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83)화 (83/101)

제83화. 부재

무휼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병실 안은 사람들의 기척과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음료수를 꺼낸다느니 과일을 깎겠다느니 부산스럽게 굴었고, 그걸 또 다른 누군가가 말리는 듯했다. 다른 쪽에서는 그런 두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며 타박을 주었다.

과일이고 뭐고 됐으니 다들 조용히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무휼은 마침 타박을 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취가 깬 머리는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처럼 지끈거렸고, 그 고통마저 아무렇지 않아질 만큼 배와 옆구리가 타는 것처럼 아팠다.

자상을 입는 건 두 번째였지만, 이 정도로 중상을 입은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의 배 위에서 장작이라도 태우는 것만 같았다.

“어, 권무휼 깼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무휼은 반가움보다도 짜증을 먼저 느꼈다.

저 시끄러운 게 왜 여기 와 있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옆을 쳐다보자 빙글빙글 웃는 얄미운 얼굴이 보였다.

“야아, 내 생애 우리 과 놈이 칼빵 맞는 것도 보네. 대단하다, 권무휼,”

학과장 선배는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선배!!’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최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애가 중상 입고 드러누워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왜 안 나와? 이 자식 이거 독해 가지고 금방 자리 털고 일어날걸?”

그보다는 이 상황을 학교에 설명하느라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던 내 걱정이나 좀 해줘라. 학과장은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병문안도 빈손으로 왔어요?”

“내 손은 연약해서 숟가락보다 무거운 건 못 드는걸.”

학과장은 영화 속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눈을 깜빡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무휼을 돌아보았다.

“뭐 어쨌든, 학교 쪽에는 잘 말해놨으니까 넌 회복에나 전념해라. 체대 자존심이 있지, 금방 회복 못 하면 죽을 줄 알아.”

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병실을 나서는 와중에도 야무지게 주스병 하나를 챙겨 나가는 모습에 최민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보였다.

“너희 학과장이란 친구, 되게 매력 있다.”

그렇게 말을 건 것은 반대편에 앉아 있던 시영이었다. 그녀는 무휼이 아니라 본인이 환자라도 된 듯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학과장의 기행 덕분인지 희미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시영을 보는 무휼의 시야 한쪽에 걸리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시영 옆에 앉아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중년의 여인. 이미 한 번 만났던 인물이었다.

“몸은 좀 어떠니?”

순영이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물었다. 햇볕에 말려 뽀송뽀송한 이불에 폭 감긴 듯 포근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무휼이 제일 처음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건조해 잔뜩 갈라진 목에서는 꺼끌한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대충 알아들은 듯했다.

그제야 무휼이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환자라는 걸 인지했는지, 시영과 민호는 잠시 머쓱한 시선을 교환했다.

“상체 일으켜 줄게.”

“여기, 물.”

민호가 얼른 침대 등받이를 세웠고, 시영이 물병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상체가 조금 세워져 시야가 넓어지니 이 자리에 한 사람이 없다는 데 퍼뜩 생각이 스쳤다.

무휼은 민호가 내민 물병을 받아 들기만 하고 병실 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걸까?

“호원 오빠라면 여기 없어.”

그의 시선이 무엇을 좇는지 눈치챈 시영이 대답했다. 무휼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여기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스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시영이 어깨를 흠칫하자 무휼은 조금 미안해졌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도 호원의 행방이 더 중요했다.

시영은 무휼의 사나운 기세에 눌린 건지 조금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그게… 오늘 아침부터 연락이 안 돼.”

“…뭐?”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무휼은 일순 자신의 귀나 머리가 잘못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연락이 안 된다니? 왜?

“어떻게 된 거야.”

무휼은 숫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늘하리만치 거친 목소리에 병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듯했다.

시영은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휼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피로해 보이던 시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람 같지 않게 단정한 얼굴에서 번뜩이는 이질적인 푸른 눈동자는 그 박력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시영 씨 닦아세우지 마. 다들 답답한 건 똑같으니까.”

그때, 문가 쪽에서 지친 듯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무휼의 눈이 목소리를 따라 스르륵 이동했다.

진혁이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푸석한 얼굴이었다.

“몸은… 어때.”

진혁이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억양으로 물었다. 그러나 무휼은 호원과 연락이 안 된다는 마당에 자신의 상처 따위나 들먹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내 몸 따위가 아니잖아.”

