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 마이 히어로-15화 (15/81)

15. 에스퍼와 가이드 (6)

그러고는 꽤 멀리까지 나와 관중석 입구 근처까지 나왔다.

“저기요, 저 15분 뒤에 경기 또 있거든요? 왜 이렇게 멀리 나오는 거야?”

그렇지만 화영이는 내 말을 무시하고는 아예 경기장 바깥으로 나를 이끌며 근처 벤치로 날 데려갔다.

그런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우진이였다.

“우와, 벌써 이만큼이나 걸어올 수 있어? 의료 센터랑 여기는 거리가 좀 있는데?”

내가 화영이한테 질문을 마구 내뱉으며 가까이 가는 사이에 우진이가 날 보더니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하, 세상에, 누가 햇빛 아래에 형광등 100개 켜 놨어? 눈이 부셔서 뜨지를 못하겠네.’

우진의 보행기 안장에 앉아서 바퀴를 굴리며 놀던 우린이도 날 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김상혁이 보행기를 앞뒤로 밀어 주면서 우린이와 놀아 주고 있었다. 또 김상혁 짓인가?

“다들 하나 씨 경기가 재밌다고 해서 같이 보러 왔어요.”

내 천사 우진이가 저런 말을 하면서 웃으니 김상혁을 못 까겠다.

온갖 부정하고 더러운 걸 녹이는 우진이의 미소에 이런 험악한 장소로 우진이를 끌어들인 김상혁에게 화를 낼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런데 우진이는 여기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 온 건가? 얜 내 이능도 뭔지 모를 텐데?’

우진이는 에스퍼를 무서워했던 게 기억나서 불안하다.

“그런데 이 대회는 에스퍼들끼리 이능을 사용해서 겨루는 자리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래도 하나 씨 경기는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또 하나 씨가 하시는 건 괜찮을 것 같고요…….”

우진이는 또 눈을 살짝 피하면서 얼굴을 붉힌다.

‘귀여워. 에스퍼는 무섭지만 나는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잖아!’

우진이의 투명한 듯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드는 걸 보니 새하얀 눈밭 위에 떨어진 동백꽃 같다. 단아하고 아름다워. 우진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리틀 우진이처럼 생긴 우린이가 주머니에서 뭔가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이게 뭐야?”

펼쳐 보니 색연필로 아기자기하게 그린 그림이랑 글자 몇 개가 틀렸지만‘강하나 오빠 힘내세요’라고 쓰인 응원 편지였다. 글자 하나하나 색이 다르고 그림들도 총천연색인 걸 봐서는 색연필 모든 색깔 다 썼나 보다.

“고마워, 우린아. 꼭 우승하고 올게~”

우린이는 예의상으로 하는 감사 인사에도 헤벌쭉 웃었다. 우진이랑 꼭 닮은 어린애가 해맑게 웃으니까 너무 귀여웠다.

그렇게 우린이와 우진이에게 응원을 받은 나는 다음 경기를 위해 대기실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상혁이가 뒤따라오더니 나에게 말했다.

“강하나. 내가 승리의 주문을 알려 주마.”

“뭔 소리야 그건 또?”

“차우진 씨 너한테 돈 걸었다. 내가 빌려줬음.”

상혁이 놈은 기어코 우진이를 도박의 세계에 입문시켰다. 돈까지 빌려주다니 진심이네. 그건 그렇고 우진이가 나한테 돈 걸었다고?! 얼마나 걸었는데?

내 질문에 김상혁은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귓속말로 알려줬다.

음… 많이 빌려주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내 승리에 우진이 금전 사정이 걸려 있다고 하니 의욕이 솟기 시작했다.

원래도 질 생각은 없었지만, 더욱더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내가 재미없는 F급 경기를 열심히 본 만큼 우진이도 내 경기 열심히 볼 거 아냐. 꼭 이긴다.

의욕에 불타던 나는 B급 대련에서 우승을 했고, A급 대련에 참가하게 됐다.

A급 대련은 대련 대회의 하이라이트지.

이능 화력이 가장 센 애들이 모여 있는 경기라서 볼거리가 화려하다.

또한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에 있는 방어용 자기장이 가장 열심히 일하는 대련 경기이기도 하다. 이능의 화력이 세면 멀리까지도 영향이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안전한 방어막 안에서 위험한 상황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니까 A급 대련 구경을 좋아한다.

게다가 여기서 우승하면 최종 우승자니까 제일 인기가 많다.

A급 위에 S급 단계가 있긴 하지만, S급 에스퍼는 워낙에 숫자가 적고 위험해서 대회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S급은 A급 준준결승전쯤에 끼워서 출전시키기 때문에 S급 전용 대련이 따로 펼쳐지진 않는다.

그래서 A급 대련의 우승자가 최종 우승자인 것이다.

오늘부터 결승전이 열리는 날까지 3일 동안 A급 대련 경기를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대기실에서 가이딩을 기다렸다.

이제 경기가 1시간 뒤에 시작인데 가이드가 좀 늦는다. 오늘 참가자가 그렇게 많은가? 괜히 대기실에 있는 TV를 켜서 A급 대련 대회 개막식이나 봤다.

“와, 사람 많은 것 좀 봐. 폭죽까지 터뜨리네?”

어제까지의 B급 대련날과는 너무 다른 취급이다. 다들 A급 에스퍼를 너무 우상화한다니까. A급 미만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맨날 A급 이상은 돈 많이 주는 일 시키고 숙소도 더 넓고. 하여간 엄청 차별한다니까.

똑똑-

"네~ 들어오세요."

