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Hunting instinct (8)
“…뭐?”
호원은 정곡을 찔려 당황한 건지 단순히 황당해하는지 모를 얼굴로 되물었다. 그 얼굴을 보니 무휼은 자신이 헛짚었나 싶어 멈칫했다.
“내가 이런 옷 입었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물어보는 목소리는 무휼 자신이 느끼기에도 매가리가 없게 들렸다.
아니지, 내가 왜 주눅 들어야 해? 뭘 잘못했다고? 무휼은 눈에 힘을 주고 호원을 쳐다보았다. 호원이 어떤 대답을 하든 그는 잃어버린 주도권을 되찾아올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호원은 그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대답으로 무휼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연한 거 아냐?”
그 얼굴은 마치 한심한 질문을 들은 까다로운 선생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화가 난 듯도 하고 한심해하는 듯도 했다.
당연해? 뭐가? 무휼은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을 깜빡거렸다. 하루 종일 학과장과 싸우고 홍보 멘트를 외느라 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호원은 달싹거리는 그 입술을 가만 쳐다보더니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몸이 좋다지만 그래도 애인 있는 애한테 이런 걸 입히냐고. 그리고 넌 그걸 또 입었어? 나한테는 상의 한마디 없이? 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안주머니에서 튜브형의 작은 크림을 꺼내 새끼손가락에 짰다. 색깔이 살짝 노란 걸 보니 호원이 들고 다니면서 종종 바르던 립밤인 거 같았다.
“이런 옷 입고 하루 종일 다른 사람한테 보였을 거 생각하면 화나는데, 억지로 참고 있는 거야. 애인이 반쯤 벗고 다니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어.”
멍하니 벌어진 마른 입술에 따듯한 손가락이 닿았다. 무휼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 상태에서도 얇은 살갗 위에서는 호원의 손가락이 꾸덕꾸덕한 질감의 크림을 살살 펴 바르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무휼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이 사람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거지? 내가 지금 꿈꾸나?
어쩌면 오늘 저녁 학회장에게 너무 시달린 데다 호원을 보고 싶은 마음이 겹쳐져 환각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휼이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데, 호원이 그의 입술에서 새끼손가락을 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앞으로 이런 옷 입을 거면, 내 앞에서만 입어.”
알겠어? 다그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평소의 무휼이라면 그 와중에도 ‘입지 마’가 아니라 ‘내 앞에서만 입어’인 데서 호원이 자신의 차림새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무휼에게는 그 차이를 구별할 정신도 없었다.
“와, 진짜 당신….”
얼떨떨한 목소리로 뱉은 말은 그것이 다였다. 몸이 먼저 움직인 탓에 더 말을 이을 여유가 없었다.
무휼은 호원을 덥석 끌어안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찬 바람에 싸늘하게 식은 호원의 외투가 누더기 사이의 맨살에 닿자 등허리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니, 소름이 돋은 건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무휼은 생각했다.
당장 이대로 둘러메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 무휼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자꾸만 호원을 들어 올리려 힘이 들어가는 팔을 억눌러야 했다.
호원은 그가 갑자기 달려들었는데도 놀라지도 않았는지 태연하게 무휼의 등에 팔을 둘러 토닥거렸다. 찬 공기와 뒤섞여 미지근한 숨결이 무휼의 뒷덜미에 흩뿌려졌다.
호원에게서는 늘 시럽처럼 달콤한 향이 났다. 하얗고 얇은 피부 아래로 꿀이라도 흐르는 게 아닐까 싶게 단 향이었다.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무휼이 중얼거렸다.
“…선배한테 감사해야겠네.”
“뭐?”
호원이 무슨 말이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만 들리는 상황인데도 어처구니없어하는 게 뻔히 드러났다.
무휼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호원의 몸을 더 당겨 안았다.
“당신이 이렇게 질투해 주잖아.”
“…좋아할 일 아닌데.”
“좋은 걸 어떡해.”
큭큭 웃는 소리에 호원이 무휼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아프잖아.”
전혀 아프지도 않으면서, 무휼은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호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호원이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보라지 뭐. 아, 이 옷 입은 김에 인증샷이라도 찍어달라 할까?”
대담한 말에 호원이 낮게 웃었다. 그의 몸이 작게 진동하며 울리는 것이 맞닿은 몸을 통해 느껴졌다.
“주인님.”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 자신의 욕망처럼 끈적하게 새어 나왔다. 허리에 감긴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허리선을 따라 내려가더니 호원이 입은 재킷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야.”
“알아.”
호원이 제지하듯 부르는 소리에 무휼이 손을 멈췄다.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무휼도 두 사람이 있는 곳이 학교 안인 데다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쯤은 하고 있었다.
“…집으로 갈까?”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집안일을 봐주시는 김 여사님은 어제 들렀다 가셨으니 며칠은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돌아가면 그 커다란 집에는 호원과 무휼 단둘뿐이었다.
요 근래 무휼의 집에서 생활하는 데 익숙해진 호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
호원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무휼의 등을 감은 팔에 힘을 줘 끌어당기는 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저녁의 찬 공기에 잠시 식었던 몸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호원의 차가 주차된 곳은 여기서 도보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차 주인인 호원이 술을 마시긴 했지만, 까짓거 자신이 운전하면 그만이었다.
저녁 내내 일을 하느라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무휼은 머릿속으로 집까지 가는 최단거리를 그리며 호원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아래로 내려간 손이 호원의 손에 깍지를 꼈다.
