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단서 (2)
진혁은 간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얹었다.
뭔가 의미가 있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공기 속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무휼은 침대에 기대앉은 채 말이 없었다. 진혁도 입을 떼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진혁은 주변을 흘긋 둘러보았다. 그가 앉은 간이 의자에는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 따듯했지만 정작 병실 안에는 그와 무휼 외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
“방금 전까지 최민호가 있었는데, 마중 나갔어요.”
무휼은 담담했다. 도저히 자신을 찌른 모자의 가족과 마주 앉은 사람 같지 않은 담담함이었다.
진혁은 그 담담함이 불편했다. 차라리 무휼이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화를 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휼은 그를 원망하지도, 그에게 욕을 퍼붓지도, 하다못해 반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깍듯한 존대가 오히려 막막한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상처는 좀 어때.”
“당장 뛰쳐나갈 수 있을 정돕니다.”
질문하기가 무섭게 답변이 돌아왔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조금의 틈도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진혁은 말문이 막혔다.
진혁이 입을 다물자 병실 안에는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안해하지 마요.”
갑작스럽게 침묵이 깨졌다. 진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휼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기대앉은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들은 말이 환각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주하고 있으면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눈이 진혁을 향했다.
“그쪽이 미안해할 일 아니니까.”
정 미안하면 그 사람 찾는 거나 좀 도와주든지.
뒤이어 따라붙은 말을 듣고 나서야 진혁은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 맞는 말이 무엇일지 그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무휼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말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그래.”
다행히 무휼은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혹시… 뭐 연락 온 거 없어요?”
물어보는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진혁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락이 왔다면, 호원이 연인인 무휼에게도 하지 않은 연락을 진혁에게 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호원을 찾을 방법이 요원한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무휼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면서도 진혁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호원은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무휼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시트 위에 놓인 손이 새하얀 시트를 구겨 잡아 주름이 지는 게 진혁의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사람을 고용해서 찾아보고 있어. 곧 소식이 올 거야.”
진혁이 말을 덧붙였다. 사람을 고용했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호원은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종적을 감춰버렸다.
진혁과 그가 고용한 탐정이 따라갈 수 있었던 호원의 마지막 행적은, 이른 새벽 병원 앞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했다는 것뿐이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당장 호원이 혼자 움직이는 데엔 무리가 없을 금액이었다.
그 사실을 말해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진혁은 이내 그만두었다. 이렇다 할 진척도 없는 상황인데 저런 말을 해봤자 답답함만 더해질 것이다.
“…그 사람을 안 지 오래됐다고 했었죠.”
무휼이 나직하게 물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진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휼의 파란 눈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 있을 줄 알았는데, 심해처럼 깊은 그 빛깔에 진혁은 새삼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 형이 아르바이트할 때부터 알았으니까…. 음… 한 8년 정도 됐겠다.”
진혁이 턱을 쓰다듬으며 햇수를 세고는 대답했다. 무휼은 작게 ‘8년….’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혹시 그때 그 사람 주변에 누구 이상한 사람 없었어요?”
이상한 사람? 진혁이 감을 잡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면 호원의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이상한 사람 아니던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격의 없는 호원은 그만큼 인기도 많았다. 개중에는 그의 다정함을 특별하게 받아들이고 오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 하나하나 신경 쓰려다간 호원은 진즉 무인도나 절간이라도 들어가 살았을 것이다.
의아해하는 진혁의 기색을 읽었는지 무휼이 설명을 추가했다,
“집 안에 침입하려 한다거나 이상한 선물을 보낸다거나 하는 사람이요.”
“그건 스토커잖아. 그런 거라면 2, 3년에 한 명씩 있었을걸?”
2, 3년에 한 명이라는 말에 무휼은 잠시 입술을 악물었다. 대체 그 사람은 사이코들이 꼬이는 체질이라도 되는 건가. 인생에 무슨 함정이 그리 많담.
