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 마이 히어로-13화 (13/81)

13. 에스퍼와 가이드 (4)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로 기존 동물들이 70% 사라졌다. 동물도 적고 인간도 적어서 축사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젠 세상에 가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더 이상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없는 건 아니다. 연구 센터는 에스퍼의 이능을 쥐어짜 낸 끝에 인공 고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대량 생산도 가능했다. 그 덕분에 협회는 센터 식당에다가 고기 물량을 공급하는 걸 넘어서 다운타운 식당가에도 도매하고 있다.

왜 이런 얘길 꺼내냐면 상혁이가 고깃집에서 모이자고 했기 때문이다. 내 주머니를 털어 가려고 안달 난 게 틀림없다.

느긋하게 나갔더니 김상혁, 조승환, 박해미가 먼저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영이까지 오면 다 모이는 건데 화영이는 오늘 당직이라 못 온다고 했다.

한 명이 비긴 했지만, 괴수 처리 중급-f반이 오랜만에 다 모였다.

우린 게이트 브레이크 당시에 같은 조원으로 괴수를 퇴치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제 현장 나가는 사람도 나랑 상혁이뿐이다. 해미는 순간 이동 이능력자라 연구팀이 연구 대상이라고 안 놔줘서 아예 연구팀 소속으로 들어갔고 승환이는 행정부, 화영이는 의료 센터의 팀으로 갔으니 다시 모이려면 이런 자리에서 모여야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잠깐 과거 회상을 하고 희희낙락거렸다.

애들의 요즘 관심사는 대련 대회다. 내일부터 F급 대전 시작인데 누구에게 걸지 전략 회의를 했다.

‘F급 대련은 재미없다고 보는 사람도 적은데 너희 도박에 진심이구나.’

그렇게 실컷 잤는데도 애들이랑 대화하는데 하품이 나온다. 너희 얘기가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야. 그냥 몸이 늘어져서 그래.

계속 피곤해하는 게 티가 많이 났는지 해미가 내 걱정을 했다.

“너 괜찮아? 오늘 되게 피곤해 보인다. 원래 그 정도 검사받은 걸로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잖아.”

“이능 과다 출력하고 검사받아서 그런가 봐. 자도 자도 졸리네.”

“그거 가이딩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아직 뇌 회복이 덜 된 것 같은데. 가이딩 더 받아 봐.”

“그런 건가? 과다 출력 되게 오랜만이라 잘 모르겠네. 그런데 요즘은 대회 때문에 가이딩 긴축 재정 기간이라고 이 정도는 안 받아 줄 것 같은데.”

“넌 대회 참가자잖아. 연구원들이 네 데이터 뽑아내려고 혈안이 됐을 텐데 가이드 닦달해서라도 가이딩 받게 해 줄 거야. 아니면 그냥 아는 가이드한테 해 달라고 찔러 넣어 봐.”

가이딩은 연구 센터 가면 연구팀의 판단하에 따라 언제든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좀 절차가 길고 가이딩 하러 오는 가이드 표정이 어두워서 늘 꺼려졌다.

‘게다가 연구진들이 자꾸 방송으로 뭐 해 보라고 요구해서 더 기분 나빠.’

그래서 가이드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에스퍼들은 이런 기분 나쁜 연구 센터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가이딩을 받기도 한다. 상호 동의하면 전혀 문제없으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개인적으로 친한 가이드가 없는 것이다.

일하면서 자주 보니까 아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개인적인 가이딩을 부탁할 정도로 친한 사람은 없다.

‘그냥 참을까? 이 정도면 며칠 쉬면 괜찮을 거 같은데.’

연구 센터 가이딩은 너무 꺼림칙하다. 차라리 현장에서 긴급 가이딩을 받고 말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상혁이가 말을 걸었다.

“너 아는 가이드 있잖아. 차우진 씨.”

“이 자식이 자꾸 우진이 끌고 오네. 야! 사전 교육밖에 안 받은 가이드한테 가이딩 시키면 징계인 거 몰라?!”

“워- 진정해. 동의받고 하면 되잖아. 너도 심각한 상태 아니어서 1단계 가이딩으로 살살 받으면 아무 문제없다고. 혹시 모르니까 동의 사실은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해야겠지만.”

잘못됐을 상황까지 예상해서 조언해 주니까 더 열받는다.

‘김상혁. 너 꼭 대련 대회에서 나랑 매칭 걸려라. 묵사발을 내줄 거니까.’

그래도 우린 티격태격하던 걸 금방 가라앉히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4명이 고기 20인분을 해치웠다.

물론 고깃값은 내가 냈다.

***

스마트워치 진동으로 잠에서 깼다.

시간은 오전 10시 반이다. 이 시간에 혼자 못 일어나는 걸 보니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 상태이긴 한가 보다.

