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조짐
“어어이, 호원 총각! 일은 좀 어때?”
멀리서 우렁차게 부르는 목소리에 호원은 아래를 향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가리느라 양옆으로 차양이 늘어진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상대를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야 했다.
햇빛을 등지고 언덕 위쪽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비척비척 걷는 걸음걸이와 밀짚모자를 쓴 얼굴을 유심히 보던 호원이 활짝 웃었다.
“아, 심 씨 할아버지!”
그는 얼른 장갑을 벗어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다 옆에 놓여 있는 바구니를 툭 쳐서 쓰러트려 버렸다. 바구니 안에서 밑동이 새하얀 무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에이그, 조심 좀 해야지 이 사람아. 청년이 벌써부터 그래 덤벙거려 어쩐대?”
“그래도 힘은 잘 쓰잖아요?”
호원은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바닥에 구른 무를 손으로 툭툭 털어 다시 바구니 안에 넣고 그는 허리를 쭉 폈다.
“농사일 정말 만만찮네요. 체력에는 자신 있는 편이었는데….”
“그럼 쉬운 줄 알았나? 그래도 호원 총각 덕분에 우리가 좀 편해지긴 했지.”
심 씨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호원의 팔뚝을 두드렸다. 호원이 섬에 온 지 보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섬사람들의 일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불쑥 왔다가 불쑥 사라지곤 했었기에 섬사람들은 호원이 오래 머무는 것을 무척이나 기꺼워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호원에게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았고, 호원은 기꺼이 밭으로 나가 수확을 도왔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챙겨준 작물들을 품 안 가득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덕분에 식비 걱정이 없다며 호원은 곧잘 애교를 부렸고, 섬사람들은 그런 호원이 귀엽다며 또 수확물들을 한 아름 안겨주곤 했다.
오늘은 옆집인 돌담집 할머니 무밭 수확을 도와드리기로 한 날이었다. 수확이 끝나면 답례로 무와 말린 무청, 밑반찬도 좀 얻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호원이 흙 묻은 손을 탁탁 털며 묻자 심 씨 할아버지는 막 장난을 치려는 어린아이처럼 심술궂게 씩 웃었다. 호원은 그 얼굴을 보고는 기분 좋게 마주 웃었다. 섬사람들끼리 근근이 살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하나같이 정정하고 기운이 넘쳤다.
“내가 오늘 이걸 땄거든!”
심 씨 할아버지는 어디서 꺼낸 건지 등 뒤에서 굵직한 병 하나를 쑥 꺼냈다. 누가 봐도 집에서 만든 게 분명한 담금주였다. 안에는 더덕인지 삼인지 모를 뿌리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아아, 오늘도구만. 호원은 알 만하다는 듯 하하 웃었다.
섬 언덕 아래쪽에 사는 심 씨 할아버지와 언덕 위쪽 한 씨 할아버지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두 할아버지는 한가할 때면 곧잘 장기를 두곤 했는데, 그 상품은 늘 제각각이었다. 어떤 때는 갓 수확한 작물이기도 했고, 오래된 잡지이기도 했으며, 또 어느 날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이기도 했다.
그것이 오늘은 저 담금주인 모양이었다.
호원의 웃는 얼굴에 심 씨 할아버지가 담금주를 까딱까딱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게, 이게 8년 된 더덕으로 담근 술이야. 오늘은 이걸로 또 한잔하자고.”
“또 그러다 아주머니한테 혼나시려고요? 병원에서 술 줄이라 했다면서요.”
호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심 씨 할아버지의 담금주 사랑이야 옛날부터 변치 않은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연세가 연세다 보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뿐인 딸까지 들먹이며 말하자 심 씨 할아버지는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갸는 쪼잔해서 반주 한 잔도 못 하게 한다고. 호원 총각 핑계 대고 나도 이참에 아껴둔 술 까는 거지.”
걔가 호원 총각 얼굴에 유독 약하잖아. 심 씨 할아버지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하기야 호원은 평균 나이가 60대를 웃도는 이 섬에서는 보기 드문 젊은이인 데다, 눈에 띄는 외모기도 했다. 섬사람들이 그를 예뻐하는 것이 단순히 이 인적 드문 섬에 자주 방문하는 청년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이젠 건강 생각하셔야죠.”
“에헤이, 이젠 호원 총각까지 쩨쩨하게 굴기야? 그래서 먹겠다는 거여, 말겠다는 거여?”
“으음….”
호원은 일부러 말을 길게 끄며 고심하는 척했다. 그러다 슬쩍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심 씨 할아버지, 옛날에 어업도 하셨죠?”
“응? 그렇지?”
“그럼 그때 쓰시던 부표랑 구명조끼도 아직 가지고 계시나요?”
호원의 말에 심 씨 할아버지는 담금주를 내려놓고 팔짱을 척 끼더니 고개를 한참 이리저리 꺾어가며 고민했다. 그러다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 다 처박아 뒀던 거 같은데. 아, 근데 구명조끼는 망가져서 고정이 안 돼. 위로 휙 빼면 그냥 빠져부러.”
근데 그건 왜? 심 씨 할아버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배 한 척 없는 청년이 부표며 구명조끼를 찾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요즘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거든요. 거기에 쓸까 하고요.”
