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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78)화 (78/101)

제78화. 올가미 (1)

아쉽게도 혜영과 호원의 대화는 그날로 끝이었다. 축제를 구경한 바로 다음 날, 그녀는 미국 지사에 급한 볼일이 생겼다며 비행기를 타야 했다.

아침 일찍 출국해야 했지만 호원은 자기 일을 오후로 미루면서까지 그녀를 배웅하겠다고 나섰다. 혜영은 진심으로 기꺼워하며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무휼은 어쩐지 한층 친밀해진 듯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가볼게요.”

혜영은 공항에 막 들어서는 입구 앞에서 비서에게 캐리어를 맡기며 말했다.

비서가 짐 수속을 위해 먼저 공항 안으로 들어간 사이, 그녀는 무휼과 호원을 차례로 끌어안아 주었다.

“호원 씨.”

무심코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던 호원은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혜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호원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어제 무휼이가 오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고 했었죠. 그날 일 때문인지, 저 애는 주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탓이라 여기는 모양이에요.”

그녀는 천천히 말을 맺으며 몸을 떼어냈다.

“우리 무휼이 잘 부탁해요.”

호원은 잔잔한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혜영의 눈동자는 부드러운 갈색빛이 호원과 닮아 있었다.

호원은 그 올곧은 눈을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저 다정한 빛을 담은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말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일순 모두 다 말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것은 고형 꿀을 한입 가득 머금은 것처럼 너무도 달콤한 충동이었다.

저 고목같이 굳건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면 모든 걸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원은 아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고마워요.”

혜영은 밝게 웃어 보이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공항으로 들어서는 걸음걸이가 유독 가볍고 당당했다.

그 모습을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호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옆쪽으로 돌아갔다.

무휼은 담담한 얼굴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워?”

호원이 슬쩍 무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휼은 호원은 흘긋 돌아보더니 머쓱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가는 길은 내가 운전할게.”

“쑥스러워하긴.”

시끄러워. 불퉁하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호원은 키득키득 웃었다.

***

“대표님, 여기 커피요.”

패드를 보고 있던 혜영은 비서의 말이 들리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제대로 잡았다 생각했던 커피잔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퍽!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떨어지며 안에 있던 얼음이 와르륵 쏟아져 커피와 함께 바닥을 적셨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어머, 어떡해….”

비서가 가방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 마구 뽑아내며 말끝을 흐렸다. 혜영은 황망한 얼굴로 커피 물이 서서히 번져가는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빛깔의 플랫슈즈에 검은색 얼룩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무휼의 눈동자 색을 닮아 좋아하던 신발이었다. 언젠가 무휼이 잘 어울린다고 해준 이후 아껴가며 신었던 것인데….

“어쩌죠, 대표님? 이거 안 질 것 같은데….”

휴지로 구두를 벅벅 닦아내던 비서가 울상을 지었다.

혜영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저어 보이고는 갈아신을 신발을 한 켤레 사와 달라 부탁했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면세점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홀로 남은 혜영은 바닥에 남은 커피 얼룩과 그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확 치밀어올랐다.

“…욱!”

혜영은 헛구역질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속이 울렁거리며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대체 뭐지? 혜영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꽉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이 떨리고 등허리로 소름이 쭈뼛 솟았다.

그녀는 무휼을 떠올렸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전신을 강타하며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점심을 먹은 호원과 무휼은 학교로 가기 전 잠시 집에 들렀다. 호원이 짐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축제 마지막 날인 만큼 호원이 챙길 게 많았다. 짐을 챙기던 호원은 그사이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발신자는 시영이었다. 평소라면 퍽 반가운 전화였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한 건도 아니고 연달아 10통이 넘게 전화를 건 데서 용건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커피를 사 오겠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온 호원은 대문을 나서자마자 또다시 울리는 진동에 헛웃음을 뱉었다. 하여간 은근히 집요한 면이 있다니까.

“응, 시영아.”

[…드디어 받네.]

수화기 너머의 수영은 조금 안심한 듯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상상했는지는 몰라도 그게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것 같아 호원은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걱정했어?”

[그럼 안 했겠어?]

되받아치는 목소리는 시영답지 않게 잔뜩 갈라져 뾰족했다.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목소리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오늘 ‘클로버’ 오너한테서 얘기 들었어. 그쪽 치프 바텐더로 날 추천했다며.]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오싹했다. 차라리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게 덜 무섭겠다 싶었다.

얘는 연기를 했어도 잘했겠다. 스릴러 전문 배우 같은 거. 호원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수화기 너머에서 발끈한 듯한 시영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감정이 격해져서인지 한 톤 높아진 목소리를 들으며 호원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시영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클로버 오너면 순영 선생님과도 오랜 친우분이시고, 실력도 알아주시는 분이니까….”

