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에스퍼와 가이드 (9)
나는 가벼운 동상을 치료받고 가이드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잠시 상혁이를 만났다.
이 정도 기다렸으면 범인을 잡았을 것 같아서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내 대기실에 들어온 상혁이가 말했다.
“일단, 듣기 전에 화내지 말고 먼저 경기를 우선시하겠다고 약속해. 그럼 말해 줄게.”
“…….”
지금은 상혁이 놈 때문에 화가 날 것 같다.
하지만 난 지성인이니까 참아냈다.
"알았어.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봐."
내 대답을 들은 상혁이는 나에게 가까이 붙었다.
아주 중요한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 범인은…… 오세인이래. 너희 팀 자연계.”
“그 새끼 전에 날 난쟁이 땅굴 터뜨린 놈이잖아?”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더니 아주 어딜 가나 사고를 치는구나.
“이번 기회에 위험인물로 연구소에서 썩는 인생을 살게 해 줘야지. 안 그러냐, 상혁아? 지금 당장 오세인을 연구소로 보내고 오자!”
내 포부를 들은 상혁이는 일단 진정하라며 나를 대기실로 돌려보냈다.
‘나는 흥분하지 않았는데 뭘 진정하래?’
떠밀리다시피 대기실에 도착하니 피곤한 얼굴의 가이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이딩을 받고 다음 경기를 준비했다.
이번 상대는 특수계 장재원 씨다.
이 사람은 중력을 다룬다.
과중력으로 괴수를 으스러뜨리는게 특기인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이딩 긴축 재정일 때는 상대적으로 이능 부담이 적은 무중력을 많이 쓰겠지.
삐익-
역시나 시작하자마자 내가 발돋움하기도 전에 서 있는 곳을 무중력으로 만든다.
나는 장재원 씨의 이능력 때문에 두둥실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추지 진력을 얻기 위해 땅을 밟아보려고 발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지면을 디딜 수가 없으니 다가가지도 못하고 둥둥 떠 있게만 되네.’
하지만 장재원 씨는 중력을 다루는 것 말고는 다른 이능이 없어 무중력 좌표에서 타격을 줄 수단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띄워만 놓으면 연구진에게 별로 좋은 평가를 못 받는다.
사실 대련 대회의 목적은 에스퍼가 이능으로 다른 에스퍼를 제압하는 모습을 연구진이 관찰하게 해주는 것이다.
연구소에 전투 에스퍼들을 잔뜩 불러가면서 관찰을 위해 싸우라고 하면 이상한 소문이 나기 쉬우니까, 대회의 모습을 취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연구원들에게 이능으로 싸우는 모습을 실컷 보게 해줘야 한다.
이렇게 제압 안 하고 시간만 보내면 연구진이 매우 싫어한다.
당연히 좋은 평가는 물 건너가고.
지금처럼 상대 공격을 막기 위해 본인 공격도 안 먹히는 상태로 만드는 건 관중도 안 좋아한다.
공격하기 위해서 장재원 씨는 분명 무중력을 풀 거다.
‘그때 기회를 보면 돼.’
장재원 씨는 날 띄워 놓고 어떻게 공격할지는 생각을 안 했던 모양인지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무중력 상태만 유지했다.
덕분에 나는 팔자에 없는 공중부양을 실컷 즐겼다.
중력의 영향을 안 받으니 무게중심이 잡히지 않아서 세탁기 속의 빨래처럼 몸이 돌아갔다.
내 머리가 지면에 가까워지는 자세가 되자, 장재원 씨는 무중력을 해제했다.
그리고 다시 띄우고 해제하고를 반복했다.
쿵. 쿵. 쿵.
덕분에 나는 바닥에 열심히 머리를 찧는 중이다.
내 머리가 절굿공이도 아니고 말이다.
‘높이가 높지는 않아서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되게 정신 사납네.’
그렇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이 아닌 이상, 틈을 잡아낼 수 있다.
