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단서 (1)
첫 번째 퍼즐은 의외로 시영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작은 단서라도 찾아보기 위해 무휼의 집으로 향했던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대뜸 이런 이야기부터 했다.
“혹시 호원 오빠, 방문 안쪽에 물건 두는 거 이전에도 그랬어?”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발에 차이던 곽 티슈.
무휼이 그것을 집어 제자리에 놓으려 했을 때, 호원은 그대로 두라고 했었다.
‘이건 여기 두는 거야.’
그때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곽 티슈의 원래 위치가 그곳이라는 듯이.
그러고 보면 바 ‘3월’ 위층에 있던 그의 집에서도 그런 물건이 있었다.
방문 바로 안쪽에 장애물처럼 놓여 있던 공간 박스. 그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발걸음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던 그 물건이 무휼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도 호원은 불편하지 않느냐는 무휼의 물음에 비슷하게 대답했었다.
‘그건 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좋은 거야.’
그때 당시에는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시영의 표정을 보니 뭔가 의미가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전에는 작은 공간 박스 같은 걸 뒀었어. 문 바로 앞에.”
“들어가자마자 발에 차이는 위치?”
“…그래.”
무휼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영이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씁쓸한 얼굴이었다.
“그게 대체 뭔데. 뭐 의미가 있는 거야?”
무휼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닦달했다. 시영은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그대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의미고 자시고… 내가 예전에 알려줬던 거야. 방범용으로.”
방범용이라는 말에 무휼의 미간이 구겨졌다. 시영은 간이 의자에 털썩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때 난 스토커 때문에 온갖 걸 다 하고 있었거든. 그런 식으로 방문 안쪽에 물건을 두는 것도 내 방에 누가 들어왔었는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게 해둔 거였어.”
혼자 사는 호원에게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려줬었다며, 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 무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면 공간 박스도, 곽 티슈도 딱 성인 보폭에 맞춘 자리였다. 방문을 열고 무심코 발을 내디뎠을 때 딱 닿을 위치.
호원이 여자였다면 호신 겸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납득이 갔을 것이다.
그러나 호원은 건장한 데다 제 한 몸 지킬 힘은 있는 남자였다. 애초에 처음 무휼을 주웠을 때도 자신보다 덩치가 큰 그를 단숨에 제압하지 않았나.
그런 호원이 이렇게까지 해둬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건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 호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것도 집 안까지 들어올까 걱정할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
심지어 호원은 그것이 오랜 버릇이라고 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호원은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그럼 종적을 감춘 것도 그가 두려워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무휼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영도 호원이 그런 일을 해왔다는 걸 처음 알았다 했으니, 호원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혼자 견뎌왔을 것이다.
공간 박스와 곽 티슈를 방 안에 두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휼은 그 생각만 하면 격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에게는 말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이라도 말해줬다면 지금 호원은 자신의 옆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구보다도 호원과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토록 멀다. 무휼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숙경의 일은 기어이 매스컴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숙경은 전 배구 국가대표 선수의 아내였고, 그녀 자신도 프로 테니스 선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심지어 그 아들은 주목받는 배구선수로서 활약하던 중 돌연 부상으로 은퇴하는 일이 있었다 보니 스포츠계에서도 숙경 일가에 많은 관심을 쏟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뛰어난 재능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선수를, 그것도 재계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가진 화장품 브랜드 대표의 아들을 찔렀으니 대중의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뉴스에서는 연일 관련 사건이 보도되었고, 자칭 무휼의 팬클럽 회장이라는 학생의 인터뷰까지 나오는 실정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이미 권무휼과 김진수, 정숙경의 사진이 돌아다녔다.
대부분 일주일도 못 가 삭제당했지만, 그럼에도 SNS를 통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얼굴 사진은 대중에게 고스란히 보여졌다.
기자들은 이전 김진수의 사고도 무휼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니냐며, 질투에 눈이 멀어 선수 한 명의 인생을 망치려 한 모자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내고 있었다.
“…신나서 달려드는군. 하이에나 같은 놈들.”
진욱은 자신의 회사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보여 이를 갈았다.
그는 이미 진즉 집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었지만, 숙경의 장자이자 유명 스포츠웨어 브랜드 사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온갖 기사에 끌려 나오고 있었다.
그는 신우대 배구팀에 스포츠 용품을 기증했던 일로 은근슬쩍 자신을 떠보려 했던 기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쯧, 혀를 찼다.
그러던 중, 무휼과 진수의 팀메이트 중 한 명이 두 사람 사이가 나빴었다고 증언해 사태에 기름을 부었다.
기자들은 본격적으로 무휼 대 진수의 포지션 경쟁으로 사건을 몰아갔고, 진수 일가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포지션을 얻기 위해 무휼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덕분에 숙경의 재판을 앞둔 지금도 진혁은 회사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어머니의 선처를 애원할 생각은 없었다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과 진수까지 끌어들여 더욱 커지자 진혁도 가만있기가 뭐했다.
