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반향
호원을 데려다 의자에 앉힌 무휼이 그 앞에 양은 냄비를 턱 내려놓았다. 뭘 만드는 건가 했더니, 안에 든 것은 달걀죽이었다.
“그냥 눈대중으로 배운 거라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뭐, 그래도 먹을 만할 거예요.”
김치가 없는 건 좀 그러네. 무휼은 작게 덧붙이며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호원의 것은 정성 들여 만든 주제에, 정작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저조차 놓지 않은 걸 보니 애초부터 먹을 생각이 없던 듯했다.
“너 진짜 왜 이래?”
샛노란 달걀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호원이 물었다.
“네가 찔린 거 다 나 때문이야. 못 들었어?”
“…….”
무휼은 대답이 없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호원은 신물이 왈칵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뒷말이 나오질 않았다. 호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아마 무휼도 뒷말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무휼에게서 나온 대답은 영 엉뚱한 것이었다.
“식어요. 얼른 먹어요.”
“지금 그딴 게 중요해?”
호원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테이블을 쾅 내리치자 작은 냄비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휼은 씩씩거리는 호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에 호원은 눈가를 일그러뜨리다 그만 시선을 피해버렸다.
“중요해요.”
무휼이 대답했다. 그것은 호원이 원했던 답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원의 손을 끌어다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먹어요.”
직접 떠먹이기 전에. 뒷말은 속삭이듯 작게 덧붙인 말이었지만 가까운 거리 덕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호원은 지금 그 어떤 것도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는 자신 가까이로 기울어진 무휼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내일 당장 돌아가.”
“말 들을 생각 없다고 했어요.”
“들을 생각이 있든 없든 돌아가라고.”
호원의 목소리가 애원하듯 잘게 떨렸다. 그러나 무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어이 호원은 어젯밤 무휼과 그의 가슴을 동시에 찢었던 말을 다시 꺼내야 했다.
“헤어지자는 말 못 알아들어? 다시 해줘?”
“해봐요.”
뜻밖에도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호원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눈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이 닿은 살갗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어디 한번 해봐, 이호원.”
말하는 소리에는 까드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호원의 시선이 흔들렸다. 무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갈라져 핏방울이 맺힌 입술은 뜨거웠다.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살덩이에도 옅은 피비린내가 묻어나는 듯했다.
호원은 다급하게 무휼의 어깨를 잡아챘지만 밀어내는 힘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젖은 살이 맞닿아 질척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숨이 모자란 가슴께가 뻐근하고 생리적으로 나온 눈물에 시야가 일렁거렸다.
“무흐….”
이름을 부르려던 소리는 신음이 되어 흘러내렸다. 맞닿아 있는 피부가 아플 정도로 달아오르는 듯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즈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호원은 갈급한 사람처럼 공기를 들이마시며 헐떡거렸다.
틀어 잡힌 손목이 욱신거렸다. 어찌나 억세게 움켜쥐었는지 피부에 붉게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호원은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높이보다 한 뼘 정도 높은 곳에서 무휼은 그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모양 좋은 입술이 꽉 다물리는가 싶더니 잡혔던 손목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호원의 손목을 놓아준 무휼은 그대로 몸을 벌떡 일으켜 등을 돌렸다.
“점심때쯤 다시 올게요. 죽… 다 먹어요.”
그러고는 그대로 방을 나서버렸다.
호원은 멍한 기분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전 벌어진 일들이 모두 꿈은 아닐까 싶게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현실감 따위는 어제저녁 무휼이 이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부터 없긴 했지만.
무휼의 모든 반응은 그의 예상 범위를 모조리 벗어나 버렸다. 도무지 무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호원은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떻게든 무휼을 이 섬 밖으로 빼돌려야 하는데 그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 막막했다.
잠을 자지 못해 뻐근한 눈가를 문지르는데, 문득 코끝에 고소한 냄새가 맴돌았다.
시선을 내리니 뽀얗고 노란 달걀죽에서 하늘하늘하게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보들보들한 밥알과 몽글몽글하게 풀린 달걀을 보니 새삼 옛날 생각이 났다.
권무휼은 이걸 다 먹고 라면까지 끓여 먹었었지. 그러고도 밥을 말아 먹던 게 생각나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 얼마나 굶었길래 그렇게 얼굴이 반쪽이 됐나 싶어 입맛이 썼다.
숟가락을 들어 죽을 뒤적거리니 새하얀 김이 확 올라오며 참기름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진해졌다.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한 것치고는 꽤 완성도가 높았다. 하기야, 달걀죽 같은 게 뭐 얼마나 어려운 요리겠냐마는. 호원은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무휼이 뭔가 만들어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가 된장국이었던가. 공교롭게도 두 번 다 아침 식사였다.
요리 솜씨가 나쁘진 않은 거 같던데 이참에 아예 요리나 가르쳐 볼까.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던 호원이 우뚝 숟가락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호원.”
권무휼의 당돌함이 옮았나. 호원은 두 손을 들어 제 뺨을 철썩철썩 내리쳤다.
자신까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저 좋을 때로만 할 순 없었다.
나라도 정신 차려야 해. 꾹 이를 악문 호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입맛은 이미 뚝 떨어진 지 오래였다.
고소한 향기를 풍기는 죽이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부엌을 벗어났다.
***
“…진짜 배 안 띄워도 되겠어?”
“네.”
