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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84)화 (84/101)

제84화. 자각

호원은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낡은 기차역에 서 있었다.

나무 벤치는 보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방치당해 여기저기 갈라지고 깨져 있었고, 그것은 역사의 벽도 마찬가지였다.

호원은 있는 힘껏 후려치면 무너질 것만 같은 역사 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보는 이 없어 마구 자라난 담쟁이덩굴이 벽을 온통 뒤덮은 덕에 벽면은 초록색과 진녹색, 노란색이 섞여 알록달록했다.

저 벽면 어딘가에 있을 옛날 낙서들을 떠올려 보려던 호원은 이윽고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그가 기억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거나, 남아 있더라도 긴 세월을 견디느라 많이 바래고 상했을 터였다.

좀 더 자주 올 걸 그랬나. 호원은 옆에 내려놓았던 짐가방을 들어 어깨에 멨다.

그의 짐은 단출했다. 조금 큰 크기의 스포츠백 하나. 그마저도 가방 안은 꽉 차지도 않았다.

목적지까지는 한나절이 넘게 걸리는 만큼, 짐이 무거우면 피곤하기만 할 거란 생각에 가볍게 꾸린 것이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버스로만 7시간이나 걸렸다. 여기서 기차로 갈아탄 다음, 가까운 항구로 나가 배를 타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 가보는 길인 데다 인터넷으로도 가는 길을 찾기 어려워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무사히 잘 가고 있는 듯했다.

호원은 곡창역이라 적힌 팻말을 흘끔 쳐다보았다. 제대로 된 간판도 아니고 숫제 나무판자에 대충 써둔 이름처럼 보였다. 그마저도 ‘곡’의 ‘ㅗ’가 지워져 구창역처럼 보였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방치되는구나. 호원은 씁쓸하게 웃고는 등을 돌려 철길을 바라보고 섰다.

무휼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문득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돌연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깨어는 났을까. 그 새벽에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마취 기운과 열 때문에 잊어버린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지도 모른다. 호원은 무휼이 모두 잊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다치는 일 없이. 자신의 불행에 말려드는 일 없이.

호원은 자갈길에 반듯하게 깔린 철도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역사 안에 사람이라고는 호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호원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딜 가든, 어디에 있든, 그 녀석은 모두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어디 한번 따라와 봐.’

호원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약속한 한 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준비를 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를 악문 호원이 이제 막 들어오는 기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6시간. 기차와 버스. 배를 갈아타며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

무휼이 입원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그건 곧 호원이 사라진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는 의미였다.

무휼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반쯤 미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틈만 나면 병원 침대를 벗어나려 했고, 제집처럼 병원을 드나드는 시영과 민호,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들켜 병실로 되돌아갔다.

하루는 진료를 보러 들어온 의사가 텅 빈 침대를 보고 놀라 병원에 비상이 걸린 적도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혜영이 무휼의 VIP 병실에 사설 경호원까지 붙이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무휼의 탈출 시도는 덩치 크고 힘도 센 데다 노련하기까지 한 베테랑 경호원들에 의해 번번이 저지당했다.

애초에 중상을 입은 몸으로 밖으로 나가 봤자였겠지만, 무휼은 도무지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호원이 사라졌는데. 왜,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만히 누워 회복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도 찾고 있어. 초조한 건 알겠는데 지금은 제발 회복에만 힘써.”

시영이 걱정하다 못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침대에 결박되다시피 한 무휼은 고개만 푹 숙일 뿐 대답이 없었다.

틈만 나면 탈주하려는 무휼 때문에 시영과 민호는 전보다도 더 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민호는 올 때마다 게임기며 만화책 등 무휼이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일 만한 것을 찾아 가져왔지만, 매번 실패했다.

나흘째 되는 날의 오후였다. 시영은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을지 모르니 무휼의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무휼과 혜영은 흔쾌히 허락했고, 시영은 가정부 아주머니와 함께 무휼의 집으로 향했다.

민호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혜영도 회사 일로 잠시 비서와 함께 휴게실로 내려간 상태였다.

한마디로, 무휼의 병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었다.

무휼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VIP 병실답게 푹신한 침대는 삐걱거리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실내화에 천천히 발을 끼워 넣고 서자 복부 쪽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올라왔다. 수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격하게 움직여 댔으니 상처는 아물 틈이 없었다.

그러나 가야만 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예감이 안 좋았다. 지금 당장 호원을 찾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무휼은 심호흡을 하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뱃가죽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내뻗은 손이 병실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문이 드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머,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는 무휼의 모습에 놀랄 법도 한데, 순영은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마치 무휼이 나가려 한 것을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

무휼은 경계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달릴까?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순영 바로 옆에서 흘끔 안을 들여다보는 경호원의 얼굴을 보고 무휼을 쯧, 하고 혀를 찼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요.”

순영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무휼을 부축했다.

“엇.”

