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에스퍼와 가이드 (3)
‘아, 또 상혁이네.’
땡땡이의 화신 김상혁 씨는 오늘 오전 훈련도 땡땡이치나 보군. 지금이 오전은 맞나? 설마 오후인 건가? 벽시계를 확인하는 사이 김상혁은 병실 침대까지 다가왔다.
“강하나! 괜찮냐? 산사태로 조난당해서 일곱 시간 동안 이능 쓰면서 살아남았다며?”
상혁이가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되는 정보를 제공해 주면서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게다가 정보도 묘하게 틀렸다.
나는 다른 팀원의 이능 실수로 갇힌 거거든? 걔가 실종자 탐색보다 괴수 퇴치에 눈이 멀어서 지반을 다 부숴 놨던 거라고.
김상혁이 쓸데없는 정보를 늘어놓는 바람에 정정 과정을 거치자, 우진이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내가 어떻게 이능 과다 출력이 됐는지는 몰랐나 보다.
우린이도 상혁이를 만났던 게 기억이 났는지 아는 체를 했다.
“어? 딱지 아저씨다.”
“응? 어?! 너 우린이구나? 오빠랑 딱지 연습은 많이 했니?”
“오빠가 그건 딱지가 있어야 할 수 있대요. 오빠는 딱지가 없대요.”
“딱지가 귀한 보물이라서 그래. 다음에 오빠랑 놀러 오면 빌려줄게. 옆에 분이 오빠분이신가?”
우린이와 떠들던 상혁이는 그제야 우진이를 보았다. 제발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라.
“차우진 씨죠? 이제야 얼굴 한번 보네요. 우리 하나가 그렇게 잘생겼다고 노래를 해서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역시 우린이 오빠다운 미모시네요.”
시발, 김상혁. 우진이만 없었으면 주리를 틀어 버렸을 것이다.
“아,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차우진입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김상혁이라고 합니다. 강하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파트너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상혁이 놈 때문에 우진이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저놈은 왜 내 병문안에 와서 우진이한테 내가 쏟아 냈던 우진이 찬양을 들려주는 것인가.
우진이 콧대가 히말라야산맥 같고 눈썹은 명필가가 그어 놓은 한 획 같으며 길고 풍성한 속눈썹 사이에 담긴 눈동자는 겨울 호수 같다는 내 말에는 한 치의 거짓과 부끄럼도 없다.
‘하지만!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우진이한테 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우진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탄단 말이야. 쑥스러워서 나랑 눈도 못 마주치면 어떡해?!’
그런데 의외로 우진이는 민망해하는 기색이 없다. 자기가 잘생긴 거 알고 있나 봐.
김상혁 때문에 시끄러운 사이 상혁이가 들어와서 나갔던 화영이가 다시 노크를 하면서 들어왔다.
“하나! 너희 팀장님 오셨어.”
우진이가 이동하기 불편하니까 내가 팀장님 앞으로 나가려 했는데 그보다 빨리 팀장님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팀장님은 병실에 우진이랑 상혁이가 있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본론을 꺼내셨다.
“탐색 조원 강하나, 몸은 좀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다만 자네가 당한 사고는 공격 조원 오세인 에스퍼의 과실로 일어난 사고라 조장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자네에겐 소정의 위로금이 지급될 거야.”
다쳤다고 돈 준다니까 왠지 자해 공갈단이 된 기분이네. 그렇지만 내 잘못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감사하게 받아야지.
팀장님 말에 따르면 오세인도 시말서를 쓰고 있다고 했다.
오세인은 자연계 A급 에스퍼다. 방화가 특기라서 그런지 성격도 불같다. 걔는 평소에 남의 말을 잘 안 들어서 사고 칠 것 같긴 했다. 그 피해자가 내가 될 줄은 몰랐지만.
팀장님은 천유하 가이드를 내가 보호해 줘서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해 준 덕택에 추가 상여금도 나올 거라고 전해 주셨다.
이건 좀 기쁘다. 팀장님은 이번 임무로 당분간 토벌 임무가 없을 테니 푹 쉬고 대회 준비 잘하라고 응원해 주셨다.
응원을 끝으로 팀장님은 쿨하게 퇴장하시고 우진이가 내게 물었다.
“저…… 전부터 대회 얘길 듣긴 했는데 무슨 대회에 나가시나요?”
“협회에서 매년 에스퍼의 전투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대련 대회를 열거든요. 겨울에는 괴수의 활동이 줄어서 많은 에스퍼들이 참가해요.”
“우진 씨도 보러 오세요! 이놈한테 걸면 무조건 돈 땁니다. 용돈벌이가 쏠쏠해요.”
“전 에스퍼가 아닌데요.”
“괜찮아요. 대회 관람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에스퍼도 오지만 가이드, 민간인들도 다 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상혁이가 우진이한테 도박하라고 꼬신다.
‘우진이 센터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돈 없거든?’
그렇지만 우진이가 내 대련을 보러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설레기도 했다. 우진이가 도박을 하고 싶어 한다면 돈 빌려줄 생각도 있다. 이럴 때 쓰려고 돈 번 거지.
그러고 보니 나 스마트워치 박살 나서 새로 사야 한다. 에가협은 스마트워치는 처음 배급할 때만 공짜로 나누어 주고 그다음부터는 돈 받고 판다. 임무 연락 여기다가 하면서 완전 치사하다.
