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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91)화 (91/101)

제91화. 포획

“아는 사람이여?”

돌담집 할머니는 대문 밖에서 옆구리를 짚은 채 헐떡거리는 젊은이와 호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호원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어떻게? 그 생각만이 새하얗게 변한 그의 머릿속을 배회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를 알아본 자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을 거란 사실이었다.

돌담집 할머니는 심상치 않은 호원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의심쩍은 눈으로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총각은 누구요?”

그때 얼마나 전력 질주를 한 건지 아직도 옆구리를 감싸 쥔 채 헐떡거리던 청년이 숙이고 있던 상체를 폈다.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라도 저 얼굴만은 단번에 알아볼 테다. 호원은 잠시 상황을 잊고 실소할 뻔했다.

“어… 그러니까….”

자신의 돌담만큼이나 단단하고 굳세게 살아온 할머니도 무휼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당황한 얼굴로 호원과 무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호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에 무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고, 돌담집 할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갈 테니 먼저 가 계세요.”

호원은 그렇게 말하며 돌담집 할머니를 돌려보냈다. 심 씨 할아버지 숨넘어가기 전엔 오라는 당부를 끝으로 돌담집 할머니는 호원의 집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무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단둘이 남은 마당에 선 호원은 대문부터 닫아걸었다. 무휼이 어찌나 세게 밀어젖혔는지 대문 나사가 어긋나 삐걱거렸다.

등 뒤에서는 그 어떤 말도 없었다. 호원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머릿속은 마구 뒤엉켰다.

이윽고 호원이 뒤를 돌았다. 언제까지고 무휼을 밖에 세워둘 수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뒤를 돈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넓은 가슴팍이었다.

순식간에 허리와 어깨가 잡혀 끌려갔다. 감아 안은 팔의 단단한 감촉이 등허리와 어깨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뺨에 닿은 티셔츠의 보드라운 감촉에 호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급하게 산 옷인지 무휼의 티셔츠에서는 새 옷 특유의 꿉꿉한 냄새와 바닷물의 짠 내가 났다. 그러나 호원은 그중에서도 무휼의 체향을 귀신같이 구별할 수 있었다.

깊은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청량하면서도 오래된 나무처럼 묵직한 냄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향에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무휼아.”

부르는 소리에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 아플 정도로 옭아맸다. 숨이 살짝 가빠왔지만 호원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당장 그를 밀어내고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기껏 올라간 손은 무휼에게 닿지도 못한 채 허공만 긁었다.

그를 두고 도망쳐 나온 주제에, 호원은 무휼의 팔을 밀어낼 수 없었다. 게다가 달려오면서 퍽 무리를 한 것처럼 보이는 몸을 억지로 떼어놨다가 상처에 충격이 갈까 두렵기도 했다.

“너 몸은? 몸은 괜찮아?”

상처에 생각이 미치자 퍼뜩 무휼의 몸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호원은 번쩍 고개를 들고 다급하게 물었다.

“벌써 막 움직여도 되는 거야? 여기서는 병원까지 빨리 가는 것도 힘든, 데….”

호원의 말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시야가 온통 파랬다. 너무 파래서 마주하는 시선이 부딪힐 때마다 물방울이 튀는 것 같았다.

그 새파란 눈동자에 얼핏 엿보이는 감정은 너무 깊고 진했다.

호원은 꼭 망망대해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판자에 몸을 의지한 채 하늘과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막막했다.

가만 들여다보다간 그 새파란 빛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호원은 아득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려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시간은 이미 저녁을 지나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돌려보낼 수도 없고 이 섬에 카페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이는 게 최선이었다.

조심스럽게 무휼의 가슴을 밀어낸 호원은 자꾸만 무휼의 옆구리 쪽을 흘긋거렸다. 혹여나 피라도 배어 나오면 당장 배를 띄워달라 할 셈이었다.

다행히 무휼의 티셔츠는 깨끗했다. 바닷물인지 뭔지가 튀었는지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지만 피로 보이는 얼룩은 없었다.

호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휼에게서 떨어졌다. 이런 날씨에 바다를 건너오느라 무휼의 몸은 차게 식어 있었다. 일단 따듯한 곳에서 몸을 데우고 상처를 살피는 게 먼저였다.

이야기를 하든 원망을 듣든, 그건 다음 일이었다.

***

무휼은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는 호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호원이다. 꿈속에서 보는 허상이 아닌, 제 앞에서 숨을 쉬고 움직이고 말을 하는 이호원.

그 사실이 너무 벅차서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 먹먹하다 못해 아픈 것도 같았다.

찬장을 열어 찻잎을 꺼내는 손길이 익숙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종종 별장처럼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그곳에 있는 호원은 녹아들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호원이 어릴 적에 살았던 집. 무휼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집 안은 곳곳에 부모님과 어린 호원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벽 한쪽에 커다랗게 걸린 가족사진, 안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문틀에 새겨진 키를 잰 흔적 등은 부러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밟혔다.

특별하다 할 만한 건 없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집이었다. 혜영을 만나기 전까진 ‘단란함’이라는 단어를 실감하지 못했던 무휼이 봐도 호원의 가정이 행복했을 거라는 건 쉬이 상상이 갔다.

