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차우진 (5)
“으아아아아악-!”
우리는 지면을 향해 하염없이 곤두박질쳤다. 추락으로 인한 강풍을 맞으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떨어지면 나만 무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적어도 다칠 일이 없는 나라도 먼저 지면에 닿아야 할 텐데.’
일단 최대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내가 바닥에 깔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소지품에서 로프를 꺼내 애들에게 던졌다.
“이거라도 잡아!”
일단 로프를 잡으면 당겨서 한곳에 뭉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뭉쳐 있는 애들을 내가 밑에서 충격을 흡수해 받아 주면 될 거야!
레아 씨와 김준서는 내가 던진 로프를 잡았다.
그런데 주하는 기절해서 로프를 못 잡잖아? 어떡하지? 일단 두 사람을 올려 내 위로 자리 잡는 건 성공했으나 주하가 남았다.
우리는 애타게 주하를 부르며 잡으려고 애썼지만 이제 지면까지는 30센티도 안 남았다. 이렇게 팀원을 잃는 건가? 좌절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라?’
이상하게도 추락으로 느껴질 묵직한 충격이 없었다. 살짝 눈을 떠보니 가까스로 의식을 찾은 주하가 염동력으로 우릴 붙들어 줬다.
하지만 주하가 다시 의식을 잃는 바람에 이능이 끊겼다. 그래도 땅에 닿기 직전이었기에 다치지 않고 무사히 땅에 닿을 수 있었다.
“휴, 죽는 줄 알았네. 다들 다친 데 없지?”
“착지할 때 자세가 잘못돼서 손목 좀 삐끗한 거 말고는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팀원들이 무사한지 확인한 나는 주하를 업고 이동했다. 스마트워치로 위치를 확인하니 우리는 목적지에서 12km 떨어진 숲속에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괴수의 서식지다. 하지만 서식지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습격당한 걸 보면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는 괴수인 듯했다.
그리고 이런 울창한 숲에서 멍때리고 있다가는 괴수 벌떼만 만나는 게 아니라 숲에 사는 다른 괴수들까지 마주칠 수 있다.
우리는 괴수를 피해 숨돌릴 곳을 찾아 부지런히 걸었다. 경사진 길을 올라 한참을 걷다 보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산지기 쉼터 1.5km.]
‘여긴 국립 공원 같은 산이었나 보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7년쯤 돼서 그런지 전혀 몰랐다. 이 난리 통에도 읽을 수 있을 만큼 멀쩡한 거 보면 표지판을 튼튼하게 잘 만들었나 보다.
나는 곧 쉴 수 있다며 동료들을 격려하고 앞장섰다. 표지판을 따라 도착한 쉼터는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 같은 곳이었다. 조금 무너지고 문짝도 없고 창문도 다 깨졌지만 지붕이 있어서 잠시 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주하를 잠시 준서에게 맡기고 내부에 괴수가 없는지 확인했다.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지만 혹시나 포자류 괴수나 개미같이 작고 군집을 이루는 괴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탐지기로 내부를 한번 훑었더니 다행히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안전하단 확신이 들자, 나는 동료들과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몸을 뉠 자리를 만든 우리는 침낭을 깔아 주하를 눕히고는 불을 피웠다. 주하의 상태를 살펴보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냥 이능 과다 출력으로 뇌에 과부하가 온 듯했다.
그나마 안심하려는 찰나에 주하가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주변도 같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안 돼! 주하야, 정신차려!”
주하가 여기서 발작하면 다 전멸이다. 이능 과다 출력으로 뇌압이 오른 에스퍼는 발작하면서 이능을 휘두른다. 그리고 통제가 안 되는 S급은 특히 더 위험했다.
“윽… 미안해. 조금만 참아.”
퍽!
나는 임시방편으로 주하의 관자놀이를 세게 내려쳐서 주하를 기절시켰다. 이건 그냥 시간을 미루는 것일 뿐이라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주하는 두통으로 곧 다시 깨어날 것이다.
“서레아 씨! 가이딩을 부탁드립니다!”
“아, 네! 당장 시작할게요.”
가이드 서레아는 자신의 옷을 풀어 헤치고 주하의 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주하의 손을 맞잡은 다음 몸을 겹쳤다.
“아…”
가이딩은 3단계로 나뉘며 단계가 올라갈수록 효과가 향상된다. 1단계는 가이드의 손을 에스퍼의 신체에 접촉시키는 가이딩이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급수가 같고 매칭률이 100퍼센트일 때 15분 동안 접촉하면 가이딩이 완료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매칭률이 100퍼센트인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되고, 대부분 50퍼센트 정도에 담당으로 묶어 주니까 한 30분 걸린다고 보면 된다.
2단계는 신체의 50퍼센트를 접촉하고 타액을 섭취하는 단계다. 가이딩의 효과가 30% 이상 상승하고 이능력도 상승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는데 별로 안 해 봐서 잘 모르겠다.
3단계는 교접이다. 지금처럼 뇌압이 올라 위급한 상황을 바로 가라앉힌다고 한다. 일시적인 이능 상승도 엄청나다는데, 나는 앞으로는 영원히 안 할 계획이라서 딱히 관심이 없다. 내가 이능 출력을 빡세게 관리하는 이유가 3단계 가이딩을 피하려고 그러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긴급 상황인 지금, 서레아 씨는 2단계 이상의 가이딩을 하려고 한다.
나는 이불이나 침낭 등으로 대충 가림막을 만들었다. 가능한 빨리 자리를 피해 주려는데 김준서 이 자식이 남의 가이딩을 구경하고 있다.
난 글러 먹은 놈을 멱살 잡아 쉼터 밖으로 끌어냈다.