단호한 대답에 오히려 물어본 쪽이 머쓱해졌다. 심청은 본디부터 호탕하고 괄괄한 여장부였지만 저렇게 상심한 기색이 역력한 미남의 얼굴에는 누구든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이 모자라 해쓱해진 얼굴은 가뜩이나 뚜렷한 이목구비 탓에 더 애처로워 보였다.
무휼이 말만 하면 숙취고 뭐고 당장에라도 배를 띄워줄 생각이었던 그녀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아침에 본 심 씨 할아버지와 똑 닮아 있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생각 없어요.”
무휼은 그렇게 말하면서 배추가 한가득 담긴 박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꽤 무거울 텐데도 가뿐하게 드는 모습에선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심 씨 할아버지는 건장한 미청년이 와서 일손이 늘었다며 좋아했지만, 심청은 환자라는 사람한테 일을 시키기가 영 미안했다.
그 때문에 숙취로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끌고 배추밭까지 지원을 나온 것이었다.
“근데 넌 어디가 아픈 거냐? 뭐 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냥 좀… 다친 거예요. 이젠 멀쩡합니다.”
무휼은 다음 상자를 번쩍 들어 나르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저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 괜찮은 사람은 드물다는 걸 심청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안쓰러운 기분으로 구경하고 있는데, 무휼이 박스를 내려놓고는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심청이 말해보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무휼은 그런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저 있는 동안 이 섬 들어온다는 젊은 남자가 있으면… 태워주지 마세요.”
“그냥 젊은 남자?”
“네.”
부탁치고는 너무 광범위하지 않나. 게다가 부탁 내용도 영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서 수상하기까지 했다.
심청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무휼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곤란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이상한 거 아니고요. 그냥….”
설명하기가 어려운지 그는 다시금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다…. 심청은 뭐라 확답하기 어려운 부탁이라며 턱을 긁적였다.
“생각은 해보마.”
심청은 그렇게 말하고는 휙 등을 돌렸다.
무휼이 당분간 심 씨 할아버지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는 건 그녀도 들었으니, 미리 가서 점심이라도 차려줄 셈이었다. 그 김에 저 부탁이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고.
집에 다다를 즈음, 그녀는 코를 벌름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맛있는 냄새가 나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대문으로 접근하는데, 안쪽에서 커다란 광주리를 옮기고 있던 그녀의 남편이 화색을 띠었다.
“아, 여보. 왔어?”
“뭐 해?”
“무휼이 닭이라도 잡아줄까 해서 준비하고 있었지.”
역시 부부는 괜히 부부가 아니다. 미리 그녀의 생각을 읽고 준비한 듯한 남편이 새삼 사랑스러워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남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여보, 물! 물 묻어!!”
남편은 광주리를 얼른 옆으로 치우며 다급하게 말했지만, 그딴 것에 신경 쓸 그녀가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남편을 끌어안고 쪽쪽 입을 맞춰주는데, 별안간 안쪽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따르르릉- 하는 구식 전화벨 소리에 그녀와 남편의 눈이 동시에 안쪽 방을 향했다.
“전화 받아, 여보. 난 이거 마저 할게.”
“응, 응.”
남편이 광주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하자 심청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협탁 위에 검은색 구식 집 전화기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러게 진즉 휴대폰으로 바꾸라니까. 말 참 안 듣는다고 혀를 쯧쯧 차며 그녀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거기 심 씨 할아버지 댁 맞지요? 혹시 청이 거 있습니까?]
“네, 네. 저 여기 있어요.”
심청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기 사벌섬인데, 거 청이 너 언제 오냐?]
사벌섬에서 그녀를 찾는 사람이라면 항구 관리인인 김 씨일 터였다.
그러나 심청은 항상 내키는 대로 사벌섬과 삼월도를 왔다 갔다 했기에 이처럼 전화까지 해서 그녀를 찾는 일은 드물었다.
“글쎄요. 당분간은 여 있지 싶은데.”
[그럼 오늘 청년 한 명 태워다 주지 않을래?]
에엥? 심청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왕복을 하라는 건가 싶었다. 상대도 그 생각을 읽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이, 이 청년이 오늘 꼭 들어갈 일이 있는데 삼월도 가는 배가 너밖에 없지 뭐냐. 돈은 원하는 대로 준다는데 이번만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
원하는 대로 준다는 말에는 그녀도 귀가 솔깃했다. 평소라면 숙취고 뭐고 당장 배부터 띄웠을 터였다.
그러나 방금 전, 무휼의 부탁이 떠올랐다. 마치 곧 이런 연락이 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교로웠다.
영 기분이 꺼림칙했다. 구체적이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은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그 불길함만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안 되긋냐?]
심청이 망설이는 걸 느꼈는지, 김 씨도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듯 말끝을 늘였다.
“으음….”
심청은 고민했다. 그러나 숙취로 무거운 머리를 잘 돌아가지 않았고, 불길한 예감은 이젠 가슴께까지 뻐근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바빠서 안 되겠는데. 거 청년한테는 며칠 뒤에 다른 배가 한 척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 전하쇼.”
무휼이 부탁해서가 아니라, 그냥 기분이 영 꺼림칙해서 그런 거야. 심청은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대답했다.
김 씨는 아쉽다는 듯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심청은 단호했다.
“싫은 건 싫은 거여.”
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시에 불길한 기분이 싹 가시는 것을 느끼며 심청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