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에스퍼와 가이드 (10)
우진이는 병실 문에다가 면회 사절 팻말을 걸어 놨다.
“뭐야, 설마 나도 포함이야? 에이, 아니겠지.”
적어도 나만큼은 사절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병실 문을 열려는 순간에 화영이가 나를 불렀다.
“올해도 우승했더라, 축하해. 다들 네 얘기만 해. S급 잡는 B급이라면서.”
“축하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 우진이 보러 왔거든. 별 얘기 없으면 들어가서 하자.”
“들어가지 마. 우진 씨 면회 안 받는대.”
“난 보호자잖아. 나도 사절이야?”
“당연하지. 너랑 우진 씨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넌 반겨 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듣고 보니 할 말이 없네. 우진이가 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지.
나는 화영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이화영은 나더러 따라오라더니 날 뒤꽁무니에 달고 회진을 돌았다.
‘바쁘면 그냥 나중에 보면 되는데 왜 굳이 날 데리고 일을 하는 거지?’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는 나였지만 화영이가 워낙 바빠서 물어볼 틈을 잡지 못했다. 보는 환자도 엄청 많았는데 대부분 가이드였다.
‘다들 여기 있어서 가이딩 긴축 재정이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긴 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참, 뭐랄까. 대련 대회가 인력을 엄청 쓰는구나 싶었다.
‘사람을 얼마나 쥐어짰길래 다들 여기 있나 싶네.’
협회에서 에스퍼들의 이능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얻어 내면 최종적으로 축나는 건 가이드들이다.
에스퍼들의 이능을 복구하는 건 가이드고 가이딩으로 축나는 가이드를 복구하는 수단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그냥 쉬게 두면 된다고 들었는데 쉴 틈이 없으니까 여기 있는 거겠지?’
그런데 왜 찰과상이랑 타박상 환자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이능 치료를 안 해 주는 건데?
화영이랑 같이 수많은 환자들을 보며 의문이 쌓여 갔다.
회진을 끝낸 화영이는 나를 데리고 둘이서 진료실에 갔다. 드디어 둘만의 대화시간이 된 것이다.
“미안, 매년 대회 끝나는 날에는 너무 바빠서. 지루했지?”
“대회도 다 끝나서 괜찮아.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환자가 대부분 가이드더라.”
“이능을 써서 대련하는 대회를 여니까 뻔한 결과지. 원래 이능력 소비하면 최종적으로 부담을 지는 건 가이드잖아. 게이트 브레이크 때문에 각성한 사람들도 이제 대회 참가하고 그러니까 의료 센터만 더 바빠졌어.”
“그래도 사람 늘면 인력도 늘잖아. 이능력자들 많아지면 좋은 거 아냐?”
“아니야.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로 각성한 이능력자들, 특히 에스퍼들은 매너가 완전 개똥 같다고! 걔들은 진짜 세상이 망한 거에 감사해야 해. 옛날 같았으면 약 먹여서 황무지에 데려간 다음에 다 사살시켰어.”
“맞아! 오세인 걔 사살 안 한다더라?! 원래 에스퍼가 범죄 저지르면 다 사형이었잖아. 근데 걘 겨우 근신이래! 강간범 새끼가! 이게 말이 되냐!”
나는 승환이에게 들었던 얘기가 생각나서 화영이에게 털어놓았다.
내 손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그 새끼를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하지 못하게 됐다고!
분한 심정을 한참 화영이에게 털어놓는데 화영이는 말을 끊고 나더러 진정하라고 했다.
“여기 의료 센터야. 소리 지르지 마. 네 말대로 오세인은 처벌이 너무 약한 감이 있긴 하지. 그런데 어쩌겠어. 협회가 A급 에스퍼가 소중하다 하시는데. 이젠 이능력자 견제하는 정부도 다 사라졌잖아. 사형받는 경우는 없을걸.”
“그래도 근신은 너무 가볍잖아. 우진이는 아직 환자였는데 그 꼴을 만들고. 숙소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면 나한테 죽었어, 그놈.”
“아서라, 에스퍼 린치가 가이드 강간보다 중죄니까. 협회는 에스퍼가 이능 쓰다가 눈 돌아가서 가이드 강간하는 거 그럴 수도 있다고 보거든. 생존 본능으로 3단계 가이딩을 하려는 거라면서.”
생존 본능? 그건 또 뭔 소리야. 뇌가 터질 것 같으면 머리나 부여잡고 바닥이나 뒹굴 것이지 왜 강간을 하냐고.
나는 이능 과다 출력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으면 아무 생각도 못 하겠던데 걔들은 어떻게 그걸 견디고 꾸역꾸역 가이드를 찾아내서 강간을 하냐. 생존 본능이 아니고 의지의 강간마들 아니야?
‘아무튼, 오세인을 한번 패 주고 싶은데 당장은 방법이 없네.’
