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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87)화 (87/101)

제87화. 단서 (3)

창밖으로는 겨울에 성큼 가까워진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은 두꺼운 겨울옷을 하나둘 꺼내 입기 시작했고, 낙엽은 고운 색깔로 물들자마자 떨어져 내렸다.

순영은 두꺼운 숄을 꺼내 어깨에 두르고 문을 열었다. 그녀의 집 겸 가게인 오두막에는 테라스에 작은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지는 낙엽을 보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건 그녀의 오랜 취미였다.

갓 내린 커피에서는 하얀 김과 향긋한 향이 함께 올라왔다.

예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온 건 뜨거운 커피가 반쯤 줄어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렸을 즈음이었다.

당분간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혹 공지를 받지 못한 손님인가 싶어 그녀는 고민했다. 만약 손님이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낼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의 오랜 직감이 상대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고 아우성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컵을 쥔 채 잠자코 기다렸다.

그 차는 절대로 느리다고는 할 수 없는 속도로 주차장에 들어왔지만, 정차한 뒤에도 엔진을 끄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순영은 그 차를 누가 끌고 왔는지 깨달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운전석이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다만 그녀는 왜 그가 바로 내리지 않는지 의아했다.

이윽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엔진은 여전히 켜진 채였다.

운전자는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순영은 자신의 앞에 우뚝 선 남자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잘 왔네, 무휼 군.”

그녀의 인사에 무휼은 대답 없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직 회복이 덜 되었는지 피부가 까칠했지만 위압적일 만큼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보기 좋았다.

그러나 시영에게 들었던 퇴원일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직 입원 중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덤덤했다. 그러나 순영이 물은 건 몸이 괜찮냐는 뜻이 아니라, 퇴원도 전에 병원에서 빠져나와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무휼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니, 분명 순영의 말뜻을 알아들었을 터였다.

‘몰래 빠져나왔군.’

순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책망하는 듯한 눈초리에 무휼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일단 들어와요.”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에서 따듯한 커피라도 대접할 셈이었다.

그러나 무휼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볼일만 끝나면 당장에라도 등을 돌려 떠날 기세였다. 순영은 다소 머쓱해진 얼굴로 도로 의자에 앉았다.

무휼에게도 의자를 권할까 했지만 그가 먼저 난간에 살짝 걸터앉았기 때문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저 난간 꽤 높아서 보통은 저기에 앉는다는 생각도 못 하는데. 다리가 긴 사람이 다르긴 다른가 보네. 순영이 그런 태평한 생각을 떠올릴 때, 무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난간 언저리에 향해 있던 순영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잔잔하게 새파란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너무 잔잔해서 오히려 오싹하게 느껴지는 눈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위에 얇게 언 얼음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뼛속까지 시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 사람의 부모님이 옛날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 선생님께 신세를 졌다고.”

무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순영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원이가 중학생 때였죠. 마땅히 맡을 만한 친척이 없어서 그 애 부모님과 인연이 있던 내가 데려와 키웠습니다.”

순영은 눈을 내리깔아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에 쥔 머그컵 안에서는 검은 액체가 자잘한 움직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처음 호원을 만났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주의 어깨띠가 헐렁해 보일 정도로 말라서는 당장 죽을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소년.

그랬던 소년이 어느덧 청년의 나이가 되고, 어엿한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소중한 사람을 만들 줄도 알게 되었다.

순영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훤칠하고 잘생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아이를 소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이니 어쩌면 호원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

‘별일 아닌 거지?’

호원이 무휼을 부탁한다며 찾아왔을 때, 순영은 물었었다. 어째선지 호원이 멀리 떠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올 때 좋아하시는 원두 사 올게요.’

같이 마셔요. 호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떠났다. 그게 순영이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순영에게 알 바 아니었다. 그저 그 아이가 돌아온다 했으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다만, 늙고 지쳐 버린 몸뚱어리 대신 그 아이를 마중 나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순영은 상념에서 깨어나 눈앞의 무휼을 바라보았다.

이때까지 도통 부탁이란 걸 안 해서 사람 무안하게 하곤 했던 아이가 굳이 찾아와 부탁할 정도로 소중한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혹여 그 아이가 길을 잘못 들더라도 올바른 길을 찾아 데려와 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순영은 쓴웃음을 짓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호원이 만약 그녀가 무휼을 자신에게 보낸 걸 알게 되면 굉장히 실망할 터였다.