“가자.”
잡은 손을 당기며 무휼이 호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
옷을 갈아입을 여유 따윈 없었다. 부스 안에 굴러다니던 티셔츠를 대충 주워 입은 무휼은 호원을 끌고 내달렸다.
집에 도착하는 것도, 차를 주차하는 것도 모두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느릿하게만 느껴졌다.
목이 바싹 타는 것 같아, 무휼은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집 마당이 이렇게 넓었던가. 무휼은 마음이 조급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잔디와 장식용 바위가 듬성듬성 놓인 정원이 오늘따라 유독 넓게 느껴졌다. 고작 한 발짝 떼는 시간이 몇 년은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호원은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긴장한 걸까? 무휼은 현관문 앞에서 흘긋 그를 돌아보았지만 호원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잔잔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무휼은 돌연 딱 소리가 나게 이를 악물었다. 생각 없이 물었다가 호원에게서 역시 안 되겠다는 말이 돌아올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런 대답을 들을 바에는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무휼은 더 고민하는 대신 신속하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맑은 기계음과 함께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철컥 소리가 들렸다.
무휼이 안으로 성큼 들어서려는데 팔 한쪽이 뒤로 쭉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호원의 손을 잡은 팔이었다.
멈칫한 무휼이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호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호원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휼은 초조해졌다.
또 자신이 너무 일렀던 걸까? 호원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제멋대로 단정 짓고 또 그를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걸까?
무휼의 파란 눈이 호원의 전신을 배회했다. 무휼은 호원의 꽉 쥔 주먹이나 악문 입술 같은 것에서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윽고 호원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무휼은 그의 얼굴이 자신 못지않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인다는 데 놀라 그만 호원의 말을 놓쳐 버렸다.
“…뭐라고?”
미안, 정말 미안한데 다시 한번만 말해줘. 무휼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원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만약 내가….”
“무휼이니?”
호원의 말은 무휼의 등 뒤에서 날아온 음성에 잘려 스러졌다.
무휼은 중요한 순간에 재를 뿌린 음성에 왈칵 화를 내려다, 그 음성이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우아하게 컬이 들어간 갈색 단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못 본 사이 조금 길었는지 턱 끝에 겨우 닿던 길이가 어깨에 닿을락 말락 했다.
마중이라도 나오려 했는지 편한 실내복 원피스에 도톰한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 눈에 익었다. 50대 후반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인 얼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선 자리에 굳어버린 채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무휼에게서 실낱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
무휼의 새어머니, 원혜영이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
[…해서 저희 부스에서는 가장 인기가 좋았어요. 덕분에 이번 학기 성적도 좋게 나올 거 같아요.]
그거 잘됐네요. 명훈은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목소리에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웃음기가 살짝 담긴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손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사진들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줄곧 사진에만 고정한 채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둔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대충 흘려들었다.
[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많았는데, 선배님이 힌트를 주셔서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었어요.]
“선배님이요?”
의아한 목소리와 함께, 통화를 시작하고 난 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휴대폰에 닿았다. 화면에는 통화 시간과 함께 ‘박서윤’이라는 이름이 큰 글씨로 떠 있었다.
[얼마 전에 말했었죠? 저희 과 교수님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새 강사님이 오셨다고요. 근데 그분이 저희 과 선배님이거든요.]
아아, 그 얘기. 명훈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 얘기라면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네, 기억해요. 엄청 존경하는 선배라고 좋아하지 않았나?”
[아, 티 많이 났어요?]
서윤이 쑥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낭랑한 목소리에 명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싫어했다. 특히 그런 소리로 크게 웃는 소리는 끔찍할 정도였다.
그는 왈칵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내리누르며 말했다.
“그 선배님이 많이 도와줬나 봐요?”
[아뇨, 아뇨. 실은 그냥 살짝 힌트 정도만 주신 거고, 그 수업이 원래 그런 수업이거든요. 그래도 도움은 많이 됐죠.]
수화기 너머에서 서윤이 웃으며 말했다. 거슬리는 소리 속에서 어느 한 부분이 그의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그렇구나. 그 선배 정말 존경하나 봐요.”
[저희 과의 전설이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과 애들이라면 누구든 좋아해요.]
그가 뭔가 오해했나 싶었는지 서윤이 서둘러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부러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았다.
대신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침묵해서 서윤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사진을 향했다.
[정말이에요! 호원 쌤 싫어하는 사람 없다니까요? 그리고 그건 그냥 존경의 의미지 절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거나 그런 건….]
소윤이 다다다 말을 뱉어냈지만 이미 명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 사람은 저런 어린애가 몇 명이 달려들어 좋아한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다. 액체의 밀도를 조절해 층층이 쌓은 칵테일처럼 섬세한데도, 약한 충격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명훈은 빈틈없이 준비할 생각이었다. 층층이 분리된 액체가 온전히 섞이려면 셰이커 속에서 강한 충격을 견디며 부서지고 쪼개져야 한다.
명훈은 지금, 그동안의 부재를 뛰어넘게 해줄 커다란 셰이커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버려 둔 휴대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음에 보면 꼭 만들어드릴 테니까 그만 화 풀어요, 네?]
“와, 그거 참-”
명훈은 피식 웃으며 사진을 한 장 들어 올렸다. 빈 강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의 사진이었다. 여자 쪽은 옆얼굴이 흐릿해서 잘 나오지 않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곧 만날 수 있다. 그 생각을 하자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기대되네요.”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달콤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