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에스퍼와 가이드 (1)
며칠 지나고 우진이는 괴수 때문에 다쳤던 부위가 모두 회복되어서 전처럼 아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근육이 많이 빠져서 거동이 힘들었기 때문에 재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비록 협회원 전용 치유계 에스퍼의 치료를 받고도 아직도 입원 중이었지만.
그래도 그 치료 덕분에 우진이의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아파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우진이는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우린이를 봐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우린이의 우울증이 많이 호전되었다. 아직도 분리 불안이 심해서 우진이 혼자 화장실도 못 간다고 하지만 이제 우린이는 다시 웃는다고 했다.
나는 대련 대회를 준비하는 도중에 종종 들러서 잡아 주거나 받쳐 주는 등 우진이의 재활 훈련을 도왔다.
대련 대회가 2주 정도 남아서 에가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참가하는 모든 에스퍼의 신체검사와 이능 검사를 하고 부상이나 사고를 예상하고 방지하기 위해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련 대회는 다들 은근히 기대하는 에가협의 행사였다. 참가자들은 본인의 실력을 만인에게 보여 주기 위해 들떴으며 연구원들은 이능 전투의 임상 테스트와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기대했다.
게다가 대련 대회는 에가협의 대규모 유흥 행사이기도 했다. 최고의 구경거리는 싸움 구경이라고 하는 것처럼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협회원들의 돈놀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원래 에가협은 협회원들의 도박을 금지했다. 심신을 망가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다운타운에도 도박장은 없다. 소소하게 돈 걸고 노는 건 막지 않지만.
그런데 에가협은 대련 대회의 참가자들에게 돈을 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이른바 대련 대회란 에가협에서 허가한 유일하게 합법적인 도박장인 것이다. 그래서 대련 대회 참가자들은 이런 말들을 듣는다.
“야, 강하나. 나 너한테 내 재산 몰빵했다. 올해 꼭 우승해라.”
“너 작년처럼 출동 명령 떨어졌다고 결승전 빠지지 마라. 올해는 대타 세우고 우승해. 알았지?”
아직 연구 센터에서 검사도 안 받았는데 벌써부터 응원이 쏟아진다.
‘허허, 이거 참. 기대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도박에 목숨 걸지 말라고 해 줘야 할지.’
그냥 웃어넘기고 점심을 먹는데 옆에 있던 상혁이가 쓸데없는 질투를 했다.
“왜 나한테는 걸었다는 사람이 없냐? 혹시 알아? 내가 올해의 우승자가 돼서 새로운 루키가 될지. 다들 미래의 예비 우승 후보에게 돈 좀 걸어 봐. 내가 부자 만들어 줄게.”
“작년에 의리로 너한테 걸었다가 개털 돼서 다신 안 걸려고. 배당금 적은 데는 이유가 있더라.”
“친구의 가능성을 믿어 봐.”
“김상혁의 승률 37%를 믿겠습니다.”
37%의 가능성을 믿고 걸었다가 돈만 날린 승환이는 이제 63%의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작년에 얻게 된 값진 깨달음을 설파하던 행정부 승환이는 나에게 신규 회원 교육 수당이 들어갔으니 확인해 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당장에 스마트워치를 켜서 확인해 보았다. 오, 들어왔다. 나의 꿀 같은 보너스 임금.
“신규 회원 교육? 강하나 네가 신규 회원 교육을 할 일이 있어? 신규 회원 누군데? 설마 그 차우진이냐?”
김상혁 이놈은 왜 이럴 때만 똑똑하지? 하지만 승환이는 우진이 얘기는 안 궁금한지 캐묻지 않고 상혁이에게도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상혁이의 담당 가이드인 고정호 씨가 담당 해지 신청을 하려 했으나 상혁이보다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가 없어 보류했다고 했다.
“잘됐네, 상혁이. 고정호 씨에게 가서 싹싹 빌고 감사하다고 충성이나 맹세해라.”
“……”
기쁜 소식의 전령 승환이는 복사할 게 있다면서 먼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나도 점심시간이 남은 김에 우진이나 보고 와야겠다.
우진이는 아직 식사 중이었다. 미음도 소화를 못 하고 힘들게 먹더니 이젠 닭죽을 먹고 있네.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병실로 들어가서 우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우진 씨. 훈련 전에 잠깐 보러 온 건데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봐요.”
“아, 우린이 밥 먹이다가 식사가 늦어져서요.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우린이 봐 드릴게요. 편하게 식사하세요.”
자주 얼굴을 비춰서 그런지 이제 우진이는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나는 우진이 옆구리에 껌딱지처럼 붙은 우린이를 떼어 냈다. 우린이는 순순히 떨어졌다.
요즘은 오빠 병실에서 먹고 자면서 지내기 때문인지 울고불고 떼쓰는 게 줄었다.
나는 우린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뭐 하고 놀고 싶은지 물어봤다.
“노래 불러 줘. 나랑 같이 엘사 놀이해요.”
인간 자이로드롭 같은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우린이는 뮤지컬을 시켰다. 이 남매는 언제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걸 해 보도록 해 준다.
‘하하… 영화를 괜히 보여 준 걸까?’
