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 마이 히어로-8화 (8/81)

8. 차우진 (7)

“……?”

누구인지 확인하려 바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또 김상혁이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니 얼른 내쫓아야지.

“강또, 너 뭐 하냐? 봉사 활동해?”

“이상한 얘기할 거면 가라. 나 바쁘다.”

“얜 또 누구야?”

“우진이 동생이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나랑 있어.”

“이야~ 세상이 안 망했으면 키즈 모델 했겠네. 너의 우진이 하나도 안 궁금했는데 쟤 보니까 한번 보고 싶다.”

“헛소리 말고 갈 길 가. 애가 너 낯설어 하는 거 안 보여?”

“아, 너 보니까 뭐 물어볼 거 생각나서 왔어. 긴가민가해서 말이야. 차우진 씨 미등록 가이드지?”

왠지 불안해서 빨리 보내 버리려고 했는데 상혁이가 급소를 쳐 버렸다. 그렇지만 아직 만회할 수 있어……. 쟤도 지금 술김에 들었던 거라 긴가민가하니까.

“아, 아닌데에-? 그건 또 뭔 소리야아? 너, 너 혼자 술 퍼먹다가 꿈꾼 거 아니냐?”

“역시 맞구나. 중앙 가서 등록해 둘게.”

하, 씨…… 이게 아닌데……. 상혁이 놈은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 밖을 나갔다.

‘김상혁이 저렇게까지 기억력이 좋았나?’

실행력 하나는 끝내 주는 편인 건 알았어도 술 먹고 뻗기 직전에 한 말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우진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게 생겼다. 지금도 에스퍼라면 다 거부하는데 협회에 들어가게 되면……

‘젠장. 그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당장 막아야지.’

난 바로 상혁이를 따라가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우린이가 내 손을 잡고 울먹이는 바람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대로 나가 버리면 이 어린애 혼자만 남잖아. 애를 달래러 나온 건데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쩔 수 없이 나는 상혁이를 쫓아가는 걸 포기해야 했다.

‘어차피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마인드 컨트롤 하자. 좀 이른 것 같지만 이렇게 될 거였으니까.’

어차피 화영이네 의료팀이 알고 있는 이상, 협회에 소속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을 다스린 나는 우린이 기분 풀어 주는 데나 집중하기로 했다. 신나게 놀아 주면 풀리겠지.

우린이랑 오락실 가서 두더지 잡기도 하고 인형도 뽑고 하며 재미나게 놀았다. 액세서리 가게에 가서 우린이가 갖고 싶다는 왕 리본이 달린 머리띠도 사 줬다. 저녁으로 피자까지 먹이고 나니 우린이도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다.

우린이 달래기에 성공해서 뿌듯하다. 이젠 헤어질 시간이다. 나는 우린이를 쉼터에 데려다주었다.

“재밌었지, 우린아? 다음에 또 놀고 이젠 안녕 하자~”

“…….”

나는 쉼터 현관문을 열고 우린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오늘은 중요한 무언가를 잃은 것 같았지만 적어도 우린이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한 것 같아 뿌듯했다. 재밌게 놀다 왔으니 기분 좋게 이만 작별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과 달리, 현관에 한 발짝 들어선 우린이가 또 빼액 울었다.

우린이가 말하길, 자기는 쉼터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쉼터 관계자들도 모두 뛰쳐나왔다. 그래도 우린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쉼터 사람들을 때리면서 싫다고 엉엉 울었다.

‘어쩌지? 의료 센터 가서 재워야 하나? 의료 센터에서도 크게 울면 못 데려가는데…….’

한참을 고민한 나는 결국 우린이를 내 숙소에 데려갔다.

***

에가협 소속 에스퍼의 숙소는 급수에 따라 세 군데로 나뉜다.

하위급수인 F, E, D급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2~3인이 같은 방을 사용한다. 그리고 상위 급수인 C, B, A급 숙소는 그들과 다른 건물을 사용하며 독방을 쓴다.

간혹 하급 에스퍼들이 불만을 토로하는데, 독방을 쓰게 해 주는 건 급수로 차별하는 게 아니다. 급수가 높을수록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에가협은 급수에 따라서 관리하는 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부서 담당 건물에 사람을 몰아넣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제일 높은 급수인 S급은 중앙연구 센터에서 직접 관리한다. 이들은 사고가 많고 연구할 거리도 많은 아주 극소수의 인원이라, 숙소 건물이 따로 없고 이능 연구소 건물에 붙어 있는 숙소를 쓴다.

나는 내가 머무는 상급 에스퍼 숙소 건물에 우린이를 데려갔다. 우린이는 쉼터에 안 들어가게 된 순간부터 울지 않았고 아까 내가 뽑아 준 인형만 꼭 끌어안았다. 나는 뚱해 있는 우린이의 손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내가 B급 에스퍼로 판정받아 배치된 이 방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마다 살풍경하다고들 했다. 나는 방을 꾸미는 취미가 없고 그냥 배급받은 것만 뒀을 뿐인데.

내 방은 그냥 아무도 배치되지 않은 방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잠잘 때만 들어오니 딱히 뭘 더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우린이를 데려오고 처음으로 조금 후회되었다. 막 멋들어지게 꾸미진 못해도 최소한 사람 사는 느낌은 나게 물건 몇 개 둘걸…….

내 방은 협회 숙소에 있는 침대, 소파, 이불, 수건 몇 개와 유니폼 여벌 정도밖에 없었다.

‘딱 잠만 자는 곳이다 보니 물건이 너무 없네…….’

하지만 다행히도 아포칼립스 시대만 살아온 어린이는 이런 각박한 인테리어를 별로 신경 안 쓰는 듯했다. 그렇지만 놀잇감은 필요했나 보다.