가족사진에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 남성과 부드럽게 미소 지은 여성, 그리고 어린 티가 많이 나는 호원이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호원은 쑥스러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게 또 초등학생은 되었을까 싶게 어려 보이는 얼굴과 잘 어울렸다.

무휼은 흘긋 호원의 눈치를 보다 몸을 일으켜 가족사진 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가까이에서 본 어린 호원은 발갛게 홍조가 오른 볼이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 호원의 얼굴은 아버지를 많이 닮아 있었는데, 지금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가 우아해 보이는 어머니 쪽을 닮아 있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게 이런 거구나. 무휼은 신기한 기분으로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혜영과 많이 닮았다는 말은 종종 듣지만, 아무래도 그건 ‘피가 안 통한 모자치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말이었다. 애초에 날카로운 인상인 무휼과 기품 있는 혜영은 분위기부터가 많이 달랐다.

오히려… 그래, 혜영은 사진 속 여성을 닮았다. 얼굴이 닮은 건 아니지만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우아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호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혜영도 호원을 마음에 들어 했던 걸까.

“뭘 그렇게 봐.”

생각에 잠겨 있는데 호원이 쟁반에 머그잔을 받쳐 들고 나타났다. 그는 무휼이 가족사진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무슨 사진을 그런 얼굴로….”

무슨 얼굴? 무휼이 의아해하며 눈썹을 으쓱했지만 호원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만 보고 앉아.”

무휼은 그 말에 얼른 자리 잡았다. 출입구를 등지는 쪽이었다.

거기 웃풍 들어서 서늘한데. 호원은 이쪽으로 오라는 듯 안쪽 바닥을 톡톡 두드렸지만 무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호원을 놓친 게 두 번이었다. 출구를 몸으로라도 막지 않는 한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호원은 계속 무휼의 몸을 신경 쓰는 듯했다. 하기야 칼에 찔린 사람이 이 먼 곳까지 와 있으니 걱정스러울 만도 하겠지만, 무휼은 그것이 숨기기 어려울 만큼 기뻤다.

당장 손발을 묶어서 데리고 돌아갈까. 왜 혼자 멋대로 했냐고 닦달할까. 아니지, 일단 덮쳐?

곰곰이 생각하는 무휼의 시선에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인 검은 봉투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는 벽 쪽에 등을 돌리고 있었어서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검은 봉투는 편의점에서 흔히 쓸 법한 크기였는데, 그 안에서 반투명한 막대 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얇고 긴 플라스틱 끈. 케이블타이였다. 그러나 단순히 사용하기 위해 뒀다기엔 양이 과하게 많은 감이 있었다.

그 아래로는 뭘 한 건지 동그랗게 채워진 케이블타이도 있었고, 그중 몇 개는 가위나 칼로 끊은 듯한 잔해도 있었다.

“저건?”

무휼이 케이블타이 쪽을 보며 말하자 호원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가 잠시 굳는 듯하더니 손을 내밀어 봉투째로 치워버렸다.

“…별거 아냐. 그냥 농사일에 필요한 거.”

그런 것치고는 숨기는 기색이 퍽 수상했지만 무휼은 더 캐묻지 않았다. 눈앞에 호원이 있는데 저딴 플라스틱 끈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말을 하려던 호원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시계를 흘긋 쳐다보았다. 이미 배를 띄우기엔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어. 난 심 씨 할아버지 댁에서 자고 올 테니까….”

내일 돌아가. 그 말을 끝으로 호원은 몸을 일으켰다. 겉옷을 챙겨 드는 걸 보니 밖으로 나갈 셈인 듯했다.

무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원의 몸을 끌어안은 뒤였다. 품 안 가득 퍼지는 따스한 체온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코끝에 달콤한 냄새가 맴돌았다. 꿀처럼 달콤하고 바닐라처럼 향긋한, 이호원 특유의 냄새였다.

무휼은 제 품 안에서 굳어버린 호원을 더 당겨 안으며 드러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호원의 체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등은 그새 말랐는지 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놔줘.”

호원이 말했다. 천천히 올라온 손이 무휼의 팔 위에 얹어졌지만 억지로 밀어내려는 기색은 없었다.

“싫어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느라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로 무휼이 대답했다. 호원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무휼은 그를 더 감아 안으며 따듯한 피부를 잘근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투로….”

호원이 중얼거렸다. 낭패감이 짙게 서린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휼의 팔 위에 얹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놓으면 또 도망갈 거잖아. 그러니까 싫어요.”

무휼이 호원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품 안에서 호원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무휼은 소름이 오소소 돋은 목덜미를 눈으로 훑으며 혀를 내밀어 제가 낸 잇자국을 핥았다.

“…형.”

호원이 형. 그 말을 내뱉을 때마다 호원의 몸이 놀란 것처럼 퍼드득 튀었다. 생각보다도 격한 반응에 무휼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보고 싶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휼 스스로 생각해도 욕망이 짙게 어려 있었다. 애초에 자제할 생각은 없었지만.

“무휼아…. 너 진짜 이거 못 놓-”

“보고 싶었다고, 이호원.”

죽도록 보고 싶었어.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무휼은 호원을 깊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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