우린이는 우진이의 환자복 상의를 몸에 둘러서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내 노래에 맞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우린이에게 노래 좀 잘 부르라는 타박을 들으며 <렛잇고>를 3번 불렀다.
나는 그사이에 밥을 다 먹은 우진이의 걸음마 연습을 도와주고 오후 훈련을 받기 위해 나왔다.
훈련소로 가는 도중에 화영이를 마주쳤다. 화영이는 대련 대회 준비 때문인지 피곤해 보였다. 하긴 준비 기간에 연구 센터만큼 의료 센터도 일이 많다고 들었다. 나는 화영이가 걱정되어서 체력 회복 에스퍼한테 도움을 받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됐어. 이 정도 가지고. 대회 때문에 치료 계열 이능이랑 가이딩은 최대한 힘을 비축해야 하거든.”
“아, 그렇구나.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우진이 근력이랑 체력 회복 안 시켜준 것도 대회 때문이야?”
화영이는 체력 회복을 해 주는 에스퍼가 아니지만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이능은 치유계 이능 중에 흔한 능력이었다.
그래서 화영이가 이능으로 우진이를 치료해 줄 때 좀 의아했던 부분이었다. 다른 에스퍼 부르면 금방 치료될 텐데…… 그럼 우진이도 재활로 힘들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뭐, 그런 것도 있긴 한데. 에스퍼를 무서워하는 가이드잖아. 그냥 입원 기간 동안 푹 쉬게 둬. 원래 가이드들은 치료 빨리 끝내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야? 가이드는 원래 협회 1순위 보호 대상인데 치료를 천천히 한다니?”
“협회의 뜻이 아니고 가이드의 의사를 반영해서 그러는 거야. 치료 빨리 끝나서 복귀하는 거 좋아하는 가이드는 아무도 없을걸? 김상혁 담당 가이드 고정호 씨도 아직 퇴원 안 했어.”
엥? 뭐야 대체? 최근 들은 것 중에 가장 이상한 얘기다. 왜 몸이 빨리 낫는 걸 싫어해?
화영이는 어리둥절한 나를 보더니 에스퍼니까 가이드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잘 알고 있으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
대괴수 섬멸팀은 대회 기간 일어날 괴수 습격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괴수 서식지를 최대한 많이 토벌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수색 현장에 나가있다. 우리 팀은 그동안 서식지로 추정되는 곳들을 깡그리 뒤져 보고 있다.
점액질의 괴수들이 출몰한다는 하수 처리 시설이었던 곳부터 쓰레기 매립지들, 발전소였던 장소들을 싹 다 돌았다. 괴수들이 서식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괴수들이 있긴 했지만 많지는 않아서 토벌 작업은 금방 끝났다.
‘토벌 뺑뺑이가 17시간 만에 다 끝났으니 정말 빨리 끝나긴 했지.’
우린 마지막으로 초록색 피부를 가진 식인 난쟁이들이 땅굴을 파고 산다고 추정되는 산으로 파견 나갔다.
장소에 도착하니, 난쟁이의 배설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 덕에 땅굴을 쉽게 찾아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배설물이 많다는 건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단 우리는 위치를 확인했으니 재정비를 하고 토벌 작업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텐트를 쳐서 임시 숙소를 만들고 날이 밝으면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비전투원들은 안에서 푹 자게 두고 나를 포함한 전투원들은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
나는 별로 잠이 오지 않고 이게 이번 임무의 마지막 토벌이기도 해서 자진해서 보초를 좀 더 길게 섰다.
반달이 뜬 구름 낀 밤하늘이 으스스한 가을 숲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어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래서 외국에는 가을밤에 귀신이 돌아온다는 명절들이 있던 걸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누군가 텐트에서 나왔다.
가이드 천유하 씨다. 화장실 가려고 나오셨다고 했다. 나는 같이 보초를 서던 정원이에게 일을 맡기고 천유하 씨를 호위했다. 천유하 씨는 텐트 바로 근처는 부끄러웠던지 좀 숲 깊이 들어갔다. 나는 프라이버시를 위해 천유하 씨가 들어간 풀숲 근처에서 뒤를 돌고 기다렸다.
그런데 뒤에서 유하 씨의 억눌린 비명 소리가 짧게 들렸다.
“천유하 씨? 괜찮으세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재빨리 풀숲으로 들어가 유하 씨를 찾았다.
하지만 유하 씨는 없었다.
‘난쟁이에게 납치당한 건가?’
나는 스마트워치의 플래시를 켜 현장을 살펴봤다. 풀이 짓이겨져 눌린 발자국이 여럿 보였다.
바닥에 뭉개지고 쓸린 자국이 있는 걸 보니 놈들이 유하 씨를 끌고 간 것 같다.
나는 정원이에게 연락을 넣고 유하 씨의 스마트워치를 추적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동 중이다. 나는 풀숲을 헤치며 유하 씨의 신호를 쫓았다.
그러나 갑자기 신호가 끊기고 말았다.
놈들이 땅굴로 들어가 버렸나 보다. 스마트워치는 인공위성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기 때문에 지하에서는 통신이 어려웠다.
그래도 근처에 땅굴 입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방에 플래시를 비춰 보며 부리나케 입구를 찾았다. 그리고 덤불 근처에서 짐승의 굴 같은 걸 발견했다. 놈들의 통로일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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