그제야 시영의 과보호도, 진혁이나 순영이 매번 호원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 혼자 어딘지도 모를 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생각하니 전신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럼 호원은 후보조차 좁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토커들을 피해 떠난 것일까?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무휼의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너 같은 놈들 생각이야 뻔하다던데.’
김진수의 부름에 병원으로 갔던 날. 김진수가 그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신경 쓰지 말라 했던 그날이었다.
그때 그는 호원이 어떻게 김진수를 가게로 유인했는지, 왜 김진수는 호원을 노렸는지 물었다. 그리고 김진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히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좀… 안심하는 것 같았어.’
호원이 두려워했던 상대는 여러 명이 아니다. 스토커 같은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무휼은 그렇게 느꼈다.
단 한 명. 호원으로 하여금 6년 동안 일궈냈던 가게까지 내버리고 떠나게 만든 사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휼은 다시 시선을 진혁에게 돌렸다.
“혹시, 그 사람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친 놈도 있어요?”
그 말에 진혁은 기억을 되짚어보는 듯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벌렸다.
“…있어.”
왜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을까. 진혁은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이를 갈았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호원이 돌연 모습을 감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딱 한 번. 호원이 가게 문까지 닫아걸며 종적을 감췄던 일이 있었다. 거의 6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호원은 너무도 평소와 달랐으므로 진혁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그 자식이 또 나타난 건가?”
진혁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는 무휼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말해요.”
존대임에도 서늘한 목소리는 숫제 협박처럼 들렸다. 진혁은 무휼의 파란 눈을 마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내가 알던 권무휼이 맞나?’
일순 압도될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한참이나 어린 애송이라 생각했던 권무휼에게.
진혁은 천천히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남극의 빙하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듯한 푸른빛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았다.
스스로도 허무맹랑하다 생각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쉬이 그 파란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름이 돋은 목덜미를 문지른 진혁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퇴원은 허락할 수 없어요.”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휼은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간절한 그의 시선은 혜영에게 조금도 가 닿지 않았다.
혜영은 평소의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꿈도 꾸지 마렴.”
혜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무휼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이미 호원이 사라진 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어머니.”
“네가 이런 상황인데 도망친 사람이야. 포기하고 얌전히 치료나 받아.”
혜영은 드물게 냉랭한 목소리로 무휼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무휼이 왜 이렇게 초조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상황에 호원이 없다는 데 실망하고 있었다.
혜영은 무휼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가 의사를 향해 그만 나가보셔도 된다고 하자,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병실을 나섰다.
탁,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침묵에 잠긴 방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휼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는 그녀가 야속했다. 애절한 시선이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향했다.
“…사정이 있었다 해도요?”
“그 사정이 대체 뭔데. 너는 아니?”
줄곧 허공을 향해 있던 혜영의 시선이 처음으로 무휼을 향했다.
“어디 한번 말해보렴.”
네가 중상을 입고 누워 있는데도 훌쩍 잠적해 버린 이유 말이야. 혜영이 다그치듯 말을 덧붙였다.
“그런 사람인데 넌 그 꼴을 해서 쫓아가고 싶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걱정과 속상함이 지나쳐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혜영에게 있어 호원보다 무휼이 소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잠적한 사람을 찾겠다고 중상인 몸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은 다시 사귀면 되잖니, 무휼아.”
그녀의 말에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두 사람 사이를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몰랐던 듯했다.
혜영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피는 안 섞여도 네 어미인데.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야 뻔히 보이지.”
무휼의 파란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혜영은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그 당황한 듯한 얼굴 앞에서는 그만 입꼬리가 올라가 버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들이 귀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혜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휼의 뺨을 쓰다듬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아들. 그러니까… 무리는 절대 하지 말렴.”
참아보려 했지만 마지막 말을 하는 목소리는 속절없이 떨렸다. 혜영은 물기 어린 눈으로 무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았다. 권무휼은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바는 반드시 성취하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위험했다. 중상을 입은 상태로 뭘 하겠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무휼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의 등을 밀어줄 수가 없었다.
무휼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뺨과 닿아 있는 손바닥이 두 사람의 체온으로 녹아들 듯 따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