‘찰나의 틈만 잡아내면 역전할 수 있어.’
나는 장재원이 이능력으로 내 머리를 바닥에 찧는 동안, 천천히 몸을 굽혀 발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발바닥이 땅에 닿을 위치가 되었다.
나는 무중력이 풀린 틈을 타 땅을 짚고 무중력 지점을 벗어났다.
하지만 장재원 씨는 금방 내가 옮긴 위치로 좌표를 수정해서 날 띄웠다. 그리고 다시 이능을 풀었다.
“아, 진짜… 거슬리네.”
생각보다 장재원 씨의 좌표계산이 빠르다.
그렇지만 응용력은 없어서 같은 방법으로 날 공격할 모양인 듯 했다.
‘내가 바본가 그걸 또 당하게?’
나는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틈을 봐서 지면을 짚고 도약했다.
이번엔 내가 원하던 대로 충분히 높이 멀리 뛰었다.
‘좋아, 이 정도 거리랑 높이면 충분하다.’
전투 센스가 별로 없는 장재원 씨는 또 같은 방식을 사용하겠지.
좌표를 계산해서 무중력을 써봤자 다시 과중력을 쓸 테니, 과중력인 틈에 장재원 씨한테까지 피해를 줄 위력을 내야 한다.
나는 아래로 추락하는 힘과 내 이능을 사용해서 힘껏 바닥을 부쉈다.
쾅!
함소영만큼은 아니지만, 경기장에 서 있던 사람이 충격에 휘청거릴 수준은 되었다.
원래도 전투 센스가 부족한 장재원 씨는 땅이 울리는 충격을 겪으니, 이능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능도 풀렸겠다, 나는 아직 나를 띄울 좌표를 찾지 못하고 경기장에서 허둥대는 장재원 씨에게 다가가서 뒤통수를 내리쳤다.
퍽!
이번에도 당연히 승리는 내 몫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 경기 남았다. 이것만 끝내면 그놈을 조지러 갈 수 있어.’
경기장에서는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지막 도박판에 잔뜩 신나 있는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세인, 딱 기다려라. 이것만 빨리 끝내고 끝장내러 가 주마.”
나는 시끄러운 함성 속에서 오세인에 대한 투지를 다졌다.
***
결승전 상대는 역시나 송주하다.
송주하의 이능력인 염동력은 분명 사기적인 이능력이다.
그냥 집중만 하면 물건이 원하는 대로 날아다니고 자기장이 막 일어나잖아.
하지만 대련 대회에서는 사이코 키네시스의 자기장 방어막을 금지한다.
그래서 미숙한 염동력자는 갑자기 훅 가 버릴 수가 있다.
그렇지만 송주하는 경력이 좀 있는 염동력자에, 같은 팀이다 보니 나랑 합을 맞춰 본 적이 많아서 내 전투 스타일을 매우 잘 안다.
뒤집어 말하면 나도 주하의 전투 스타일을 매우 잘 안다는 것이다.
주하는 상대를 직접 염동력으로 제압하는 거보다 주변의 사물을 활용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게 더 이능 낭비가 적다고 한다. 그래서 주하는 대련이 시작하자마자 이능으로 바닥부터 박살 냈다.
쿠쿵!!
협회의 기물은 화수분처럼 무한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한번 부서지면 복구 이능의 에스퍼들이 건축 전문가들과 함께 다시 수리한다.
부서지면 협회의 돈이 깎여 나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협회는 함부로 기물 파손하는 에스퍼들을 줄이기 위해서 복구 비용을 에스퍼한테 청구했다.
물론 세상이 망했기 때문에 다들 돈이 없으므로, 협회가 정한 액수까지 무급으로 일하게 된다.
무급으로 일하면 다들 밥은 맨날 협회 식당에서 주는 무료메뉴만 먹어야 하고 여가를 못 즐기게 된다.
수감된 죄수같이 생활하게 되기 때문에 다들 꺼리지만, S급은 다르다.