“원이는… 나한테 무휼 군을 잘 부탁한다고 했어요. 자신의 일에 무휼 군을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한 거죠. 그 마음을 안다면 원이가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줄 수 없을까요?”

한동안 잠자코 있던 무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순영은 그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순영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월도는… 어떤 섬입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순영은 무휼에게서 그 섬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휼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질문들을 모두 제쳐놓고 ‘어떤’ 섬인지부터 물어보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러나 무휼의 눈을 보고 알았다. 그를 붙잡고 물을 시간은 없다는 것을.

그는 초조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와 차 한잔할 시간도 아깝게 여길 만큼.

그래서 그녀는 무휼에게 더 묻는 대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사실 모든 것이라고 해도 워낙 오래전 일이라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순영은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보았고, 자신이 아는 것을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그동안 무휼은 그녀 앞에 선 채 잠자코 순영의 말을 경청했다.

잠시 후,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무휼의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조금씩 작아지는 그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

처음으로 기억난 장면은 옆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는 호원의 얼굴이었다.

지친 것처럼 힘없이 풀 죽은 얼굴이었다. 며칠 잠을 못 잔 건지 피부도 까칠해 보였고 내려 뜬 눈 밑도 거뭇했다.

그러나 무휼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까칠한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에 놀랐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꾹 다물린 입술이나 평소와 달리 주름이 진 미간, 미묘하게 처진 눈썹 등에서 무휼은 진한 죄책감을 엿볼 수 있었다.

왜 당신이? 무엇 때문에? 무휼은 핸들을 돌리며 생각했다.

그 사람은 왜 그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방금 한 얘기, 잊어버려.’

잊어버리라 할 거면 왜 한 거야? 무휼은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비싼 만큼 빠른 차는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할 정도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지만 무휼에게는 거북이만큼이나 느리게 느껴졌다. 한계까지 액셀을 밟아도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날 새벽의 기억을 떠올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잠과 마취약에 취해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인 사람한테 제 할 말만 하고 떠나다니 비겁해. 무휼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호원을 찾아내면 일단 한 대 때릴지도 몰랐다.

그 새벽, 호원은 잔잔한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남해 쪽에 있는 작은 섬이었어. 너무 작아서 사람들도 잘 모르고, 거의 무인도나 마찬가지였지.’

그런 곳에서 애를 낳아 기르다니, 우리 부모님도 참 별종이었어. 호원은 그렇게 말하며 푸스스 웃었다. 그러나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에는 애정과 그리움이 담뿍 묻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학교도 배를 타고 2시간은 가야 했어. 덕분에 학생 때는 꽤 고생했지.’

그때는 섬에서 사는 게 지긋지긋했어. 부모님께도 엄청 대들었지. 말을 잇는 호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소곤소곤하는 것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무휼은 자꾸만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모양도 이름도 특이한 섬이었는데, 섬 정상에 작은 호수가 있었어. 그런 것치고는 사는 사람이 워낙 적어서 관광지로도 못 쓰긴 했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한 곳이었어. 생의 마지막은 이런 곳에서 조용히 보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언젠가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호원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목이 메는 듯 잠시 침묵하다 이윽고 예의 힘없는 얼굴로 웃었다.

방금 한 얘기, 잊어버려. 알겠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잊어버리긴 뭘 잊어버려. 무휼은 이를 악물었다. 비록 그 대화를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잊어버릴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병원에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는 동안, 그는 줄곧 그 섬의 이름을 찾았다. 남해는 다도해라 그중에서 작은 섬의 이름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무휼은 남해의 섬들을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리스트로만 뽑아도 몇 장이 넘어가는 섬들이 주욱 나열되었다.

그중에서도 실제 주민이 살고 있지만 도민이 적고, 외딴곳에 위치해 있으며, 작은 호수가 있는 섬.

몇 가지 후보군을 추렸을 때, 딱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삼월도(三月島)’.

섬 이름과 호원의 가게 이름이 같은 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그러나 우연치고는 공교로웠고, 다른 섬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그 섬만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병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순영에게 최종 확인을 받은 것이었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갈 목적지가 생겼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삼월도 자체가 워낙 외딴섬이라 정보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아도 북한 쪽에 있는 동명의 섬에 대한 말만 나올 뿐, 정확히 어디에 있는 섬인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긴 싸움이 되겠네. 무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터널의 불빛들이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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