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준비
전화를 끊은 심청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언덕을 올랐다. 이왕 닭을 잡기로 한 거,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어이, 원이 총각 있어?”
그래서 그녀는 항상 열려 있는 대문을 성큼 넘어 들어갔을 때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호원의 방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아니에요!”
문짝 너머에서 당황한 듯한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며 조금 상기된 호원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호원은 머쓱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손에는 동그랗게 끼운 케이블타이가 들려 있었다.
“그건 왜 들고 있어?”
“아, 이거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뭘 좀 하느라고요. 호원은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영 수상쩍었지만 심청은 더 캐묻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점심에 닭 잡을 거니까 원이 총각도 내려와.”
“아니, 저는-”
“거절할 생각이면 가마솥 들고 여기로 오는 수가 있어.”
단호한 말에 호원이 입을 다물었다. 곱상하니 예쁘장한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자 심청은 괜히 더 괴롭혀 주고 싶은 기분에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원이 총각, 혹시 친구라도 불렀어?”
“네?”
“오늘 섬 들어와야 한다는 총각이 있다는데. 원이 총각 아는 사람이면 나가볼까 하고….”
말을 잇던 심청은 호원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말끝을 흐렸다.
호원은 꼭 부고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참담한지 보는 심청이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왜, 왜 그려?”
“아니….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점심은 다음에 먹을게요. 호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신발을 꿰어 신었다.
그러고는 문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채 심청을 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뭐야…?”
혼자 덩그러니 남은 심청이 허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
호원은 크고 평평한 돌에 로프를 묶었다.
하나씩 끙끙거리며 옮겨야 했던 누름돌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웠지만, 혹시 몰라 두어 개 더 준비했다.
호수에는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작은 쪽배를 타고 깊은 곳까지 간 그가 누름돌을 내던졌다. 돌은 풍덩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수면 위에 동동 떠 있는 부표를 한 번 더 확인한 그가 다시 쪽배를 움직였다. 호수는 기본적으로 수심이 깊은 덕에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뭍에 닿은 그는 쪽배를 끌어 올렸다. 사람 한두 명이 간신히 탈 법한 작은 배는 호원의 힘만으로도 가뿐하게 옮길 수 있었다.
쪽배는 수풀이 무성한 곳에 숨겨 나뭇잎으로 가려두었다. 이 근방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도 유의 깊게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잠시 움직였을 뿐인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호원은 소매로 이마를 닦아내고는 항구 쪽을 돌아보았다.
심청 아주머니가 말한 친구라는 게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성격에 벌써 섬에 들이닥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는데. 그의 예상보다 상대는 많이 애가 탔던 모양이다. 아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오늘 저녁 전에 섬에 닿을 터였다.
일정은 많이 어그러졌지만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일단 최우선은-
“권무휼.”
호원이 이를 까득 갈았다.
***
해는 천천히 정수리 위로 오르고 있었다.
자비 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무휼은 이마의 땀을 슥 닦아냈다. 완연한 겨울인데도 햇볕 탓인지 고된 노동 탓인지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숙박비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라는 심 씨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나온 밭이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고될 줄은 몰랐다.
무휼은 장시간 굳어 있던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쭉 켰다. 굳어 있던 몸이 펴지며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트레칭을 하며 그는 언덕 위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일하면서도 틈틈이 호원의 집 쪽을 쳐다보았던 터라 부러 찾지 않아도 호원 집의 파란 지붕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점심때 다시 간다고는 했는데. 문을 다 닫아걸면 어쩌지.
그럼 어쩔 수 없이 문짝 하나 정도는 뜯어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부수고 싶지는 않은데.’
무휼은 호원과 부모님의 추억이 서린 집을 함부로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야 별거 아닌 척하고 있지만, 분명 호원에게도 그 집은 소중한 곳일 터였다.
호원은 보기보다 안 좋은 버릇이 꽤 많은 편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버릇은 뭐든 혼자 속으로 삭인다는 것이었다.
호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무휼은 어떻게든 그를 끌고 돌아갈 작정이었으므로 호원의 그런 버릇은 방해물이나 다름없었다.
‘좀 의지해 주면 어디 덧나나.’
설마 아직도 어린애 취급을 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런 거면 정말 가만 안 둘 셈으로 무휼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때, 호원의 집 대문이 열리고 심청이 걸어 나왔다.
잠시 일에 열중하느라 누가 들어가는 걸 못 봤는데. 무휼은 아차 싶은 기분으로 들고 있던 낫을 내던지고 그쪽으로 향했다.
“어, 무휼 청년. 마침 잘 왔어. 가서 밥 먹자고.”
심청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무휼을 보고는 손짓해 불렀다. 좋은 닭을 잡았으니 백숙이라도 해주겠다며 그녀는 호원의 집 대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호원 청년은 급한 일 있는 모양이니 나중에 가져다주지 뭐.”
“…안에 없어요?”
무휼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 밖으로 나갔나? 언제부터? 어디로 갔지? 순식간에 떠오른 사고들이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엉켰다.
무휼은 심청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냉큼 호원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가는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을 보니 한쪽 구석에 케이블타이 뭉치가 널브러져 있었고,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언제… 언제 나갔어요?”
무휼이 심청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심청은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얼마 안 됐어. 청년이 저 아래쪽 밭에 있을 때부터니까 한… 20분쯤 됐으려나.”