무휼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뱉고는 민망함에 시선을 돌려 버렸다. 순영은 마치 늘 이랬던 사람처럼 무휼을 이끌어 침대에 앉혀주었다.

무휼은 얼떨떨한 마음 반, 당혹스러운 마음 반으로 순영을 올려다보았다.

“아… 음, 고맙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어요.”

순영은 방긋 웃고는 알아서 간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안에서 보틀에 담긴 주스를 꺼내더니 컵에 따라 내밀었다.

“채소 주스를 좀 갈아 왔는데, 마셔요.”

‘마실래요?’도 아니고 ‘마셔요.’였다. 반은 강요에 가까운 말이었고, 내민 손이 단호해 거절하기도 뭐했다.

결국 무휼은 순영이 내민 채소 주스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넘겼다. 그러면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흘긋 곁눈질했다.

순영은 무휼이 눈을 뜬 날 이후 병실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시영을 통해 환자에게 좋다는 즙이며 선물을 가끔 들려 보냈지만 직접 방문한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무휼은 그녀를 만나면 물어볼 게 많았다.

호원이 사라진 걸 알고도 침착했던 이유가 뭔지. 호원이 떠난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지. 호원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는지.

물어볼 사람이 없어 머릿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질문이었다.

무휼은 볼일 급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시선만 굴렸다. 새파란 시선이 병실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맛은 어때요? 너무 쓸까 싶어서 사과도 좀 넣어봤는데.”

“…맛있네요.”

무휼은 사실 맛이고 뭐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애써 대답했다. 순영은 남은 주스를 보틀째로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떠나기 전에… 원이가 이곳에 들렀었나요?”

뜻밖에도 질문은 순영의 입을 통해 먼저 나왔다.

무휼은 허를 찔린 기분으로 순영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담담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휼은 들고 있던 컵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주홍색의 채소 주스는 반 이상 남아 있었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마취 때문에 흐릿하지만… 분명 그날 새벽에 만났었습니다.”

“…그렇군요.”

순영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리송한 말에 무휼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그 사람이 갈 만한 곳이라든가-”

“무휼 군.”

순영이 그의 말을 뚝 잘랐다. 무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호원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부드러운 시선이 무휼을 훑었다. 그 시선은 봄볕처럼 따스한 애정과 딱 그만큼의 우려가 함께 어려 있었다.

“무휼 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원이가 내 집으로 찾아왔었습니다.”

순영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호원이 그녀를 찾아갔었다는 말에 무휼의 시선이 허공을 내리그었다.

머릿속에 호원과 함께 갔던 그녀의 산장이 떠올랐다. 수풀이 우거진 숲속에 동화 속 과자집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작은 집. 호원은 그곳이 소중한 곳이라고 말했었다.

‘그냥, 너랑 와보고 싶었어. 나한테 소중한 분과 소중한 장소를 소개해 주고 싶었거든.’

‘너도 이젠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무휼은 그 말을 하던 호원의 옆얼굴을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창문 모양으로 각진 햇볕이 드리운 반듯한 얼굴과 쑥스럽다는 듯 살짝 올라가던 입꼬리. 능청스럽게 건넸던 진심과 장난스러운 입맞춤.

절대 잊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날의 기억이 무휼을 괴롭혔다.

무휼이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빠져 헐떡거리는 동안 순영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현실로 돌아온 무휼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권한 강사 자리였으니 넋두리라도 하러 온 건가 싶었죠.”

순영 역시 과거의 어느 한 곳을 헤매는 듯 목소리가 공허했다. 그녀는 목이 메는 듯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 애는… 원이는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휼 군을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어째서….”

무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순영은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습기를 머금고 있어 시야가 흔들렸지만 순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이는 꼭 이런 일이 생길 걸 아는 사람 같았어요. 그 대상은 자신일 거라 생각한 것 같지만요.”

“…….”

무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순영을 찾아갔던 걸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말한 걸까. 무휼의 머릿속이 마구 뒤엉켰다.

“원이와 새벽에 만났었다고 했죠?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진 않던가요?”

순영의 말에 무휼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마취의 여파로 정신이 흐릿했던 때라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혼란스러운 무휼의 표정을 보고 그것을 눈치챘는지, 순영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가 작정을 하고 사라진 거라면 아마 저희 힘으로는 찾기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무휼 군을 찾아왔다니… 그 애는 무휼 군이 찾아주길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순영의 말에 무휼은 울컥 올라오는 자기혐오와 서러움을 꾹 내리눌러야 했다. 꽉 쥔 그의 주먹 위로 순영의 손이 내려앉았다.

“지금은 일단 회복에 전념해 줘요. 원이를 찾는 것도 본인 몸이 건강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차분하게 토닥토닥 다독이는 손길이 절망스러울 만치 따듯했다.

하필 이럴 때 병원 신세라니. 무휼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께를 향했다. 붕대에 감긴 상처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무휼의 파란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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