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덫 (2)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에 구멍이 생겼다.
다행히 일반 유리군. 혹시라도 완벽주의자 이호원이 유리까지 갈아 끼워 두었을까 봐 걱정했던 무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휼은 몇 번이고 돌멩이를 던졌다. 작은 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유리창 한쪽이 뻥 뚫렸다.
다음으로 무휼은 농기구들을 뒤져 쓸만한 날붙이를 찾았다. 녹슬어 쓰지 못하는 농기구들 사이에서 그나마 날이 살아 있는 낫을 찾아냈다.
그는 낫을 들고 지푸라기 더미로 다가갔다. 지푸라기를 엮은 밧줄을 잘라 풀어내고 길게 이어 묶자 쓸 만한 길이가 되었다.
밧줄 한쪽에 예의 낫을 묶은 그가 그것을 뚫린 창문으로 던졌다. 다행히 낫은 창틀에 제대로 걸려 고정되었다.
밧줄을 몇 번 당겨본 무휼은 주저 없이 벽을 디뎠다. 그러고는 밧줄에 의지한 채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상체에 힘이 들어가자 옆구리의 상처가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창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그가 창틀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동시에, 낫의 날 부분이 손잡이에서 쑥 빠지며 밧줄이 풀려 버렸다.
허공에 잠시 떠 있던 몸이 일순간에 아래로 훅 꺼지기 시작했다. 무휼은 순식간에 반전되는 시야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벽을 디디고 있던 발이 아래로 밀리며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휼이 온 힘을 다해 손을 내뻗었다.
***
“동산이라더니 길이 아기자기하네.”
명훈은 흥미롭다는 듯 오솔길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야생동물처럼 번뜩이는 시선은 빈틈없이 호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송곳처럼 찌를 때마다 호원은 애써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려 노력해야 했다.
“경치가 좋지? 들어오기 힘들어서 그렇지, 교통 상황만 좋아지면 관광객들도 많이 올 거야.”
“그러네. 나 이런 곳이라면 아예 터를 잡아도 좋을 것 같아.”
형이랑 단둘이 섬 생활이라니, 좋은데? 명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당연스럽게 미래 계획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그의 모습에 호원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무인도야?”
명훈이 장난스럽게 말을 붙였다. 날카로운 지적에 호원은 흘긋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말대로, 두 사람이 집을 나서 산을 오르는 동안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그것은 지금이 한창 농사일로 바쁠 오후 시간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호원이 일부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만 골라 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글쎄. 다들 바쁘신가.”
호원은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양 대꾸했다. 다행히 연기가 자연스러웠는지 명훈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긴장한 탓일까. 호원은 자꾸만 빨라지려는 걸음을 늦추려 애쓰며 걸었다. 긴장한 기색을 여명훈이 눈치챘다간 모든 계획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기회는 단 한 번.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곧 정상이네.”
호원은 밝게 웃으며 명훈을 돌아보았다. 뜻밖의 해맑은 미소에 명훈은 한쪽 눈썹을 으쓱 올렸다.
“목마르진 않아?”
호원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걷기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도 명훈은 생수병 뚜껑을 열려는 기색도 없었다.
호원은 초조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명훈의 손에 들린 생수병을 흘긋 쳐다보았다.
안 보는 사이 마신 건지 수위가 조금 줄어 있었다. 워낙 경계심이 강한 놈이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도 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왕이면 마셔두는 편이 작업하기 수월한데.
호원은 입 안쪽 살을 잘근거리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저 물을 먹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저놈이 얌전히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방법은 금방 떠올랐다.
여명훈은 오만하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우세에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또한 우세한 상황을 유지할 능력도 있다.
그렇다면 그 오만함을 자극하면 어떨까?
호원은 자신도 목이 마르다며 손수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명훈에게 준 것과 크기도, 라벨도 같은 병이었다.
“겨울이라 건조해서 그런가. 엄청 목이 타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뚜껑을 따자마자 꿀꺽꿀꺽 호쾌하게 물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3분의 1이나 비워버린 호원이 생수병 뚜껑을 닫으며 도발하듯 흘긋 명훈을 돌아보았다.
명훈은 한참을 말없이 물끄러미 호원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입꼬리를 올려 생긋 웃었다.
“형은 참 귀엽다니까.”
하긴, 게임은 어려울수록 재밌는 법이지. 여명훈은 즐겁게 중얼거리고는 호원에게 보란 듯이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병 입구가 명훈의 입으로 향하는 찰나의 시간이 호원에게는 마치 억겁과도 같았다.
명훈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명훈은 물기가 묻은 입술을 소매로 쓱 닦고는 호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불시의 입맞춤에 호원이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만족해?”
호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성큼 내딛는 걸음이 빨랐다.
정상이 바로 앞이었다.
***
“크… 윽.”
