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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101)화 (101/101)

에필로그.

호원이 깨어나고도 열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삼월도에 머물렀다.

호원의 몸이 생각보다 쇠약해져 있기도 했고, 무휼이라고 당장 장시간의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청의 도움으로 가까운 도시의 병원에 다녀온 덕에 무휼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젊어서 그런 건지, 원래 운동을 하던 몸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무휼은 일주일 만에 심 씨 할아버지를 따라나서 밭일을 도울 만큼 회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심 씨 할아버지의 집에서 호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호원은 기력이 많이 떨어진 건지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일어나질 못하는가 하면, 오후에도 꾸벅꾸벅 졸다가 해가 질 즈음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다행히 식욕도 있어서, 무휼이 없는 솜씨로 끙끙거리며 만든 미역국이며 볶음밥, 살짝 탄 고등어 같은 것들을 맛있게도 먹어주었다.

한 번은 마루에 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댄 호원이 조심스럽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여명훈은… 어떻게 됐어?”

마당 한쪽 개수대에서 갓 뽑은 대파를 씻던 무휼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고는 분홍색 바가지에 대파를 툭 올려놓았다.

여명훈이 여서진의 본명이라는 건 호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호원이 깨어난 날, 그는 자신과 여명훈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여명훈이 여서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때의 일부터, 여명훈의 어머니가 찾아와 난리가 났던 일. 그리고 호원의 허벅지에 있는 상처까지.

호원에게 상해를 입힌 뒤, 여명훈은 결국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호원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섬에 와 있었다는 듯했다.

사태가 진정되고 여명훈이 무사히 병원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호원은 다시 바 ‘3월’의 문을 열 수 있었다.

호원의 표정은 복잡했다. 무휼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 같기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무휼은 잠시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해주었다.

“살아 있어요.”

그 말에 호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혼란스러움과 불안감을 담아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무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안심해도 괜찮아요.”

무휼은 물기가 묻은 손을 툭툭 털고는 호원에게 다가가 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젠 형이 날 지킬 필요가 없어.”

내가 지킬게. 무휼이 호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호원은 ‘어린 게 허세는.’ 하고 중얼거렸지만 얌전히 무휼에게 몸을 맡겼다. 뜨거운 체온이 녹아들 듯 서로에게 전해졌다.

그날 이후로, 호원은 여명훈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무휼도 딱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서 여명훈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시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두 사람이 섬을 떠나기로 한 전날 밤이었다. 물을 먹어 망가진 호원의 휴대폰을 새로 개통한 뒤 연락을 넣자마자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무휼이 대략적인 사정은 설명해 둔 뒤라, 호원이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호원은 그저 미안한 마음으로 곧 올라가겠다고 말했고 시영은 딱 한마디 했다.

[올라오기만 해봐.]

서늘하리만치 차분한 그 말에 오히려 식은땀이 났다. 호원은 진지하게 섬에 좀 더 남아 있을까 생각했고, 무휼은 시영답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너는 왜 화를 안 내?”

시영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생각이 미친 듯, 호원이 무휼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휼은 낄낄거리다 배가 욱신거렸는지 붕대 감긴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웃음기 어린 잘생긴 얼굴이 그 말 한마디에 굳는가 싶더니, 한쪽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왜. 화냈으면 좋겠어요?”

“그건 아니지만….”

호원은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차라리 무휼이 화를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앞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호원은 명훈과 함께 죽으려 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호원도 만약 무휼이 똑같은 짓을 하려 했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터였다.

그러나 무휼은 호원을 질타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호원이 몸을 회복할 때까지 극진히 보살펴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화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죠, 아무래도.”

무휼은 그렇게 말하고는 호원이 덮은 이불 안으로 다리를 밀어 넣었다.

무휼이 잘 이불은 옆방에 깔아두었기 때문에 호원이 덮고 있던 것은 온전히 1인용이었다.

넓지 않은 이불에 덩치 큰 무휼이 밀고 들어오자 비좁게 느껴졌지만 호원은 그의 눈치만 볼 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형을 때릴 순 없잖아요.”

푸른 눈을 휘며 씩 웃는 얼굴이 유혹적이었다. 호원은 새삼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고는 엉덩이를 들썩여 옆으로 몸을 물렸다.

그러나 무휼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붙이며 호원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이상하게 얼굴이 가깝다는 걸 느꼈을 때는 이미 푸른 눈동자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당신 혼내는 건 다른 사람 역할이고.”

한창 벼르고 있을 시영이나, 부드럽지만 엄하게 닦아세우는 순영, 그리고 호원의 절친인 수현도 호되게 혼을 내줄 터였다. 그에 생각이 미치자 호원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닥쳐올 미래를 걱정하느라 방심한 탓일까. 호원은 무휼이 불시에 어깨를 잡아채 누르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야, 잠깐…!”