씻고 난 우린이는 동화책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내 방엔 그런 귀여운 소품 없는데……’

나한테 있는 거라곤 베개랑 담요 하나, 화장지, 수건, 여벌 옷뿐이다. 이걸로 애가 뭘 하고 놀 수 있겠어. 그래서 나는 우린이의 심심함을 해결하기 위해 상혁이가 사는 옆방으로 처들어갔다.

상혁이가 없으면 어떡하나 살짝 걱정했으나 상혁이는 방에 있었다.

양치를 하고 있던 상혁이는 내가 들이닥치자 얼떨떨해하고, 내가 옆구리에 끼고 온 우린이를 보자 눈을 더 크게 떴다. 상혁이는 우릴 보고 뭐라고 웅얼거리다가 입에서 치약 거품을 뚝뚝 흘렸다.

"아, 더럽게……. 양치나 다 하고 오세요."

상혁이가 양치를 마저 하러 화장실에 갈 동안 우린 상혁이의 방에 자리 잡았다.

상혁이 방은 내 방과는 다르게 좀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창가에 선인장도 키우고 소파엔 쿠션도 있고 이불도 배급품이 아니고 알록달록한 걸 쓴다. 테이블에는 커피포트도 있다. 난 상혁이네 테이블이랑 협탁을 둘러보며 놀잇감을 찾았다.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TV를 올려 둔 낮은 선반 근처의 잡동사니 중에서 내가 찾는 걸 찾았다.

파랗고 노랗고 빨갛고 사이즈도 여러 가지인 플라스틱 캐릭터 딱지다. 상혁이가 임무 나갔다가 찾아낸 문명의 잔재다.

상혁이가 이걸 찾아온 날, 우린 문명 시대의 놀이를 추억하면서 신나게 딱지치기를 했다. 문명 종결 시대에 태어난 어린이에게 옛 문화를 전수해 줄 것이다.

아기자기한 딱지들을 꺼내서 우린이에게 보여 주었다. 우린이는 알록달록하고 살짝 반짝이도 들어가 있으며 반투명한 캐릭터 딱지를 보고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하지만 우린이는 전등에 딱지를 비춰 보며 즐거워하다가 상혁이와 내가 딱지 치는 법을 알려 주니 흥미를 잃었다. 여섯 살의 팔 힘으로는 딱지를 던져서 다른 딱지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던 것이다.

상혁이와 내가 딱지를 치는 동안 우린이는 상혁이 침대에서 유니콘이 그려진 쿠션을 찾아내 내가 뽑아 준 토끼 인형과 같이 소꿉놀이를 했다.

‘아니 저런 쿠션이 있었단 말이야? 보기보다 취향이 깜찍하시네요, 김상혁 씨.’

상혁이와의 딱지 대결에서는 내가 이겼다.

그렇지만 승리의 전율은 짧게 끝내야 했다. 우린이가 여기가 재미없다고 했으니까. 그래, 재미가 없으면 딴 데 가야지.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번뜩이는 재치로 나랑 우린이를 다 반겨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A급 치유계 에스퍼 이화영! 얘라면 우린이도 잘 알고 우릴 문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린이랑 A급들이 머무는 층으로 이동했다. 오늘 오프인가? 오늘은 화영이가 센터에 있는 날이 아니길 빌면서 화영이 방으로 갔다.

똑똑, 똑또독, 똑

우린이랑 아까 같이 봤던 만화영화에 나온 대로 노크를 하니 화영이가 나왔다.

‘다행이다. 오늘은 의료 센터에서 밤새는 날 아니구나.’

화영이는 우린이를 안고 온 날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이 시간에 나는 수련한답시고 숙소 들어오지도 않는데 애를 안고 놀러 다니니 다들 신기한가 보다. 그래도 화영이는 반갑게 우릴 맞이해 줬다.

화영이는 차까지 끓여 주며 우릴 맞이해 줬다. 다들 커피포트는 기본으로 갖고 있구나. 나도 하나 살까? 우린이는 내 옆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홀짝 마셨다. 양치 또 시켜야겠네.

화영이의 방은 상혁이의 방보다 업그레이드된 사람 냄새를 풍겼다. 식탁보도 있고 카펫, 꽃병에 축음기도 있네? 어디서 난 거야, 저런 유물은? 너도 나만큼이나 방에 잘 안 들어오지 않아? 되게 잘 꾸미고 산다, 너.

우린이는 코코아를 다 마시고 한 손에는 토끼 인형, 다른 손에는 상혁이한테서 뺏어 온 유니콘 쿠션을 들고 화영이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화영이 침대에서 예뻐 보이는 쿠션이랑 베개를 전부 꺼내서 인형 놀이를 했다.

‘아, 진짜 귀엽다. 어린애들은 원래 다 이런가? 우진이는 이런 걸 맨날 봤으려나?’’

우린이가 혼자서 잘 노는 것 같길래 나는 화영이랑 차 마시면서 대화나 나눴다.

화영이가 말해 주길 우진이는 조금 전에 신규 가이드로 등록되었다고 했다.

‘하하하. 김상혁, 이 빠르고 확실한 자식 같으니. 행정부 놈들도 신규 협회원 등록은 엄청 빠르다니까.’

우진이가 심신이 불안정한 환자다 보니 신규 가이드에게 통보하는 역할은 화영이가 맡았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회진 돌고 할 예정이라고 해서 나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이왕 땡땡이치는 거 오전 훈련까지 싹 빠져서 24시간을 채워 보자.

화영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우린이를 보니 화영이 침대에서 고꾸라져 자고 있었다. 우린이를 데리고 이만 나가려 하니까 화영이가 그냥 여기서 재우겠다고 해서 난 혼자 내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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