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Hunting instinct (9)
“그러니까… 그쪽이 말로만 듣던 호원 씨?”
무휼의 어머니, 혜영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맞은편의 호원을 건너다보았다.
마치 부모님 몰래 위험한 곳에 놀러 갔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침울한 얼굴로 테이블 구석을 쳐다보던 호원이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네. 이호원이라고 합니다.”
저도 모르게 생침을 꿀꺽 삼킨 호원이 혜영의 눈치를 보았다. 혜영은 꼭 호원의 나이라도 짐작해 보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머니께 대충 얘기는 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미남이네요.”
“…네?”
뜻밖의 말에 호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혜영은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이 먹어서 주책이죠? 내가 우리 아들 친구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들떴나 봐.”
혜영은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듣자니 우리 애가 신세를 많이 진 것 같던데. 여기 온 것도 가게에 큰일이 나서라면서요? 얼마든지 있어도 좋으니 편하게 푹 쉬다 가요.”
아예 몇 년 있어도 좋고요. 혜영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말투로 말하며 웃었다. 발랄해 보이는 단발과 잘 어울리는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호원에게는 나이를 먹었니 뭐니 했지만 혜영은 척 보기에 무휼만 한 아들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아마 무휼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40대 정도로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호원은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 방도 많은데 좀 오래 있다 가면 어때?”
그때 무휼이 주방에서 불퉁한 얼굴로 등장했다. 커다란 손에는 과일 접시가 들려 있었다.
혜영은 무휼이 과일을 깎아주는 게 퍽 익숙한 듯 그가 내려놓는 접시에서 포크에 꽂힌 메론을 집어 호원에게 건넸다.
“자, 호원 씨. 많이 들어요.”
호원은 감사 인사를 하며 포크를 받아 들었다. 과일 접시에는 사과며 멜론 등의 과일이 이것저것 예쁘게 깎여 있었다.
손재주 좋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호원은 진즉 알았으면 가게에서 일할 때 시켜보는 거였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것은 혜영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놀란 얼굴로 접시를 내려다보다 무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들, 과일 깎는 센스가 옛날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데? 이런 건 어디서 배웠니?”
“이쪽.”
무휼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옆에 앉은 호원을 까딱 고갯짓했다. 졸지에 주목을 받은 호원은 입에 포크를 문 채로 굳어버렸다.
바보 같은 권무휼. 그렇게 말하면 나보고 뭘 어쩌라고. 호원은 무휼을 원망하며 그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접시 가장자리에 포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무휼이가 어머님을 닮아서 인기가 많았나 봐요. 가게에서도 일을 잘해줘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손님들도 좋아해 주시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제가 손재주가 없어서 얘가 집안일도 많이 도와줬었거든요.”
혜영은 미안한 일이라며 애정 어린 눈으로 무휼을 한 번 쳐다보더니 돌연 눈을 가늘게 뜨고 샐쭉하게 말했다.
“근데 너는 아는 형 가게에서 숙식하면서 아르바이트한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어쩜 연락이 그렇게 안 되니?”
“해외에서 일하는 어머니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죠.”
무휼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호원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혜영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무휼이 왜 바 ‘3월’에서 머물게 되었는지, 최근에 병원에 간 일은 무슨 일이었는지 모두 알고 있을까?
호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무휼의 옆구리 쪽을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휼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혜영이 너무 놀라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고민 끝에 호원은 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갈색의 눈동자가 혜영을 향했다.
“저… 어머님.”
“아,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두 사람을 잡아두고! 많이 피곤할 텐데 얼른 올라가 쉬어요.”
혜영이 별안간 작게 박수를 짝 치더니 호원의 말을 끊었다. 어렵게 입술을 떼었던 호원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혜영에게 등을 떠밀렸다.
“저도 한동안 휴가니까 내일 아침은 같이 먹도록 해요.”
부드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호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영의 기세에 못 이겨 계단 층계를 오르던 호원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어머님만 괜찮으시다면 내일은 함께 축제 구경을 할까요? 내일은 저도 시간을 낼 수 있으니 허락해 주신다면 안내해 드리고 싶어서요.”
조심스러운 권유였다. 혜영은 호원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호원이 역시 부담스러울까 싶어 권유를 철회하려는데, 혜영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나야 영광이죠. 잘 부탁해요.”
그러고는 내일 입을 옷을 골라놔야겠다며 호들갑스럽게 등을 돌렸다. 잘 자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1층의 안방으로 사라졌다.
우아한 실내복 끝자락이 나풀나풀 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까지 지켜본 호원이 그제야 계단에 다시 발을 디뎠다.
