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Hunting instinct (7)
무휼은 지금 심사가 매우 사나운 상태였다.
밤 11시까지만 해주면 된다던 일이 12시가 넘어가도록 끝나지 않았던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이 시간까지도 호원에게 연락할 짬조차 낼 수 없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축제가 시작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호원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식음료학과의 평가가 3일 동안 진행된다고는 했지만, 이미 오늘 평가는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혹시 오늘 내가 일한다는 걸 까먹은 건 아니겠지?
무휼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는 얼마 전, 축제 이야기에 들떠 했던 호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애인이 광고탑 역할이라니 꼭 보러 오겠다던 얼굴은 분명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안 보러 올 리는 없고. 역시 바빠서 시간이 안 나는 건가.
무휼은 고심하며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려다 아차 하며 손을 멈췄다. 기껏 세팅한 머리가 망가진다며 이미 여러 번 잔소리를 들었던 게 떠오른 것이다.
애매한 위치에서 멈춘 손이 머쓱하게 허공을 긁으며 내려갔다. 그러다 돌연,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애초에 일하기로 약속한 시간은 한참 지나 있었다. 학과장이 제발 조금만 더 있어 달라며 애걸복걸하지만 않았어도 진즉 호원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실 학과장이 애원이 아니더라도 호원만 찾아내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 시간이 되도록 호원은 보이지 않았다.
연락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휴대폰을 빼앗긴 터라 별수가 없었다.
‘가죽 바지는 핏이 생명이야! 이 완벽한 핏을 망치는 짓은 절대 용서 못 해.’
의상을 준비했다는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금고에 넣어버렸다. 비밀번호는 학과장과 그 선배만 알고 있다니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학교 내를 돌아다니다 중간중간 휴대폰을 빌려 전화해 봤지만 호원은 받지 않았다. 하기야 그 성격에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을 리도 없었지만.
무휼은 답답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성 많은 호원의 성격은 대부분의 경우 장점으로 여길 만한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야, 거기 제일 큰 광고탑! 이번엔 이거 들고 한 바퀴 돌고 와라.”
어째서인지 몰라도 머리끝까지 신이 난 학과장이 활기 띤 얼굴로 피켓을 내밀었다.
종이 박스를 뜯어 급조한 건지 엉성한 티가 나는 피켓에는 ‘체대 핼러윈 주점! 지금 오시면 서비스 음료 증정!’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벌써 어두컴컴한데 글씨가 보이긴 하나?”
“야, 야.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어차피 사람들은 글씨 보는 게 아니라 네 얼굴 보고 오는 거거든. 아, 물론 내 아름다움도 한몫했지.”
학과장은 씩 웃으며 말하더니 말끝에서는 제 얼굴 밑으로 꽃받침처럼 두 손을 댔다.
확실히 학과장은 남자답게 굵은 눈썹의 훈남이었지만 되다 만 마법소녀 같은 코스튬을 입은 상태로 그러니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저게 넉살이 좋은 건지 비위가 좋은 건지 몰라도 일단 단단히 미친 건 틀림없다며 무휼은 피켓을 받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초과 근무를 한 덕분에 내일 하루는 쉬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단 것이었다. 학과장은 저 코스튬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내일도 나온다는 모양이지만.
‘저런 꼴로 서빙하는데 손님들이 도망 안 가나?’
무휼은 불신으로 가느스름하게 뜬 눈을 하고 학과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발랄할 걸음걸이로 주점으로 돌아가는 학과장에게 여기저기서 주문을 외쳐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베테랑 여자 아이돌처럼 사진 찍기 좋은 포즈를 취해주는 학과장의 서비스 때문인 듯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체대 주점은 기록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주방도 신이 나는지 서비스 안주를 팍팍 풀기 시작했고, 손 비는 사람들까지 불러 인력 충원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신나서 일하는데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던 무휼은 이번에도 한숨을 푹푹 쉬며 피켓을 들고 운동장을 돌아야만 했다.
벌써 몇 바퀴째인지도 모를 호객 행위를 하러 몸을 막 돌릴 때였다. 그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몰려 서 있는 인파들 속에서 장신의 남자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들 위로 삐쭉 솟아 있는 정수리 아래에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반가움에 그쪽으로 향하려던 무휼이 그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호원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졸린 것 같기도 한,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피곤해서 저러나? 무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섰다. 무휼이 다가가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홍해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인파 속에 팔짱을 낀 호원이 삐딱하게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왔어?”
왜 이제 왔냐는 말을 싹둑 자르며 무휼이 눈을 휘었다. 그러나 호원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돌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너 뭐 해?”
“어?”
뜻밖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해 무휼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호원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더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숙이느라 동그란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무휼은 그의 반응에 얼떨떨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뭘 하냐니….”
결국 내뱉은 말은 제가 듣기에도 멍청한 대답뿐이었다. 무휼은 차마 말끝도 제대로 맺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때 호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입은 건지 걸친 건지 모를 무휼의 셔츠 앞섶을 와락 움켜쥐었다.
“따라와.”
“어? …어어?”