그 자식은 운도 좋게 대련 대회에 참가했는데 나랑 매칭도 안 되고 떨어졌다. 전투 센스도 없고 임무 맥락 파악도 못 하는 놈이라며 나랑 화영이는 그 자식 욕이나 실컷 했다.
화영이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나빠진 우진이의 상태를 알려 줬다.
그 자식이 가뜩이나 약한 상태인 우진이를 때려서 멍이 좀 심하게 들었지만, 다행인지 어디 부러지거나 그런 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자식이 남긴 상흔은 신체적인 부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너도 알겠지만, 우진 씨가 에스퍼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고 있어. 원래 에스퍼에 대한 공포가 심했잖아. 네가 맨날 얼굴 비추고 간병도 하고 그래서 많이 나아졌지만.”
“그런데도 난 안 되는 거야?”
“지금은 오세인 그 새끼 때문에 처음에 발작할 때만큼 무서워해. 나는 에스퍼인 거 들통나서 못 들어오게 한다니까? 의료팀은 다 치유계 에스펀데 그 사실은 몰라서 다행이지.”
“그냥 우진이 잘 때 상처 치료해 주면 안 돼? 저번에도 몸 많이 좋아지니까 나아졌잖아.”
“지금 가이딩 긴축 재정이라 이능 치료 안 해. 기성 가이드들도 치료 안 하는데 교육도 안 받은 가이드를 해 주겠니?”
“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른 가이드들은 왜 다친 거야? 우진이야 뭐 그 새끼 때문에 다친 거지만.”
“원래 가이딩하다가 다치는 가이드 많아.”
“그러니까 대체 원래 왜 다치냐고. 신체 접촉해서 가이드가 이능을 쓰는 게 가이딩인데 여기에 다칠 요소가 어디 있냐는 말이야.”
내 말을 들은 화영이는 날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내가 순진한 건지 둔해 터진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의료 센터에 있으면 말이야. 대부분 받는 환자가 가이드들이야. 왜 그런 줄 알아?”
“가이드들이 이능 사용 부담을 제일 마지막으로 받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가이딩 이능 부작용은 치유 에스퍼들이 못 고친다며.”
“그건 절반만 맞아. 입원할 정도로 혹사당한 가이드가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에스퍼한테 맞아서 오거든. 임무 중에 가이딩하다가 맞는 사람들이 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가이딩 받는 에스퍼들이 가이드를 때린다고? 사람을 왜 때려?’
어처구니없는 천인공노할 쓰레기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 준 화영이는 내가 분노하는 바람에 끊긴 끔찍한 사실들을 마저 알려 줬다.
“협회는 에스퍼들이 가이딩 단계를 높이라고 폭력을 쓴다는 걸 알고 있어. 그렇지만 제재할 생각이 없지. 그게 에스퍼의 생존 본능에 기반한 행위라고 믿거든. 그래서 가이드들이 가능하면 임무에 복귀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야. 보호받지 못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동안 비어 있던 퍼즐 한 조각을 찾아낸 기분이네.
어쩐지 마주칠 때마다 쭈뼛거린다고 느껴졌던 가이드들의 행동이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날 무서워했던 거였구나.’
그렇지만 난 이해가 가면서도 그들이 나를 안 무서워하길 바랐다.
특히 우진이만큼은 나를 안 무서워했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이 우진이의 병실로 찾아갔다.
뒤에서 화영이가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문 앞에 걸린 면회 사절을 싹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누워 있던 우진이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우진 씨! 그냥 누워 계셔도 괜찮아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우진이는 날 쳐다보지도 않고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지 똑바로 앉지 못하고 몸 한쪽을 헤드 보드에 기대고 끙끙거렸다.
우진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찢어질 듯이 아프고, 오세인에 대한 분노도 다시 타올랐다.
하지만 난 이러려고 온 게 아니야.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대회는 재밌으셨나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가해자 말입니다.”
나에게 묻는 우진이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사람은…… 우진 씨를 해친 사람은 근신 처분을 받기로 했어요. 연구 센터에서만 활동하게 될 겁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어…… 그렇네요…….”
나도 그것 때문에 착잡하지만, 당사자인 우진이만큼은 아니겠지. 우진이의 결연했던 표정은 점차 어두워지고 시선도 아래로 내렸다.
우진이는 몸이 불편해서인지 헤드 보드에 더 가까이 붙어 몸을 옹송그렸다.
그러고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협회는 바깥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협회가 아닌 바깥?
맞다. 우진이는 원래 협회가 아닌 밖에서 사는 민간인이었다.
멀쩡한 곳이 없이 다 무너진 건물투성이에 괴수가 돌아다니고 식량과 물자를 얻기 위해 서로 약탈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협회의 바깥세상이지.
특히 협회 밖에서 사는 에스퍼들은 무뢰배들 우두머리인 경우가 많았다.
‘우진이는 그곳에서 만난 에스퍼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이 많아지니 결국 우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진이는 힘없이 나에게 나가 달라고 했고 나는 우진이 말을 따라 허무하게 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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