그들은 원래 연구소에 갇혀 살다시피 하기 때문에 남들이 기피하는 죄수 생활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S급 애들은 기물 파손을 거리낌 없이 했다.
지금처럼.
주하는 경기장 바닥을 커다란 돌덩이들로 나누어 놓은 다음 그 돌덩이로 나를 찍어 누르려고 했다.
‘S급 아니라고 할까 봐 스케일이 참 어마어마하시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피해 냅다 뛰었다.
분명 송주하는 내가 최대한 신체 강화 이능을 낭비하게 만들어서 힘을 빼놓으려는 계획일 거다.
송주하는 S급이고 나는 B급이라서 최대 출력도 지속 출력도 내가 불리한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3분밖에 없는데 그냥 뛰기만 하면 내가 불리하다.
나는 주하가 날린 돌덩이에 뛰어올라 그대로 붙잡고 기어올랐다.
주하는 그런 나에게 다른 돌덩이를 날렸지만 난 새로운 돌덩이에 옮겨 탔고 그 위에서 주하에게 도약했다.
‘주하의 약점은 본인이 서 있는 위치에서 잘 안 벗어난다는 것이지.’
주하가 도약하는 나에게 돌덩이를 날렸지만 나는 신체 강화 이능을 사용해 부숴서 충격을 완화하고 그대로 주하에게 닿았다.
그리고 내 사정거리 안에 든 주하는 나와 만난 다른 참가자들과 같은 순서를 밟았다.
삐익!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이번 대련 대회도 역시!! 우승자는 강하나 에스퍼입니다!”
“와아아아아아!!”
경쾌한 목소리의 해설과 함께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대련 대회가 끝났다.
폐막식에서 나는 우승 소감도 없이 단상에 얼굴만 비추고 내려왔다.
어차피 대련 대회는 상금도 적고 그냥 인사 평가 좋게 받으려고 참가하는 대회라서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에게는 폐막식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중앙 센터로 가서 오세인이 어떤 처벌을 받나 확인하는 것이다.
***
중앙 센터에는 대회 결승전인데도 근무하는 승환이가 있었다.
나는 승환이에게 곧장 오세인에게 대해 물어보았다.
“오세인이 덮친 가이드가 네가 좋아하는 걔였어? 걔는 아직 정식으로 가이드 소개란에도 안 올라갔고, 다들 잘 모를 텐데. 오세인 그놈 엄청 민감한가 봐. 가끔 파장에 민감한 이능력자가 있잖아. 문제는 그런 애들이 꼭 사고를 쳐서 그렇지만.”
“그런 거보다 오세인 처벌 뭐 받냐니까? 사형하면 집행 내가 하게 해 줘.”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에 전력 하나하나 엄청 아끼는데 사형은 뭔 사형이야. 그놈도 시대를 잘 맞춰서 각성했네. 7년 전이면 바로 끌려가서 사살당했을 텐데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에 각성해서 운도 좋아.”
“그놈은 그럼 무슨 형 받는데? 원래 에스퍼는 범죄 저지르면 다 죽였는데 세상 참 좋아졌네.”
“당분간 근신이라고 들었어. 그리고 너희 팀에서 짤렸단다.”
“……뭐야? 설마 그게 다야?”
“내가 들은 건 그게 다야. 연구소 밖으로 최대한 안 내보낼 거래.”
“가이드는 임무 없으면 다 연구소에서 생활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연구소에 있으면 관리는 철저하게 되잖아.”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무튼. 네가 좋아하는 사람 일은 유감이지만 여기서 화풀이하기보다, 그 사람한테 가서 제대로 위로해 주는 게 더 그 사람을 위하는 일 아닐까?”
“이런, 미친.”
어느 연구팀 소속으로 보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연구소에서 근신을 하는 거뿐이라니.
곱씹을수록 화가 났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분풀이는 할 수 없었다. 이게 승환이의 잘못도 아니고 말이다.
오세인이 별일 없다는 사실이 분했지만, 일단은 우진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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