무휼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호원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그의 손에서 엉성한 피켓이 덜렁거렸다.
말 안 듣는 개의 목줄을 잡은 주인처럼, 호원은 무휼의 멱살을 잡은 채 주점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무휼은 입을 딱 다문 채 호원의 눈치를 보았지만,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뒤통수는 단호했다.
“여기면 됐겠지.”
호원이 걸음을 멈춘 것은 운동장에서 조금 떨어진 교사 안쪽 뜰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운동장과 중앙 교사와는 달리, 두 사람이 있는 교사 쪽은 불빛 하나 없이 고요했다.
호원은 내던지듯이 무휼의 멱살을 놓아주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
무휼이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호원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흘긋 노려보더니 이마를 짚은 손을 그대로 넘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너 그거 뭐야.”
“그거?”
“옷.”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옷이라니? 무휼은 자신이 걸친 옷을 내려다보았다.
학과장의 말로는 ‘늑대인간’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누더기나 다름없는 의상이었다.
그나마 늑대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가죽 바지 뒤쪽에 꼬리랍시고 달아둔 털 뭉치 때문이었다.
이게 왜? 무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호원을 돌아보았다.
“이상해?”
천진하기까지 한 맑은 얼굴로 무휼이 되물었다.
호원은 그 얼굴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주 보더니 이윽고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안 춥냐.”
아무리 무휼이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곤 하지만 10월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게다가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낮아져 사람들도 하나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날씨에 다 찢어진 셔츠 한 장 걸친 애를 밖에 내돌리다니, 호원은 학대도 이런 학대가 없다며 툴툴거렸다.
“바지가 생각보다 두껍고 따듯해. 덕분에 낮에는 오히려 덥더라.”
호원이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다 생각했는지, 무휼이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실제로 긴 가죽 바지에 부츠를 신을 덕분인지 호원이 말하기 전까지는 쌀쌀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게다가 선배들은 추울 때를 대비해 회색 털로 된 겉옷도 마련해 두었지만, 무휼이 그것만은 절대 입고 싶지 않다며 거절한 것이었다.
괜히 신경 써준 선배들을 나쁜 사람들로 만든 것 같아 무휼은 머쓱해졌다.
“근데 왜 이제 와? 듣자니 식음료학과 평가는 진즉 끝났다던데.”
그제야 서운했던 것이 떠올라, 무휼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사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홍보를 다니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얼른 호원에게 보여주고 싶어 애가 탔다.
그 와중에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도 심심찮게 들었지만, 이왕이면 호원과 제일 먼저 찍고 싶단 생각에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특하다며 무휼은 입꼬리를 올렸다.
“너 이러고 있는 줄 알면 좀 빨리 오는 건데.”
호원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체념과 후회가 반씩 섞여 있었다.
무휼은 씩 웃으며 두 팔을 벌리더니 잘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치? 다들 잘 어울린다더라. 제일 먼저 보여주려고 했는데 휴대폰도 뺏겨서 연락을 못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이으려던 호원이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가 어려운지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에게서 ‘하씨….’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너 그 꼴로 얼마나 돌아다녔어.”
“어? 글쎄. 한… 8시쯤부터 일했던 거 같은데.”
무휼이 렌즈를 낀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대답했다. 그 시간이면 호원이 식음료학과 평가를 막 끝냈을 즈음이었다.
어쩐지 소란스럽더라니, 이 자식 때문이었군. 호원은 낮게 중얼거리고는 밑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들어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잘빠진 애인은 이럴 때 곤란하다. 아이돌 무대 의상이라 해도 믿을 법한 옷을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외모가 뿌듯하긴 했지만, 이 꼴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광고탑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는 그저 기대가 되었는데, 막상 이 꼴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고 생각하니 영 불만스러운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꼴사나운 질투나 할 줄, 호원은 전혀 예상조차 못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호원은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자꾸만 들끓는 질투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도 그러고 다닐 거야?”
“내일은 쉬어도 된대. 근데 왜 그래? …혹시 나 이상해? 별로야?”
무휼이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이상하긴커녕 너무 잘 어울려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이 눈치 없는 멍멍아.
호원은 그렇게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누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잘 어울려. 너 원래 몸 좋잖아.”
그 말에 무휼의 얼굴이 환해졌다. 광원이 거의 없는 곳에서도 환하게 빛을 발하는 듯한 얼굴에 호원은 복잡한 기분 속에서도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이렇게 저기압이야?”
무휼이 의아하다는 듯 상체를 살짝 숙여 호원과 눈을 맞췄다. 호원은 새파란 시선으로 직시해 오는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뭘.”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피곤해서 그런가 보지.”
호원이 대충 말을 돌렸다. 무휼은 그런가 싶어 허리를 폈지만, 조심스러운 눈길을 계속 호원의 옆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휼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말이 하나 있었다.
‘근데 너 노출 그렇게 막 해도 되냐? 애인이 싫어할 것 같은데.’
과 동기 중 한 명이 툭 던질 말이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제 보니 대충 들어 넘길 말이 아니었던 듯했다.
“혹시 당신….”
무휼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웃음기를 미처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옷 입어서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