“아, 그래? 그럼 나야 창고 정리하고 좋지. 오늘 우리 집에 들르면 내 꺼내두지 뭐.”
심 씨 할아버지는 더 캐묻지 않고 냉큼 허락했다. 그러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조건을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오늘 우리 집 와서 한잔하는 거지?”
집요한 제의에 호원은 졌다는 듯 두 손을 올려 항복 표시를 했다.
“저녁때 갈게요.”
“그렇지! 그럼 오늘은 전이라도 부쳐야겠구만!”
이만 감세! 이따 보자고! 그 말만 남겨두고 심 씨 할아버지는 담금주를 끌어안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언덕을 내려갔다.
호원은 심 씨 할아버지가 언덕배기를 무사히 내려간 뒤에야 시선을 다시 아래로 돌렸다. 눈 닿는 곳은 모두 밭이었기 때문에 시야는 온통 초록색이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일은 거의 끝나 있었다. 이제 수확한 무들을 박스에 가지런하게 담아 트럭에 싣는 일이 남아 있었다.
호원에게 다행인 일은 그가 한창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절 대형 1종 면허를 따놓았다는 거였다.
시골에서는 승용차 대신 트럭이나 트랙터가 훨씬 유용하다. 만약 호원에게 1종 면허가 없었더라면 그는 털털거리는 낡은 경운기로 조금씩 상자를 옮겨야 했을 터였다.
“그럼, 마저 해볼까.”
호원은 으쌰, 하고 크게 한마디 내뱉고는 벗어두었던 장갑을 주워 다시 꼈다. 점심부터는 할 일이 있었으므로 얼른 일을 끝내야만 했다.
***
명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끝을 까딱거렸다. 퍽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에 서윤은 쥐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생글생글 웃었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으음…?”
명훈은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곱상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잘생긴 얼굴에 웃음이 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서윤은 얼굴에 괜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그, 그냥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여서요.”
“내가요?”
명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자신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듯했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더니 아, 하고 짧은 말을 내뱉었다.
“곧 그날이라 그런가?”
“그날이요?”
무슨 날? 서윤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자 명훈은 테이블로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네, 곧 있으면 약속한 날이 다 되거든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남았나?”
“중요한 약속인가 봐요?”
“그럼요.”
명훈은 좋아 죽겠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런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라, 서윤은 낯설면서도 기뻤다. 남자친구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음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맺어지는 날인걸요.”
“…네?”
설마. 아니겠지. 서윤은 머그잔을 쥐었던 손을 내려 무릎 위를 짚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주일 뒤는 아무 날도 아니었고, 그가 말하는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착각일 거야. 서윤은 그렇게 위안하며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다정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니 뭔가 이벤트라도 준비하는 게 아닐까.
“그 사람이 약속했거든요.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원하는 건 뭐든 해주겠다고.”
명훈이 설렘이 담뿍 담긴 얼굴로 덧붙였을 때, 서윤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가 말하는 ‘그 사람’은 절대로 서윤이 아니다.
“지금… 여자 친구 눈앞에서 바람피웠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속절없이 떨렸다. 서윤은 발음을 엉망으로 뱉은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분노로 몸이 덜덜 떨리고 무릎 위에 올렸던 손이 주먹 쥐어졌다.
“바람이요?”
그러나 명훈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람… 아아, 바람피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는 돌연 심각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서윤은 일단 한 대 칠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 서윤 씨, 우리 만났던 건 없던 일로 하죠.”
산뜻한 목소리였다. 괜찮죠? 라고 덧붙이는 말 역시 농담이라도 던지는 듯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서윤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네?”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멍청하게까지 들리는 얼뜬 목소리였다. 서윤은 제 입을 때려 버리고 싶다 생각하다 그냥 이대로 눈앞의 남자를 후려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막상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손을 쳐들었을 때, 그녀는 움찔했다.
유리구슬 같은 눈이었다. 아무 감정도 없이 투명한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전신을 내달리는 오싹한 감각에 비틀거렸다.
‘이 사람… 명훈 씨 맞아?’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가 아는 명훈은 항상 웃는 얼굴에,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자는 그녀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인형처럼 웃는 사람, 나는 몰라. 서연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 눈앞의 명훈은 무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것처럼 섬뜩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는 모습은 차라리 기괴해 보였다.
명훈은 그 얼굴 그대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오해하면 싫거든요. 아, 혹시 그동안 나랑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좀 성가셔지는데.”
죽여야 하나. 가볍게 덧붙이는 말이었지만 진심이라는 건 무리 없이 알 수 있었다.
진짜로 죽일 셈이야. 서연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와 동시에 다리가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런, 괜찮아요?”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떠는 그녀에게 명훈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철썩 소리가 나게 그 손을 쳐냈다.
“당신… 당신 뭐야.”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신경 쓸 여력 따윈 없었다. 서연은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소파 팔걸이를 그러쥐었다. 눈은 당장에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출구와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여명훈은 그런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음…, 하는 소리를 내뱉더니 힘 빼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뭐냐니. 그냥….”
그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 수줍게 얼굴을 붉히더니 아이처럼 해맑게 웃어 보였다.
“사랑에 빠진 평범한 남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