화들짝 놀라 팔을 붙들었지만 이미 무휼의 거구에 제압당한 뒤였다. 커다란 몸 아래 깔린 호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정 혼나고 싶으면 혼내줄 수는 있는데.”

잘못한 게 많으니 벌줄 것도 많네요, 설레게. 무휼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씩 웃었지만 호원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는 일말의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자식, 진심이다. 호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기 무휼아…?”

호원이 파르르 떨리는 입으로 무휼을 불렀지만 무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긴 팔을 쭉 뻗더니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호원의 스포츠백을 잡아당겼다.

“아, 역시 있네.”

작은 뒷주머니를 뒤지던 그가 찾던 것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호원은 그의 손에 딸려 나온 작은 튜브를 보자마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호원이 종종 바르곤 하던 연노란색의 립밤이 무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습관적으로 챙기던 것이라 가방에 넣어둔 것도 까먹고 있던 것이었다.

립밤을 베개 옆에 올려둔 무휼이 긴 다리 중간쯤 걸려 있던 이불을 낚아채 내던졌다. 두꺼운 겨울 이불이 투박한 소리와 함께 방구석에 나뒹굴었다.

얇은 잠옷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호원이 파드득 놀라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마저도 무휼의 커다란 손에 막혀 내리눌렸다.

“얌전히 안 있으면 형만 힘들어요.”

웃음기 어린 무휼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옷깃을 파고드는 손이 뜨거워 순식간에 몸에 열이 올랐다.

“너 정말….”

호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무휼을 밀어내던 두 손이 위로 올라와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무휼은 키득키득 웃으며 입술을 내렸다. 통통한 귓불과 발그레한 뺨, 오뚝한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호원의 입술에 말캉하고 뜨거운 입술을 겹쳤다.

젖은 살덩이가 얽히며 질척한 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오갔다. 어느덧 호원은 무휼의 어깨에 매달려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지쳐 늘어진 호원 덕에 두 사람의 귀환은 사흘 후로 미뤄졌다.

***

섬을 떠나는 날에는 섬사람들이 모두 나와 마중을 해주었다. 심 씨 할아버지는 대놓고 서운한 티를 냈고, 돌담집 할머니는 심드렁한 얼굴이었지만 꼭 다시 오라며 맞잡은 손이 조금 젖어 있었다.

심청의 배를 타고 시내로 나와 무휼의 차를 찾았다. 오래 방치한 덕에 주차비가 폭탄 수준으로 나왔지만, 경악하는 호원의 얼굴에 대고 무휼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순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들 순영의 오두막에 모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영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오라는 추신에 호원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호원은 씁쓸한 기분으로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차창 너머로 서늘한 겨울의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 새해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제 올해도 끝이구나. 문득 무휼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가 막 봄에서 초여름으로 향하던 때였으니, 무휼을 만난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은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진짜 재수 없었는데.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손버릇도 나쁘고, 틈만 나면 놀리기나 하고. 괜히 억울해진 호원이 샐쭉 입술을 비죽거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무휼에게 물을 것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그리 큰일은 아니라서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호원이 무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에 베인 상처는 많이 나았지만 아직 쓰라릴 텐데도, 무휼은 기어이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야, 권무휼.”

호원의 물음에 무휼이 흘긋 파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호원은 종이에 대고 그린 것처럼 완벽한 옆얼굴을 향해 질문을 날렸다.

“너 갑자기 왜 나한테 존대하는 거야?”

한사코 형이라고는 안 부르던 게. 호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

무휼은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답지 않게 멍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정면과 호원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무휼은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하다 결국 차를 갓길에 세웠다. 고속도로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호원은 동그래진 눈으로 무휼을 쳐다보았다. ‘그’ 권무휼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듯 막고 있었다.

너무 뜻밖의 반응이라 오히려 질문을 한 호원이 어리둥절해졌다.

무휼은 호원을 흘긋거리며 주저하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만약 당신이 여명훈 때문에 도망친 게 아니라….”

내가…. 뒷말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 호원이 재차 묻자 무휼은 두 손으로 핸들을 꾹 잡더니 그 위로 이마를 기댔다. 숙인 고개 아래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그동안 너무 위아래 없이 제멋대로 굴어서… 나한테 정떨어져서 그런 걸까 봐.”

그래서 그랬어. 무휼이 체념한 사람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호원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정떨어졌을까 봐 잘 보이려고 그랬다고?”

“…….”

무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그만 가자며 다시 엑셀을 밟았다.

부드럽게 주행을 시작하는 자동차 안에서 호원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렸다. 경쾌한 웃음소리 중간에 ‘젠장, 이제 안 해!’ 하는 무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윽고 두 개의 목소리가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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