아직 진동이 안 꺼져 스마트워치를 보니 미등록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제 세상에는 보이스 피싱할 사람들도 죽었고 보험 파는 사람들도 없으니 보험 광고도 없다. 언론은 당연히 없으니 여론 조사도 없지. 그래서 나는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하나 씨 번호 맞나요?

목소리 되게 좋네. 누구지? 들어 본 것 같은데.

“제가 강하난데, 그쪽은 누구세요?”

-하나 씨, 저 차우진이에요.

헐, 반쯤 졸고 있었는데 잠이 싹 달아났다. 우진이가 전화를 어떻게 건 거지? 스마트워치는 정규 교육 시작 전에 나눠 주긴 하지만 내 번호는 알려 준 적 없는데?

우진이 쪽에서 뭔가 시끄럽더니 어린애 목소리가 들린다. 우린인가 보군.

우린이는 오빠와 실랑이를 하며 뭔가를 끊임없이 말했다.

계속 들어 보니 아저씨가 이걸 줬다. 그런 내용인 것 같은데 상혁이가 다녀간 모양이다. 그놈이 내 연락처를 알려 줬나 보다.

우진이는 동생과의 실랑이를 마무리했는지 나에게 오늘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난 당연히 간다고 했다.

***

‘세상에 마상에! 우진이가 먼저 날 찾는다니!’

머리는 무겁지만, 발걸음만은 가볍게 우진이를 만나러 갔다.

우진이는 의료 센터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보행기의 힘을 빌렸지만 혼자서 여기까지 나올 수 있구나 싶었다.

속으로 기특해하고 있는데 우진이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우와. 우진이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줄 알았어. 쟤는 어쩜 이도 저렇게 하얗고 가지런할까?’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살짝 웃는 눈 모양이 맑은 밤하늘의 반달 같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하얀 자개처럼 빛나는 흰 피부가 고혹적인 우진이는 왼쪽 눈 밑에 눈물점이 있어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오늘따라 빛나게 아름다운 우진이가 가을 햇살 속에 있어 그런지, 후광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어 무아지경으로 바라만 보는데 우진이가 괜찮냐고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시네요. 괜찮으세요?”

“하하, 그런가요? 전 괜찮아요. 임무랑 검사를 연달아서 처리했더니 조금 피로가 쌓였나 봐요.”

“아까 상혁 씨가 다녀갔는데 하나 씨가 저번 임무에서 낸 이능 출력에 비해 가이딩을 충분하게 못 받은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요즘은 가이딩 받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괜찮으시면 제가 가이딩 해 드릴까요?”

김상혁 놈 기어코 우진이에게 가이딩 시키려고 하냐고. 만나면 죽여야지.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우진 씨 교육도 안 받으셨는데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마음이 쓰여서 그래요. 실려 오신 것도 봤고……. 여러모로 도움 많이 주셨는데 저도 돕고 싶어요.”

우진이는 손사래 치는 내 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이제 난 거절할 수 없었다.

‘우진이가 가이딩해 준다니까 좀 꿈같고 그래. 너무 좋다!’

내 동의를 받은 우진이는 나와 깍지 낀 양손에 조금 힘을 주고 심호흡을 하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마주 잡은 우진이의 손에서부터 퍼져 나온 청량한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거쳐 온몸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계속 무거웠던 머리가 날이 개는 것처럼 싹 가벼워졌다.

‘후아, 좀 살 것 같네. 그런데 우진이 가이딩 할 줄 알잖아?’

보통 가이딩 처음 하는 초짜 가이드들은 할 줄 몰라서 한참 헤맨다.

아무래도 에스퍼가 있어야만 발휘할 수 있는 이능이다 보니 어떻게 하는지 감을 못 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하게 해내다니 우리 우진이는 천재 가이드인가 봐.

가이딩을 마친 우진이는 눈을 뜨더니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머리는 상쾌해졌지만, 이번엔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황홀경에 빠져 우진이를 바라보던 나는 우린이에게 가로막혀 우진이 얼굴을 못 보게 되었다.

우린이는 벤치 위로 뛰어올라 오더니 덥석 우진이를 끌어안아서 내 시야에서 우진이를 가려 버렸다. 우린이가 안겨 오는 통에 우진이는 내 손을 놓았다.

우리가 가이딩하는 동안 우린이는 낙엽을 주우면서 놀았나 보다. 양손에 하나씩 낙엽 다발을 들고 있던 우린이는 우진이에게 다발 한 개를 선물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내게도 남은 다발을 건네주었다.

“오빠도 꽃 줄게. 그러니까 우리 오빠 거 뺏으면 안 돼요.”

얘 좀 봐. 내가 언제 우진이 거 뺏었다고 그래. 난 내 거도 우진이한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 우린이가 섭섭한 소릴 했지만 나는 주는 선물을 받아들였다.

빨간 단풍잎을 노란 은행잎들로 감싼 모양이 제법 꽃 같았다. 우린이가 미적 감각이 있구나.

우린이는 절대 뺏기지 말라고 우진이에게 당부하고 다시 낙엽을 주우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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