나도 돌아갔다가 이거 가져다주러 다시 들른겨. 심청은 그렇게 말하며 마루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는 낡은 구명조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체 저런 게 왜 필요해서? 무휼은 그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급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모르세요?”
초조하게 물어보면서도 무휼은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잘 보이지 않는 아래쪽 밭에 있었다지만 호원이 지나가는 것도 못 볼 리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호원이 집을 나간 이후 언덕 위쪽으로 올라갔다는 소리였다.
“잘 모르겠는데. 근데 이상하게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친구가 아니었나.”
뭐 빚쟁이라도 오는겨? 심청이 오히려 되물었다. 무휼이 무슨 소린가 싶어 미간을 구기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아니, 내가 두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무휼 청년도 그렇고 호원 청년도 그렇고 밖에서 손님 온다니까 과민반응들을 하길래….”
손님이라는 말에 무휼의 눈이 커졌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눈동자가 서슬 퍼런 시선으로 쳐다보자 심청은 입을 딱 다물었다.
“왜, 왜 그려?”
“손님이 온다고요? 언제요.”
말투는 정중한데 묘하게 취조받는 기분이었다. 심청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거 뭐여. 방금 전에 전화가 왔는데. 오늘 섬에 들어오겠다던 청년이 또 있다나 봐. 일단 거절해 뒀는데 혹시 친구면….”
“감사합니다.”
무휼은 심청의 말을 뚝 끊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대문을 훌쩍 넘어 언덕 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뭐여 대체….”
또다시 홀로 남은 심청이 멍하니 목소리를 흘렸다.
***
언덕을 올라가는 오솔길은 달리기엔 영 불편했다. 신발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군데군데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어 자칫 잘못하다간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무휼은 전력으로 그 길을 질주했다. 숨이 턱까지 차 가슴팍이 뻐근하고 목에서는 피비린내가 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마침내 저 앞에서 길쭉한 인영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제동이 걸린 무릎과 종아리가 욱신거렸지만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이호원?”
쇳소리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호원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인영은 움찔하는가 싶더니 옆쪽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컨테이너가 덩그러니 놓인 곳이었다.
“이호원!!”
이호원이다. 무휼은 확신했다.
인영의 뒤를 따라 컨테이너 앞으로 가니 컨테이너의 철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무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안은 창고로 쓰는 곳인지 비료 포대며 농기구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형광등은 오래됐는지 곳곳이 깨져 있었지만 거의 천장에 붙다시피 높은 창문에서 햇빛이 쏟아져 사물을 분간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이호원! 어디야!”
무휼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방금 전 발견했던 인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새 밖으로 나간 걸까? 무휼은 까득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그때,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동시에 차르륵- 하는, 쇠사슬 움직이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무휼은 문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잡아챘다. 힘을 실어 밀자 철제 양문이 반 뼘 정도 열렸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11자 형의 손잡이를 칭칭 감은 쇠사슬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호원의 얼굴이 보였다.
“네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이건 무리야. 괜히 용쓰다 다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내일쯤 되면 사람이 찾으러 올 테니까.”
소리 질러도 소용없어. 애초에 이쪽으로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호원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무휼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휼의 목소리가 처참하게 갈라졌다.
“어쩌려고…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예요.”
새파란 눈동자가 초조함과 절망으로 떨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호원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얼굴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무기질적으로까지 보이는 그의 얼굴에 무휼은 입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무휼아.”
무휼의 눈이 호원의 눈동자를 향했다. 따스한 갈색의 눈이 부드럽게 휘며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보고 있는 무휼의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처연한 미소였다.
“지금까지의 일 모두… 잊어버려.”
무휼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호원은 그대로 등을 돌려 가 버렸다.
“이호원!!”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무휼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호원이 그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
해가 서서히 서산 너머로 기울어질 시간, 삼월도의 유일한 선박장에 고기잡이배 한 척이 정박했다.
선장은 후다닥 조종실에서 나와 섬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안쪽을 향해 외쳤다.
“거 이제 내려도 됩니다! 도착했어요!”
그 말에 안쪽에서 장신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갈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다정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역광이 지는 섬의 모습을 올려다보더니 선장을 슥 돌아보았다.
선장은 움찔하며 몇 걸음 주춤 물러났다. 서늘한 시선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배를 운항하는 내내 목에 닿아 있던 날붙이의 감촉에 비하면 나은 축이었다.
“워, 원하는 대로 섬에 데려다줬으니 볼일 끝난 거죠?”
선장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피식 웃더니 메고 있던 가방에 손을 넣었다.
툭. 건조한 소리와 함께 선장 앞에 던져진 것은 돈다발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꽤 되는 액수였다.
“그만 가봐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 배에서 내렸다. 선장은 허둥지둥 돈다발을 주워 들더니 다시 조종실로 쏙 들어갔다.
작은 고기잡이배는 언제 섬에 들렀냐는 듯 후다닥 뱃머리를 돌려 멀어져 갔다.
남자는 장시간 한 자세로 있느라 굳은 몸을 천천히 풀며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운 웃음이 남자의 얼굴 만면에 퍼져 있었다.
“자, 그럼.”
우드득우드득, 관절을 푸는 소리가 기괴하게 들렸다.
“우리 깜찍한 형은 어디 숨어 있을까?”
남자. 여명훈은 생긋 웃으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