았다.
손은 크레파스가 잔뜩 묻어 얼룩덜룩했지만, 그것 외엔 때 묻은 곳 없이 깨끗했다.
‘우린이 피부가 저런 색이었나.’
차우진은 연두부처럼 하얗고 말랑해 보이는 6살짜리 동생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그동안은 입혀 본 적이 없던 사이즈에 맞는 모직 원피스와 단정하게 묶인 머리카락이 불현듯 위화감을 불러왔다.
이곳은 마치 과거와 같은 세상 같다.
무너진 건물 잔재와 시멘트 가루만 흩날리는 외로운 세상이 아니라, 정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괴물들의 사이에서 분투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말이다.
항상 때가 껴서 시꺼멓던 동생의 손톱이 본래의 분홍빛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며, 차우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과 동생이 그나마 사람 꼴로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곳에선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 한 캔이라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
쓰레기나 다름없이 구겨지고 때가 낀 플라스틱병과 내부 코팅이 죄다 벗겨지고 찌그러진 냄비에 빗물을 받아 아껴 마실 필요도, 삭아 빠진 넝마 조각을 몸에 걸쳐야 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이곳에선 괴물에게 발각될까 봐 매 순간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스스로가 느끼는 불안은, 두려움은 무시해도 되는 수준인 걸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차우진은 창가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강하나가 입에 에코백 하나를 물고 창문으로 몸을 구겨 들어오고 있었다. 입에 물린 에코백 안에는 캔 맥주가 가득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강하나는 캔맥주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사 온 걸 환영해요, 우진 씨.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우리 조촐하게 환영 파티라도 해요.”
그는 늘 그렇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찬장에서 크래커를 꺼내 왔다
동물 모양의 어린이 크래커인 걸 보아 차우린을 위해 준비해 둔 간식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강하나의 취향이라고 해도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이나 앳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얼굴을 한 남자는 식탁에 크래커가 담긴 접시를 놓고 가방에서 술 캔을 잔뜩 꺼내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정갈한 유리잔을 꺼내 와 주스를 한가득 따랐다.
차우린을 끼워 주기 위해 준비해 주는 건 고마웠으나 방금 전에 이미 주스를 두 잔이나 먹여서 별로 탐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애를 따돌릴 수는 없으니 말할 수는 없었다.
차우린도 금세 강하나에게 쪼르르 달려가 접시에 크래커 붓는 걸 도왔다.
준비된 술상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차우진은 어제부터 정신없이 휩쓸려 다닌 탓에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흔쾌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꾸역꾸역 자리에 앉았다.
어린애들이 신이 난 눈빛으로 자리를 준비해 줬는데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이 같은 얼굴의 남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본다. 동그란 눈에 담긴 기대를 저버리기 싫었다.
차우진은 바로 맥주 캔을 땄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소량의 거품이 올라오더니 세 사람의 경쾌한 건배 소리와 함께 흩날렸다.
***
차우진이 음주가 허락된 나이에 막 이르렀을 때, 그는 어른들이 사격장에서 훔쳐 온 총을 들고 괴수와 함께 싸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스무 살이 되던 해, 보신각 종이 울리자마자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음주의 첫 경험은 무너져 가는 마트 건물 구석에서 주운 미지근한 캔 맥주를 시멘트 먼지와 함께 마시는 걸로 대체되었다.
친구들은 없었지만, 아버지와 같이 있었으니 아쉽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도 이미 술은 귀한 물건이어서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에 찾았던 시멘트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맥주 네 캔은 같이 탐색을 나온 사람들과 나누었기 때문에 차우진은 맥주 한 캔을 아버지와 나눠 마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셔 보았던 술은 밍밍했으며 특별한 감흥도 일지 않았다.
그래서 차우진은 지금 마시게 된 술에 대해서 어떠한 경각심도 없었다.
보리 냄새와 알코올 냄새가 나는 씁쓰름한 음료가 뭔 대수인가 싶기도 했다.
받은 음료를 흔쾌히 목으로 넘겼다.
원샷하다시피 들이마시는 모습을 본 강하나는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차우진은 묘하게 뿌듯한 마음이 들어 금방 한 캔을 비우고 새 캔을 땄다.
마주 앉은 귀여운 얼굴의 남자는 오늘도 말이 많았다.
평소에도 중요한 얘기보단 쓸데없는 말이 주여서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가 하는 말이 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우진은 강하나를 바라보며 그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도 개의치 않고 지금처럼 천진하게 웃어 주는 남자였다.