호원을 찾는 일에만 전념해도 부족한 시간에 이렇게 발목이 잡히다니, 진혁은 눈앞의 기자들이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차라리 싹 쓸어내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답답한 마음만큼이나 깊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진동음만으로도 그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흘긋 휴대폰 화면을 쳐다본 진혁은 젠장, 하고 욕지거리를 씹었다.
그러나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그는 전화를 연결해 귀에 댔다.
“…네.”
[넌 뭐 하는 새끼야!!]
예상했던 대로 쩌렁쩌렁한 불호령이 귀를 찔렀다. 얼른 휴대폰을 떼어냈던 그는 볼륨을 줄이고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댔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한 게야!! 네 어미가 정신 못 차리면 너라도 처신을 잘했어야 할 거 아냐!]
언제부터 장자 취급을 했다고. 하여간 아쉬울 때만 찾는 이기적인 성격은 여전했다. 진혁은 거친 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어 막았다.
그러나 미처 한숨 소리를 감추지 못했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기함하는 소리가 넘어왔다.
[너 지금 아비가 말하는데 한숨이나 찍찍 내뱉은 게냐?! 이 싸가지 없는 놈! 남자 새끼 뒤꽁무니 쫓아다닐 때부터 정신 못 차리더니 기어이 가정을 파탄 내는구나!]
대체 자신이 뭘 어떻게 했다고 가정 파탄이라는 소리까지 하는지. 진혁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아버지의 억지에 고개를 저었다.
이딴 개소리에 대꾸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 이상 자신의 회사에까지 불똥이 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 지금 하시는 말씀 다 녹음하고 있습니다.”
[뭐, 뭐가 어째? 녹음하면 뭐 어쩔 건데! 네 녀석이 뭘 어찌-]
“저는 물론이고 제 회사 역시 이번 일과는 무관합니다. 계속 제가 주범이라는 식으로 인터뷰하시고 지라시 돌리시면 저도 법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말에 상대는 순간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대뜸 성부터 냈다.
[이…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아주 잘 키우셨죠. 운동 그만두겠다 하자마자 없는 사람 취급하셨으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취급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진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비서실과 연결된 수화기를 들었다. 그의 휴대폰은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진동음을 울리고 있었다.
“송 비서님.”
[네, 사장님.]
“지금 바로 내 핸드폰 새 번호로 개통해 주세요. 지금 쓰는 건 처분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충직한 비서는 곧바로 대답했다. 진혁은 그 와중에도 계속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들어 전원을 껐다.
지금까지는 혹시 호원에게서 연락이 올까 싶어 이전 번호를 유지해 둔 것이었다. 그러나 호원에게서는 연락이 올 기미가 없었고, 진혁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낚아채고는 성큼성큼 사장실을 가로질렀다. 주머니의 차 키를 꺼낸 그가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
무휼의 병원 역시 기자들로 인산인해였다. 개중에는 아예 작정을 했는지 주차장 한쪽에 텐트까지 친 기자들도 있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진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기자들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바꾼 차량번호까지는 아직 노출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짙게 선팅만 했을 뿐 평범한 중고 승용차처럼 보이는 차에 진혁이 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기자들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덕분에 수월하게 주차를 마친 그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무휼이 입원한 VIP 병실은 17층에 위치해 있었다.
직통 엘리베이터는 멈추는 일도 없이 바로 위로 올라갔다. 늘어가는 숫자 계기판을 물끄러미 보며, 그는 호원을 생각했다.
호원을 찾는 일은 이제 그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속죄였다.
진수에 이어 숙경까지 무휼에게 상해를 입혔다. 그것도 터무니없는 오해 때문에.
진혁은 차마 무휼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숙경 모자가 그런 일을 벌인 것에 진혁이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가족으로서 그는 무휼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무휼이 가장 바라는 것은 호원을 찾는 일이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진혁은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무휼의 병실 앞에는 이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얼굴인 진혁을 물끄러미 보더니 곧 누구인지 알아본 듯 경계 어린 표정으로 막아섰다.
“외부인은 출입 금지입니다.”
“…….”
진혁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진혁은 무휼에게 상해를 입힌 모자의 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이었다.
무휼의 친구도, 가족도, 하다못해 지인이라 하기도 뭐한 사람을 경호원들이 들여보내 줄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게다가 당사자인 무휼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진혁이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누굽니까?”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휼의 것이었다. 진혁은 흘긋 경호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휼이 말을 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는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김진혁이다.”
결국 진혁이 스스로 말했다. 퍽 의외의 인물이었는지 문 안쪽에서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 보기 싫겠지. 진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한쪽 손으로 왼쪽 배를 감싸 잡은 무휼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었다.
회복이 빠르다고는 들었지만, 벌써 걸을 수 있을 줄이야. 진혁은 당황스러운 상황 한가운데에서 대뜸 그 생각부터 들었다.
“들어와요.”
무휼이 그렇게 말하며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조금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