[내가 지금 왜 전화했는지 모르겠어?]

시영이 단칼에 그의 목소리를 끊었다. 호원은 가파르게 올라가며 비명처럼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업자분한테 연락해 보니 가게 공사 안 하기로 했다며! 그렇다고 가게 이전한다는 말도 없고, 나랑 애들한테는 다른 데 일자리나 주선하고!!]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물기가 어렸다. 하, 하고 시영이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욕지거리를 씹는 듯도 했다.

[어쩌려고 그래. 이대로 가게 문 닫을 거야?]

“…시영아.”

호원이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영에게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호원은 다시 한번 시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부르겠다 작정한 사람 같았다.

[…말해.]

결국 백기를 든 듯, 시영은 한층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도 훌쩍거리는 소리는 숨기기 어려웠다.

‘진짜 못난 짓 많이 하네, 나.’

호원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쳐다보았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괜히 발끝으로 툭툭 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너랑 나랑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됐더라?”

물어보는 말이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정답을 떠올리고 있었다. 5년 전, 호원이 습관적인 불면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게 벌써 5년이 되었구나. 호원은 새삼 아득한 시간에 짓눌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던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입 안에 날카로운 것을 가득 물고 말하는 것처럼 한 음절마다 가슴께가 찌르는 듯이 아팠다.

“할 일이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나한테도 못 할 말이야? 시영은 이젠 울음기를 숨길 여유도 없는지 억눌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원은 울상을 짓는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 선명했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죄어드는 듯했다.

그런 얼굴을 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입맛이 썼다. 호원은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가느다랗고 하얀 원기둥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가게는 당분간 안 열 거야. 클로버 오너한테 네 얘길 했더니 당연히 환영이라면서 좋아하시더라. 역시 내가 잘 키웠지.”

웃으며 밝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처졌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시영은 말을 고르는 것인지 숨을 고르는 것인지 긴 시간 동안 말이 없었다.

전화를 끊을 법도 한데, 호원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시영이 곧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위험한… 일이야?]

아니야. 선뜻 대답하려 했는데, 말이 혀끝에 걸린 것처럼 우뚝 멈춰 버렸다.

이래서 거짓말도 하던 사람이 해야 잘하는 거다. 호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털어놓았다.

“어쩌면.”

수화기 너머에서 헉,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영은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권무휼 걔는… 걔도 얽힌 일이야?]

“아니.”

이것만큼은 거짓말을 할 필요도, 말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호원은 결연한 표정 그대로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절대로 말려들게 하지 않아.”

[…….]

이만 끊어야겠다. 호원은 부러 밝은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기다리다 지친 무휼이 나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오빠.]

그때, 시영이 그를 불렀다. 지금까지의 떨리던 목소리와는 달리 단호하고 명료한 목소리였다.

[‘클로버’에는 안 가. 난 클로버가 아니라 바 ‘3월’의 바텐더니까. 그러니까….]

말끝이 흐려졌다. 호흡을 고르는 듯 잠시 심호흡을 한 시영이 이윽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3월’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릴게.]

“…….”

호원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다물어졌다. 가슴 가득 말랑한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하더라. 그냥 감동받았다거나 고맙다는 말 따위로는 표현이 불가했다.

시야가 갑자기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촉촉해진 눈시울을 소매로 닦아내는 호원의 귓가로 시영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혼자서 너무 무리하진 마.]

연락 기다릴게요, 오너. 그 말을 끝으로 시영은 전화를 끊었다.

호원은 통화 종료라는 글자가 떠 있는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뭔가가 몸 안쪽에서부터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주먹을 쥔 그는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이야.’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막상 떠올리고 나니 왜 이제껏 몰랐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는데.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고 숨이 막혀 헐떡거리며 벽에 기대야 했다.

복도 끝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끝났다고 여겼는데, 그건 호원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불행은 인생의 외길에서 뚜껑 없는 맨홀처럼 잠복해 있다 불시의 순간 사람을 집어삼킨다. 호원에게 있어 불행은 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호원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바 ‘3월’을 집어삼킨 불꽃은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남자는 호원의 곁을 맴돌며 다음 먹이를 찾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호원은 담벼락에 기대 있던 몸을 떼어내고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높다란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듬뿍 받는 저택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굳건한 고목 같은 어머니와 푸른 눈의 다정한 아들이 사는 집. 그는 이 집만은 언제나 이 평화로운 그대로 남아 있길 바랐다.

비록 그 평화 속에 자신의 자리가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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