내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한창 구시렁거릴 무렵, 드디어 가이드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오늘은 B급 가이드 최도원 씨네. 되게 피곤해 보인다.’

도원 씨는 파리한 얼굴로 내 팔뚝을 걷고 양손으로 잡은 다음에 1단계 가이딩을 했다. 하긴 대련 대회 때문에 에스퍼보다 가이드가 더 피곤하겠다.

원래 가이드들은 에스퍼보다 숫자가 더 적은 데다가 참가자들한테 경기 전후로 가이딩 해 주려고 계속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가이드의 숫자가 부족해서 F급까지 싹 긁어모아서 부려 먹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나처럼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다.

보통은 에스퍼의 등급에 맞는 가이드를 붙여주는데 그제는 F급 가이드 세 명이 날 가이딩해 주려고 왔었기 때문이다.

급수가 한참 차이 나면 부담이 엄청 심한데 사람이 없으니까 머릿수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같은 등급이 왔으니 상황이 나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이딩 끝났습니다. 강하나 에스퍼님.”

“아, 고맙습니다.”

잠깐 딴생각하는 사이에 가이딩이 끝났다.

“그런데 최도원 씨 낯빛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으세요?”

형편이 좀 나아진 거 같아서 같은 등급의 가이드를 보냈나 했는데, 최도원씨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이제 보니 입술도 죄다 갈라지고 옷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랑 손목에는 멍 자국이 보인다.

최도원 씨는 그런 몰골을 했으면서도 힘없이 웃으면서 괜찮다고 경기 잘하라고 격려까지 해 주셨다.

아니, 그게 전혀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의료팀 애들은 가이드 치료 안 해 주고 뭐 하냐? 대련 대회 참가자들이 더 우선이라 미룬 거야?

뭐, 그런 거면 도원 씨가 응급환자는 아니니까 어쩔 수는 없지. 협회가 이런 식으로 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씁쓸한 현실을 이해하며 경기장으로 나섰다.

A급은 B급을 상대할 때와 비슷하지만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련의 방식은 같지만 이능의 화력이 훨씬 세기 때문에 맞으면 아프기 때문이다.

이런 얘길 들으면 B급이 A급을 상대할 때 필요한 기술은 회피 같지만 피하기만 하면 공격이 어렵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은 그동안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파고들어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상대하는 사람처럼 발로 거리를 재는 사람은 한발로 균형을 잡으며 폴짝거리는 중이기 때문에 이렇게 발을 붙잡아 돌려 넘어뜨리면 넘어지게 되어 있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순간에 반격이 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무방비하게 넘어지는 상대의 턱을 연속으로 쳐서 기절시켰다.

“와아아아아아!”

상대가 녹다운 한 모습을 본 관객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나는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승리의 현장을 빠져나왔다.

오전 경기들이 모두 끝났다.

대기실에서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스마트워치가 진동했다.

협회로부터 온 공지였다.

가이드가 부족해서 지금부터 가이딩 긴축 재정에 들어가니 이능 사용을 최소한으로 해 달라고 한다.

‘아니, 이능 대련 대회 중이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람?’

한참 피 터지고 다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기에 가이딩을 최소한으로 해준다는 공문을 보니 기가 막혔다.

'아, 그렇지만 이능을 최소한으로 쓰면 격투기에 더 의존하게 되지.'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깨달음에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의 상황이면 내가 유리하다. 다들 폭주하는 게 무서워서 이능을 잘 안 쓰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나는 곧바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대기실 문을 누가 두드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상혁이와 해미, 승환이였다.

얘들은 들어오면서 나와 같은 긍정 회로를 돌렸는지, 내가 더 유리한 조건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 줬다.

나는 친구들을 만난 김에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갔다.

우리는 중앙 센터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누가 얼마나 땄는지와 평가를 괜찮게 받을 듯한 에스퍼 혹은 평가를 나쁘게 받을 듯한 에스퍼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상혁이는 B급이면서 강력한 우승 후보인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A급 친구들아, 하나를 좀 봐. B급 신체 강화지만 벌써 A급 계열 경기 중반까지 2분도 안 돼서 끝냈잖아. 얘 분명 S급이랑 붙어도 2분 안에 끝낼 거야. 급수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협회도 급수로 차별하는 거 그만해야 해. 우리 B급의 희망, 강화계의 꿈 강하나 씨가 친히 알려 줄 거다.”

하지만 A급 에스퍼인 박해미과 조승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B급이나 A급이나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래? A급이 하는 거 거의 다 하더만.”

“이래서 이미 다 갖고 있는 A급들은 안 된다니까. A급 대회 시작하니까 폭죽도 쏘는 거 못 봤어? 지금까진 연설만 대충하고 끝냈는데 말이야. 너희들 기숙사엔 방도 있잖아. 우린 다 원룸인데.”

“우리 위에 S급도 있는데 걔들은 안 부럽냐? 돈은 걔들이 제일 많이 받을걸? 협회 우선순위에서도 1순위고.”

“걔들은 연구소에 갇혀 살다시피 해서, 그건 별로 안 부러운걸. 숙소도 연구 센터 안에 있잖아.”

음, 상혁이 너 은근, 아니 많이 A급 부러워했구나. 화력 센 거 멋있긴 하지. 협회에서도 잘 챙겨 주고.

그러고 보니 우리 동기 중에서 나랑 상혁이만 B급이고 다 A급이라, 등급별 대우를 비교하기가 쉽긴 했다.

근데 이능 특출나서 어디다 써. 연구소나 맨날 불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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