씹어 뱉듯 내뱉은 말에 진혁이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눈을 내리까는 그의 모습에 답답해진 무휼이 진혁을 닦달했다.

“연락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진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무휼에게 말을 해줘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숨기는 게 능사가 아니라 판단했는지, 아니면 살기가 번뜩이는 무휼의 눈빛에 기가 질린 건지 한숨과 함께 대답을 내놓았다.

“…말 그대로야. 아침부터 휴대폰은 꺼져 있고 집으로 돌아간 흔적도 없어.”

무휼은 일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을 번뜩이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호원은 무휼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으로 돌아갈 거라면….

“너희 집에 전화해 봤는데, 호원 형이 집에 왔다 간 흔적도 없었대.”

실낱같던 희망은 최민호의 말에 짓밟혀 사라졌다.

민호는 무휼의 집을 꽤 자주 드나드는 터라 가정부 아주머니의 번호를 알고 있었다. 무휼에게 일이 생기자마자 민호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연락했다.

아주머니는 그길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왔고, 지금은 잠시 무휼의 옷을 챙기러 집에 돌아간 것이었다.

“가게는… 지금 건물 허무느라 들어갈 수도 없어.”

시영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휼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스크린처럼 새하얀 머릿속에 몇 가지 단어만 둥둥 떠다녔다.

집에 없다. 가게에도 없다. 그럼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무휼은 초조함을 느꼈다. 지금 당장 호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잠시 용건이 있어 자리를 비웠는데 우연찮게 휴대폰이 고장 났다거나 하는 가정은 애초부터 떠올리지 않았다. 그가 아는 호원은 어떻게든 주변 사람에게 연락을 남겼을 사람이니까.

호원은 주변 사람이 진심으로 걱정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돌연 자취를 감췄다.

자상을 입은 배의 고통보다도 전신에 엄습하는 불안감이 더 컸다. 지금 당장 호원을 찾아 품에 안아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도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까 넌 좀 쉬어.”

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녀는 덧붙였지만, 그건 무휼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거는 자기암시처럼 보였다.

“쉬라고?”

이 상황에? 뒷말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살기등등한 무휼의 얼굴은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를 뛰쳐나가 호원을 찾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쉬렴.”

그렇게 말한 것은 시종일관 조용히 앉아 사태를 지켜보던 순영이었다. 병실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순영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다정한 눈으로 무휼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쉬어져도 쉬려무나.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는 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러고는 환자가 쉬게 두자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시영과 민호, 진혁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켜 병실을 벗어났다.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서며, 순영은 무휼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뭔가 아는 게 있는 듯한 말이었다. 무휼은 당장 그녀의 옷깃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미 병실 문은 닫힌 뒤였다.

홀로 남은 병실에서 무휼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 안에 맴돌아 가뜩이나 울렁거리는 속을 뒤집어 놓았다.

문득, 현관문 앞에서 봤던 호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축제 첫째 날 밤이었다. 노출이 많은 무휼의 의상에 호원이 질투하고, 그대로 손을 잡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날.

그날 호원은 노란 현관등 빛 아래에서 말했었다.

‘만약 내가….’

그때 호원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대체 무슨 말이기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무휼은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무슨 일이냐고, 제발 말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호원은 이곳에 없다. 그 사실은 통증이 되어 무휼의 몸과 마음에 사무쳤다.

***

병실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각자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진혁은 숙경이 있는 경찰서로 돌아가기로 했고, 민호와 시영, 순영은 보호자가 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한 것이다.

시영은 병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조차 희미할 정도였으나 이번에도 호원은 받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적인 음성이 넘어오자 시영은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대체 왜 안 받는 거야. 초조한 중얼거림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시영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머릿속으로는 호원이 갈 만한 곳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순영의 가게였지만, 정작 순영은 자신의 옆에 있었다.

“…설마 저번에 말한 일 때문은 아니겠지.”

위험할 수도 있다던 호원의 말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음성으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냐, 아닐 거야. 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놀란 말처럼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했다.

그때, 바로 옆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십 대 정도 되었을까. 우아한 분위기의 여인이 복도 끝에 나타났다.

그녀는 시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동시에 시영은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듯 거뭇한 눈 밑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무휼의 어머니라고.

“여기가 혹시….”

급하게 달려오느라 숨이 찼는지 여인은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시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방금 정신을 차렸어요.”

시영의 말에 여인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물기 어린 눈이 병실 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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