무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손목 안쪽으로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주룩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진득한 액체의 감촉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휼은 고개를 올려 위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창틀을 붙잡은 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낫이 망가진 이상 떨어지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창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여린 살점을 찢었다.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팔에 힘을 줘 상체를 올렸다.
내뻗은 다른 손이 창틀을 붙잡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유리 조각이 파고들었지만 무휼은 그대로 힘을 줘 창틀에 몸을 올리는 것까지 성공했다.
입고 있던 코트가 좋은 재질이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찢겨 넝마가 될지언정 뚫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무리 없이 창틀을 넘을 수 있었다.
쿵! 소리와 함께 그가 맨바닥에 떨어졌다. 등부터 떨어진 까닭에 옆구리의 상처 부위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커흑!”
무휼이 숨을 들이켜며 몸을 굳혔다. 격통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며 전신의 근육이 쪼그라드는 감각에 숨이 가빴다.
헉헉거리며 숨을 들이켜던 그는 한차례 격한 기침을 토해내며 팔꿈치로 땅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는 잠깐의 시간 동안 몇 번이고 고꾸라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무휼은 무릎을 짚고 한동안 숨을 골랐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손바닥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홧홧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흘긋 본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다행히 유리 조각이 박히진 않았는지 눈에 띄는 조각은 없었다. 피가 흥건해서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무휼은 손을 내리고 길가를 돌아보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 위쪽과 항구로 향하는 길 아래쪽을 번갈아 보던 그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이호원은 어느 쪽으로 갔을까. 무휼을 두고 도망칠 셈이라면 단연 항구 쪽으로 향했을 테지만 이상하게 시선은 자꾸만 위쪽으로 향했다.
만약 한쪽을 선택했다가 그곳에 호원이 없다면?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호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제때 맞추지 못할지도 몰랐다.
무휼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새파란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고정되었다.
무휼이 달리기 시작했다.
***
한낮의 햇빛을 듬뿍 받은 수면은 반짝반짝 빛나며 별처럼 빛을 뿌렸다. 호원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의 작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멋진 곳이네.”
이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명훈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형도 참, 은근히 로맨틱하다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호원은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명훈을 휙 밀쳐냈다.
불시에 밀쳐진 명훈이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과 불쾌함이 깃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호원이 입을 떼었다.
“생각해 봤어. 어떻게 하면 너를 괴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느낀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호원이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명훈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이래.”
“나한테 누명을 씌워서 스캔들을 낸 건 넘어갈 수 있어. 어차피 누명은 벗겨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호원은 명훈이 말할 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덧붙였다. 스캔들을 낸 주범이 명훈이라고 단정 짓고 한 말이었지만 명훈은 미간을 좁힐 뿐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 죄도 없는 권무휼은 왜 건드렸지?”
어디 한번 말해봐. 호원이 사납게 명훈을 노려보았다. 명훈은 주변을 슥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사람이 없는 게, 아주 우연은 아니구나?”
“대답해.”
호원이 딴소리를 하는 그를 억지로 화제로 돌려놓았다. 명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걸음 성큼 호원에게 다가섰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니까 할 말이 없잖아, 형.”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어? 명훈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은 결백하다 못해 억울하게까지 보였다. 호원은 그 가증스러움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억지로 병원에 보내진 것도 억울한데, 기껏 나왔더니 형은 그딴 새끼랑 바람이나 피우고. 내가 당장 눈 돌아가지 않고 배겼겠어?”
“…뭐?”
반문하는 호원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혹한의 추위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호원의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분노로 파들거리는 호원을 앞에 두고도 명훈은 여유로웠다. 그는 손을 들어 호원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렇잖아. 형이 나한테 뭐라 하면 안 되지. 게다가 그 권무휼인지 뭔지, 걔 살아 있다며.”
그럼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명훈의 목소리는 거침없었다.
호원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세상이 그를 두고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 제정신이야?”
“몰랐어, 형? 나 제정신 아닌 거.”
그러니까 정신병원을 갔지. 명훈이 키득키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호원은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호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쩌면, 조금이라도 그가 반성하는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결심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호원은 비죽 웃었다.
“네가 마지막까지 개새끼라 다행이야.”
호원의 말에 명훈이 달콤하게 웃었다.
“난 형이 욕할 때 제일 섹시하더라.”
뺨을 감싼 손이 내려와 허리에 감겼다. 은근슬쩍 몸을 붙이는 명훈의 행동을 호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슬슬 약발이 돌 때가 됐는데.”
나직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명훈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반문하려던 목소리는 끝이 뭉개져 사그라들었다.
툭 소리와 함께 명훈이 들고 있던 생수병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명훈의 눈이 생수병에서 호원의 눈으로 옮겨갔다.
“걱정 마. 그냥 마비약이니까.”
호기롭게 마셔줘서 고맙다, 오만한 새끼야. 호원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명훈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호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에 힘이 빠져나가며 무릎이 꺾였다.
“이제 끝을 내자.”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명훈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