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내가 키우게 된 S급들 (13)
김상혁은 모든 사람이 현관에 들어오고 문을 잠그고 나서야 우진이를 풀어 주었다.
잔뜩 긴장한 우진이가 궁지에 몰린 꽃사슴 같은 눈망울로 김상혁을 노려보았다.
김상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우리를 안으로 들였다.
그렇지만 우진이는 화가 꽤 많이 났나 보다. 우진이는 김상혁을 따라가면서 그 뒤통수에 대고 화를 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항상 무례하죠? 개인의 의사 따윈 당신들에게 알 바가 아니다 이겁니까?!”
김상혁은 그런 우진이를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긴 안으로 들어와서 합시다. 밖보다는 여기가 낫다니까요.”
김상혁은 안으로 성큼 걸어가서 좁은 거실에 네 사람 모두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주스까지 대접했다. 주스를 받고 신난 건 차우린뿐이었지만. 그래도 오빠가 화내는 걸 봐서 그런지 조금은 눈치를 봤다.
우진이도 어린 동생이 자기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아무 말 없이 화를 삭이고 있는 듯했다.
그나마 느슨해지고 있는 긴장 속에서 김상혁이 주스를 원샷하고 말했다.
“그래도 협회 생활이 밖보단 낫죠?”
우진이는 김상혁의 능글거리며 웃는 얼굴에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린이를 한번 보더니 화를 억눌렀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의견을 밝혔다.
“……제 개인정보는 알고 계셔도 여기서 어떻게 지낸다는 소식은 모르시나 봅니다.”
“아, 오늘 일은 아직 정확히는 몰라도 감찰부 다녀오신 건 알아요! 옆방이잖아요~ 전에 강간 사건도 근처에 있어서 듣기는 했고.”
김상혁 때문에 우진이가 다시 열받는 게 눈에 보였다.
끼어들려고 했더니 김상혁이 내 무릎 한쪽을 한 손으로 붙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괴수한테 죽을 일은 없잖아요. 굶어 죽을 일도 없고.”
김상혁은 능글거리던 면상에서 눈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어요. 그건 우진 씨도 동의하죠?”
우진이는 김상혁을 노려보더니 입술을 짓씹었다. 분하지만 동의는 하나 보다.
김상혁은 그 기세를 몰아 또다시 입을 놀렸다.
“그러니까~ 제가 우진 씨를 가이드로 등록한 건 우리 좋게 넘깁시다~ 협회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가이드가 늘어나서 좋고, 우진 씨도 이제 먹고살 걱정은 덜었잖아요? 우린이도 생각하셔야 할 거 아니에요~”
내 친구지만 좀 한 대 때려 주고 싶게 굴던 김상혁은 분하게도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이제 쓰레기 뒤져서 그나마 덜 썩은 음식물 찾는 날도 안녕이고, 괴수한테 위협당하는 날도, 훌리건한테 쫓겨서 도망 다녀야 하는 날도 없을 거니까 너무 노여워 마시고~”
“…….”
“뭐, 협회에서 겪은 일들은 저도 유감스럽게는 생각해요. 그렇다고 협회에 대한 불만을 직접 표출하면 더 위험해지니까 조심하시고요. 정 한풀이하고 싶으면 이렇게 개인적인 공간에서 살짝만 하세요. 맨날 옆에 붙어 주는 저 어린 친구가 들어 주기는 잘 들어 줄 겁니다.”
“…….”
“아아~ 잘 들어 줘서 만만하다고 저 친구한테 화풀이는 하지 마시고요~ 어쨌든 우진 씨를 가이도 등록한 건 저니까~ 화를 낼 거면 저한테 냅시다. 알았죠~ 오케이?”
김상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힐끗 보더니 윙크를 했다.
좀 꼴 보기 싫었지만 나를 생각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거니 일단 참았다.
안타깝게도 우진이는 그 자리에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별 이야기 없이 우린이가 주스 두 잔을 다 마시는 걸 기다려 주고 다 같이 나왔다.
김상혁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나를 위해 지각을 감수한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 자리에서 꺼졌다.
정말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
마침내 내 방으로 이사를 마친 우진이의 안색이 파리했다.
아침부터 일이 많았는데 김상혁이 아주 속을 뒤집고 가서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나는 우진이가 쉴 수 있게 침대로 옮겨 주고 우진이의 옷 가방을 정리했다.
원룸이다 보니 막혀 있는 공간이 별로 없어 침대에 앉아 있는 우진이에게 정리를 하는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진이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저보다 많이 어려요?”
“예?”
“하나 씨 말이에요. 저보다 어리잖아요.”
뜬금없는 나이 이야기에 잠깐 당황했다. 그동안 신상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한 적이 없어서…….
“저에 대한 건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면 억울하잖아요. 말해 줘요. 몇 살이에요?”