“…괜찮겠어?”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호원의 바로 뒤, 계단 한 칸 아래에 선 무휼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호원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시선 끝에 잡히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눈빛인가 싶었다.
“뭐가?”
싱글싱글 웃으며 되묻자 무휼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피곤한 하루였지?”
그의 말을 잽싸게 끊으며 호원이 말했다. 무휼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잔잔하게 웃음기를 머금은 갈색 눈을 한동안 마주하더니, 옅은 한숨과 함께 웃었다.
“그러네.”
“들어가서 쉬어.”
내일도 바쁠 거잖아. 호원이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그 말이 꼭 달콤한 밀어라도 된 양 나긋하게 들려서 무휼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럼, 내일 봐.”
그래서 그는 호원이 인사와 함께 등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깃털에 발끝부터 푹 잠긴 것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어도 되는 걸까.
혹시 분에 넘치는 경험을 한다고 벌을 받는 건 아닐까. 그에 생각이 미치자 무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 자신에게 벌이 내린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휼의 시선이 굳게 닫힌 호원의 방문으로 향했다.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그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렸다.
늦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얼굴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피곤한 사람을 더 붙잡아두기엔 미안할 만큼.
***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 가볍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거실에 둘러앉았다.
호원은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앉아 차를 마시는 혜영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몇 편인지도 모를 일상 예능을 틀어두고 차를 마시며 한담이나 하고 있으려니, 처음 그녀를 마주하고 긴장했던 마음도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듯했다.
“그럼 어머니는 오후에나 시간이 되겠네요.”
커다란 덩치를 한껏 구긴 채 드라마 속 조신한 부인처럼 다소곳하게 사과를 깎던 무휼이 툭 내뱉었다. 혜영은 그가 깎은 사과를 하나 쏙 집어 가며 호원을 향해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갑자기 미팅이 잡혀 버려서. 같이 축제 구경하기로 했는데 어쩌죠?”
“전시나 공연 같은 건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니까 괜찮을 거예요. 구경하다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이라도 먹을까요?”
“그래도 되면 나야 좋은데….”
혜영은 말끝을 흐리며 무휼을 흘긋 쳐다보았다.
“쟤가 아까부터 뚱해 있는 게, 뭔가 저한테 보이면 안 되는 게 학교에 있나 봐요?”
그녀는 비밀 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호원에게 몸을 숙여 속닥거렸지만, 워낙 가구가 크고 넓은 덕에 크게 소용은 없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무휼이 즉답했지만 퉁명스러운 표정과 어울리는 불퉁한 목소리 덕에 신빙성은 굉장히 떨어졌다.
호원은 무휼이 왜 그녀를 축제에 부르지 않으려 하는지 대충 감을 잡고는 씩 웃었다.
“뭐,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그러기야?”
무휼이 샐쭉하게 눈을 흘기며 호원을 쳐다보았다. 호원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소파 등받이에 걸쳐둔 겉옷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학교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최대한 빨리 미팅 끝내고 달려갈게요.”
호원은 혜영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크게 웃고는 집을 나섰다. 그의 곁으로 운동복을 입은 무휼이 뒤따라 섰다.
“넌 오늘은 훈련?”
“축제 기간이라 오후에 잠깐만.”
호원이 뒤를 돌아보며 묻는 말에 무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할 말이라도 있는 듯 호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호원이 묻자 무휼은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정처 없이 바닥과 허공을 오가다 이윽고 호원을 향했다.
“…어머니 불편하지 않아?”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단순히 어색한 사이라 불편하지 않냐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지금 세 사람을 둘러싼 관계는 매우 복잡했고,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호원은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혜영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호원은 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욕을 하며 호원의 짐을 집 밖으로 던져 버린대도 겸허히 받아들일 셈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네 어머니잖아.”
어떻게 불편할 수 있겠어. 뒷말을 이으며 호원이 말갛게 웃었다.
“…….”
무휼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뭔가 말을 할 것처럼 달싹거리던 입술은 이윽고 지그시 다물리며 호선을 그렸다.
긴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호원은 그림자가 질 것 같은 그 풍성한 속눈썹 아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맑은 날의 호수처럼 잔잔한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무휼은 꼭 이 순간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려는 사람 같았다. 천천히 감겼다 떠지는 눈꺼풀이 경건하게까지 느껴져서, 호원은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기다려야 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무휼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무휼은 숨 쉬기가 버거운 사람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켜더니 미소와 함께 내뱉었다.
“…고마워.”
그 얼굴이 어쩐지 서글퍼 보여서 호원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