각인된 새끼 오리처럼 자신을 쫓아다니고 옹호해 주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목숨을 부지하기만 급급한 곳에서 7년을 보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에 왔는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물론 수많은 에스퍼들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제외해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신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늘 애를 써 줬다.
이 남자를 놓칠 수 없었다. 차우진은 갑자기 조급함에 사로잡혀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강하나의 호기심 어린 눈을 마주하자 그의 머릿속에는 이 감정이 호의에 대한 감사인지, 그에 대한 애정인지, 안락에 대한 욕심인지에 대한 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머릿속 한구석에는 자신이 취했다는 깨달음이 약이 다 된 전구처럼 깜빡이다 사라졌다.
하지만 찰나 동안 스쳐 간 수많은 생각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차우진은 강하나의 얼굴을 붙잡아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
차우진은 강하나의 손길에 눈을 떴다.
자신을 깨운 남자는 이미 깨끗하게 다 씻고 외출할 준비를 끝내 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 아침의 창백한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남자가 입은 주홍빛 트레이닝복을 비췄다.
차우진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단순히 눈이 부셔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가 다 입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협회원에게는 생활복인지 제복인지 하는 의복이 제공되는 건 알고 있었다.
차우진도 짙은 녹색과 검은색이 섞인 트레이닝복을 받았으며, 가이드 교육생들도 차우진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협회원이 같은 옷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가 받은 트레이닝복은 교육생 가이드복이라고 불린다는 건 옷을 받을 때 들었고, 짧게나마 가이드 시설 내에서 지낼 때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은 가이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저 옷이 가이드 전용복이라는 걸 확신했다. 에스퍼가 저 옷을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에스퍼 전용 의복은 강하나가 살가죽처럼 입고 다니는 저 트레이닝복이 분명했다.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다니는 에스퍼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에스퍼가 똑같은 옷이 아닌 점을 보아, 나름의 이유로 옷의 종류를 나누는 것 같기는 했지만, 거기까진 차우진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차우진에게 있어, 지금 제일 중요한 사실은 강하나가 매일 입고 다니는 저 옷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강하나를 알고 지낸 지 한 달가량 된 것 같은데 왜 저 사람은 항상 저 옷만 입는 것일까.
다른 옷 좀 입으라고 옷을 골라 줬더니 당시에만 좋아하고 한 번도 안 입은 저 사람도 대단하다 싶었다.
차우진은 강하나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일어날 수 있고 그럴 생각이었지만 강하나는 차우진이 인식하는 것보다 한발 빨랐다.
강하나는 그가 목마르다고 느끼기도 전에 물잔을 내밀고 차우진이 물을 마시는 동안 그의 이마를 짚는 등 상태를 살폈다.
“많이 자서 그런가? 안색이 나쁘진 않네요. 머리가 아프다거나 그렇지는 않죠? 잠은 잘 잤어요? 물 더 드릴까요?”
오늘도 말이 많은 남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질문을 쏟아 냈다.
차우진은 적당히 대꾸하며 물잔을 건네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방에 하나뿐인 침대 위에 있었고 그의 옆에는 차우린이 아직 자고 있었다.
차우진은 자신이 언제부터 남의 침대를 차지하는 무뢰한이 됐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같이 식탁에 앉아서 축하 파티를 했던 것까진 기억이 났는데, 그 이후는 다 오리무중이었다.
약간 멍한 상태였던 차우진은 강하나의 손길에 따라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흐르는 맑은 물로 얼굴을 씻으니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허리보다 약간 낮은 세면대에 얼굴을 박다시피 몸을 기울여 세수를 하다가 고개를 살짝 드니 얼굴에서 물을 뚝뚝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7년 동안 꿈도 못 꾸던 위생 시설을 예전처럼 이용할 수 있게 된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차우진의 머릿속에는 어제부터 떠오른 고민이 다시 피어났다.
그동안은 가이드로서 감금된 미래가 펼쳐질까 봐 그저 두려워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 수준은 차우진의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상이 망하기 전의 위생 수준을 누릴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적어도 식중독이나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는가.
차우진은 지금 생활의 장점에 대해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 강하나에게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지금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안위는 온전히 그 남자에게 달렸다는 것을.
하지만 의외로 그 사실이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강하나는 그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어제도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게 언제더라.’
그는 기억을 거슬러 당시를 떠올렸다.
어제의 그는 네발짐승에서 사람이 됐다가 수사를 받고 이사를 했다.
그렇게 지친 상태로 이곳에 와서 강하나와 함께 맥주를 마셨었다.
그때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던 그 상황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신은 그때 강하나를 붙들고
그에게,
그…… 사람에게……
입을 맞췄다.
“……!!”
마침내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차우진은 하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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