우진이의 부드럽고 적당히 낮은 음역대의 목소리가 피로 때문인지 약간 거칠었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감미로웠다. 눈가가 거뭇하고 지친 기색이 있어도 우진이는 보름달이 밝게 뜬 맑은 밤하늘처럼 청아하고 기품 있었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안 좋아하지만 나는 홀린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우진이가 궁금하다는데 대답해야지.
“저는 우진 씨보다 두 살 어려요. 24살이에요.”
“진짜 어리네?”
어느새 우진이는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바로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어린 잎새를 잠시 스쳐 가는 바람 소리처럼 부드러웠다.
침대랑 옷장은 손이 닿을 거리가 아닌데 우진이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내가 대답하면서 우진이 앞으로 다가갔나 보다. 우진이는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으니까.
어차피 짐 정리도 끝났겠다 우진이랑 멀리 있을 필요도 없으니 별 상관없지 않나.
게다가 오늘은 우진이가 이사를 온 모처럼 기념적인 날인데 우진이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
차우진은 어제 아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일까, 피곤으로 엉망이 된 머릿속은 쓸데없이 애먼 생각만 떠올렸다.
가령, 눈앞의 어린애처럼 귀엽게 보이던 남자가 진짜로 자신보다 어렸다든가, 저 짧게 깎은 동그란 머리통을 한번 만져 보고 싶은 생각 말이다.
때마침 남자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머릿속의 생각한 바를 실현해 눈앞에 있는 남자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쓰다듬었다.
피로에 지쳐 충동적으로 남의 머리통을 함부로 쓰다듬었음에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예상했던 대로 까슬까슬하다고 생각하며 손을 떼지 못했다. 잘 손질된 잔디 같은 갈색 머리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차우진은 이왕 지척에서 바로 마주하게 된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소년병처럼 짧은 머리가 깔끔한 이마 선을 그리며 단정하게 끝났다. 머리숱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두피에 잡티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어린 잔디처럼 짧은 머리는 멀리서 보면 매끄러운 도토리 같기도 했다.
이마, 선 아래에 드러난 동그란 이마와 그 밑에 있는 오뚝한 코, 크고 동그란 눈이 아기자기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차우진은 강하나의 어린아이 같은 귀여운 얼굴이 싫지 않았다. 자신이 내려다봐야 하는 눈높이도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머리통도, 강하나가 에스퍼라는 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차우진은 그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그 남자가 갑자기 뛰쳐나가기 전까지.
“…….”
마주 보며 함박 미소를 짓던 남자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11층인 걸로 알고 있는데 창문을 통해 나가다니, 무슨 미친 행동인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까. 사람이 창문으로 다니는 게 대수로운 일인가 싶었다.
그냥 지금은 피곤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오히려 눈앞에 있던 남자가 사라지니 약간이나마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남자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자신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그는 이틀 전부터 시작한 가이드 교육인지 하는 수업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이 가이드인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가이드로서 교육을 받으라니, 매우 고역이었다.
차우진은 가이드의 정의와 역할 등을 줄줄이 늘어놓는 수업 따위를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는 내내 그는 수업에 집중하기는커녕 나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게다가 아직도 예전 모습으로 회복하지 못한 육체 또한, 가만히 쭈그려 앉아 있는 몇 시간 동안 쿡쿡 쑤시며 비명을 질렀다.
끝나지 않을 고문 같은 3시간짜리 수업이 끝나고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겨우 만났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벗어나게 해 주는 사람의 존재란 얼마나 반가운 것인지 그 순간에 새삼 깨달았다.
그런 동시에, 그러한 존재가 자신에게 휘둘리는 모습에서 야비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수업이 듣기 싫어 그에게로 갔다. 그 사람이라면 수업을 빼먹으러 온 자신도 너그럽게 받아 줄 것 같았다.
강하나와 번화가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을 때, 자신의 일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전부 말해 준 덕분에 그를 찾아가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짜증 어린 강하나의 표정을 마주했을 때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차우진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에스퍼라는 사실 말고는 강하나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대가 차우진인 걸 알아본 강하나는 곧바로 웃으면서 그를 반겨 주었다.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 찾아온 주제에 당당하게 사실을 말할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말을 둘러대고 172호실 안으로 들어왔다.
구석에 홀로 있던 유일한 가족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반겨 주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차우진에게 관대한 건 아니었다.
강하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청소년 에스퍼들이 그를 추궁했다.
차우진은 그들에게 동생이 보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막연하게 언젠간 동생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계획에 구체성을 덧붙이려면 동생의 소재도 꾸준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우호적이지 않은 에스퍼 앞에서 약간이나마 솔직한 모습을 내보였던 게 섣부른 짓이었을까.
차우진은 이걸 빌미로 당한 일들을 떠올리자 치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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