다음날 퇴원한 나는 스마트워치를 사기 위해 의료 센터를 나와 연구 센터로 갔다. 중앙 센터에서도 살 수는 있지만, 얘들은 좀 물건을 늦게 건네준다. 그렇지만 연구팀 사람을 알고 있으면 반대로 물건을 직접 보고 고를 수도 있지. 짬밥의 힘이란 이런 실생활의 편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연구팀에서 일하는 나예리한테 가서 스마트워치 재고를 살펴보고 구매했다. 협회에서 따로 제공하는 생체 인식 번호를 등록하니 기존에 쓰던 것과 바로 연동됐다.
‘다행히 앨범도 다 그대로네.’
희희낙락하며 새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으려니 나예리가 반갑지 않은 제안을 했다.
“너 아직 신체검사 안 받았지? 이제 하급 에스퍼들 다 받았다니까 너도 슬슬 가 봐. 넌 B급이니까 바로 검사받을 수 있을 거야.”
아, 잊고 있었는데 벌써 내 차례가 됐다니. 대련 대회 전에 받는 검사는 F급부터 순서대로 검사한다. 수가 제일 많고 검사도 비교적 단순한데다 대련 대회는 F급의 매칭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대련 대회는 종류와 급수에 맞춰 먼저 시작한다. F급 강화계, 자연계, 정신계, 특수계의 에스퍼끼리 토너먼트전을 벌이고 최종적으로 우승한 F급은 같은 계열의 E급 에스퍼와 겨룰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런 식으로 급수를 올리면서 토너먼트를 치르지만 안타깝게도 F급이 E급의 결승전에 올라가는 드라마틱한 일은 별로 안 일어난다.
아무튼 곧 대회 시작이라서 다들 검사받았구나. 나는 나예리의 손에 이끌려 검사실 앞에 도착했다. 시간 날 때 천천히 받겠다고 대답했더니 손목을 잡혀서 끌려왔다.
결국, 와 버렸다 검사실에. 나는 대기표를 뽑고 수십 명의 다른 에스퍼들과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다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운 게 나와 같은 마음이구나.’
약 15분의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되었다. 같은 계열의 같은 급수 사람들을 한 번에 검사하기 때문에 한 번에 10명 정도 검사실에 입장한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검사실에 들어갔다.
시작은 간단하게 피를 뽑았다. 나는 이능 때문에 뽑지 못해서 구경만 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소변, 대변 검사가 끝난 뒤, 우리는 본격적인 신체검사를 시작하게 됐다. 이런 기본적인 건강검사는 연구진의 관심사가 아니다.
먼저 가볍게 체력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러닝 머신에 올라서 5시간 동안 전속력으로 뛰게 했다. 그 뒤엔 물속에서 숨을 15분 동안 참게 하더니 심폐지구력 측정이 끝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줬다. 그거 하나 끝냈을 뿐인데 벌써 해가 졌다.
변태 같은 연구진들은 역시 B급 신체 강화 계열은 측정하는 재미가 있다며 좋아했다. 유연성 검사처럼 쉬운 체력 검사를 끝내고 이 변태들은 우릴 영하 50도의 냉장고에 집어넣었다가 영상 70도에 집어넣었다 꺼내 주곤 열심히 끄적였다.
그다음엔 순발력 테스트를 하겠다며 잘 잡아 보라고 하고 사방에서 고무탄을 쏴 댔다. 신체 강화 에스퍼들은 웬만해선 이 정도는 맞아도 다치지는 않지만 맞으면 아프다. 최선을 다해서 탄환을 잡고 나니 검사가 끝났다고 했다.
그냥 대회 참가를 위한 검사라 간단한 편이다. 검사를 받느라 저녁도 걸렀는데 밤 11시네. 진이 다 빠진 나는 그냥 숙소로 가서 잠이나 잤다.
***
일어나니 오후 2시였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늦잠을 잔 게 몇 년 만이지? 연구 센터에서 실험당할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
오래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띵했다. 연속으로 몸을 혹사해서 그런가 엄청 피곤했다.
일어나기 싫어서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잠깐 눈만 감았다 떴는데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와 이렇게 잠으로 하루를 다 날려 보낼 수도 있구나.’
그렇지만 아직도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계속 잘까 생각하고 있는데 협탁에 둔 스마트워치의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진동이 왔다. 협탁에서 울리니까 진동음이 엄청 컸다.
나는 그대로 누운 채로 시계를 집어 들었다. 상혁이 전화네. 나는 시계를 머리맡에 놓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어- 상혁이냐?”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지금 일어났어. 왜 전화했는데?”
상혁이는 오늘 아침에 검사받기 시작해서 지금 끝났다고 했다. 우린 이렇게 하루 종일 사람을 괴롭혀 놓고 밥도 안 주는 연구 센터의 극악무도함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그러다 이야기가 내 보너스로 튀었다.
“하나야, 그리고 말이야. 이렇게 힘든 일상 속에서 사람이 좋은 일이 있으면 베풀 줄도 알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보너스 두둑하게 받은 거로 밥 좀 사라.”
"……."
결국, 이게 목적이었나. 거기에 더불어 애들이랑 같이 먹자고 한다. 하긴 모여서 밥을 먹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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