“야, 이 경우 없는 놈아. 남의 가이딩을 왜 훔쳐보냐? 변태 새끼처럼.”
“훔쳐보다뇨! 그 가이드가 우리 눈앞에서 한 거잖아요! 보라고 광고하는 수준 아닌가요?”
“이런 미친놈이…… 긴급 가이딩이었잖아. 암만 현장 경력이 없다 해도 너 연구팀에 있었다며? 3단계 가이딩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매너가 없냐?!”
의료 조원 김준서는 그동안 연구 센터에서 일하다가 현장경험을 위해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이다.
연구팀이면 의료팀보다 더 다양한 가이딩 사례를 많이 봤을 텐데, 얘 왜 이러냐?
의료팀은 에스퍼를 살리기 위한 가이딩 사례를 주로 접하겠지만 연구팀은 가이딩 방법 효과 그런 거 다 뜯어 보려고 허구한 날 시키는 놈들이다. 아무튼 가이딩 매너는 알 텐데.
“응급 가이딩 여자끼리만 하는 건 처음 봤어요. 선배는 많이 봤나요? 여기 오래 있으면 많이 보나, 그런 거? 좀 쩐다.”
‘……아니, 뭐지, 이 쓰레기 새끼는?’
아직 에가협 가이딩 윤리 강령이 없어서 그런가, 가이딩에 집착하는 미친 애들이 많기는 했다.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상황에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경우 없는 팀원이랑 있게 되다니 살짝 불안하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라 저런 놈인 게 드러나는 거겠지.
‘일단 네 인사 평가는 망한 줄 알아라. 우리 팀에 다 소문낼 거니까. 대체 같은 팀원을 뭘로 보는 거야?’
나는 미친놈한테서 팀원을 지키기 위해 미친놈을 데리고 쉼터 밖에서 보초를 섰다. 날이 밝고 우리는 스마트워치 GPS로 우릴 찾아낸 지원팀과 합류했다.
어젯밤의 가이딩으로 주하와 레아 씨는 무사했고, 우리는 산 근처에서 괴수의 벌집을 찾아내어 깡그리 태워 버렸다. 끝내 괴수 말벌을 모두 섬멸하고 우리 팀은 귀환했다.
귀환한 나는 팀장에게 김준서에 대해 따로 보고를 했다. 팀장님도 상당히 불쾌해하셨으니, 곧 우리 팀에서 김준서를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
“한동안 고생했으니 오늘은 좀 푹 쉬어야지.”
나는 다운타운으로 내려가 맥주병에 빨대를 꽂고 마시며 거리를 걸었다.
이 평화로운 문명의 냄새. 보기만 해도 힐링된다.
맨날 에가협 센터, 다 부서진 건물 잔해, 괴수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풍경만 보다가 이런 번화가를 걸으니 너무 좋았다.
한가로움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걷다 보니 꽃집 앞에서 상혁이를 만났다.
‘얘가 왜 여기 있지?’
키 크고 우락부락한 스타일의 상혁이는 생긴 대로 꽃에 관심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야 상혁아, 왜 꽃을 고르고 있어? 너 연애하냐?”
“연애는 무슨. 병문안 선물 고르는 거거든?”
“누구 병문안인데? 너 설마 나 없는 사이에 사람 쳤어?”
“……내 가이드 고정호 씨 만나러 가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상혁이는 담당 가이드가 있었다. 나는 안 쓰지만.
‘난 담당 가이드 그거 좀 기분 나쁘더라고. 에가협이 짝지어 준 섹파 같고…….’
상혁이가 대답을 얼버무리는 걸 보니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긴 한가 보다.
나는 상혁이에게 병문안 선물이니 주스 같은 건 어떠냐고 물어봤고, 상혁이도 괜찮은 것 같으니 한 상자 사 가야겠다고 했다.
‘나도 우진이 줄 거로 사야지.’
우진이는 내장이 곤죽이 되는 바람에 유동식도 잘 못 먹었지만, 지금은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못 먹으면 우린이 먹이지 뭐.
상혁이랑 나는 주스를 사고 헤어졌다. 선물 산 김에 우진이나 보러 가야겠다.
좀 늦은 시간이라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진이는 깨어 있었다. 나는 우진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병실로 들어갔다.
“우린이도 여기 있었구나.”
우린이는 보호자 침대 위에 엎드려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검은 선을 뭔가 마구잡이로 그어 놨는데 뭔지 물어보니 자기 오빠라고 한다.
“그렇구나. 우진이구나. 왼쪽에 점까지 찍어 놓은 거 보니 완전 똑같네.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야.”
우린이의 그림을 감상한 나는 들고 있던 주스 상자를 선물이라면서 내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자꾸 받기만 해서 면목이 없네요.”
“에이,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사 오는 건데. 드실 수는 있겠어요?”
“아마, 조금은…….”
나는 손에 집히는 토마토주스를 따서 3분의 1 정도를 컵에 따라 우진이에게 건네주었다.
내친김에 우린이에게도 뭐 마실지 물어봤다. 우린이는 딸기주스가 좋다고 했다.
“미안, 그건 없어. 대신 오렌지주스 마실래?”
착한 우린이는 그것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상자에서 오렌지주스를 골라, 우린이에게 건넸다. 우린이가 손을 뻗어 주스를 잡자, 우진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우린,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맙습니다.”
우린이는 우진이의 지도에 따라 감사 인사를 하고 주스를 건네받았다. 뚜껑을 못 따서 오빠한테 따 달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따 줬다.
‘너네 오빠도 이거 못 따, 우린아. 밥숟갈도 못 드는 너희 오빠가 어떻게 주스 뚜껑을 따겠니.’
그래도 우진이는 며칠 못 본 동안에 안색은 좀 좋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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