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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73)화 (73/101)

제73화. Hunting instinct (6)

“여기 재고 부족해! 누가 가서 슬라이스 햄이랑 치즈 좀 더 가져와!!”

“말한 사람이 가져오기!”

“방금 누구야?! 에이씨, 다녀올 테니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나요! 저요! 여기 휴식이 모자라요!!”

“그건 알아서 찾아!!”

식음료학과 3학년 A 부스는 벌써부터 재고 부족과 만석을 알리는 목소리들로 떠들썩했다.

아직 8시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밖에는 이미 대기 중인 손님들을 위한 간이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뜻밖의 호황에 학생들은 물론이고 평가를 하러 온 교수진들까지도 당황할 정도였다.

“엄청 인기 좋네요….”

호원이 뿌듯함 반, 놀라움 반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 역시 학생들의 과제를 평가를 위해 나온 데다 옆에 다른 교수님들도 있으니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대성황인 3학년 A 부스는 호원이 강의를 맡고 있는 학생들이 모인 곳이었다.

수업이라고는 해도 간단한 코멘트 정도만 준 것이었지만, 그래도 요 며칠 얼굴을 맞댔던 후배들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데 호원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뿌듯함은 A 부스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이 서윤이라는 걸 알았을 때 최고치에 달했다.

서윤이 원래 만들고자 했던 것은 검은색 리큐르와 하얀 생크림이 두 가지 층을 이루는 칵테일이었다.

섬세한 기술이 들어가는 데다 비율을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맛이 금방 어그러지는 칵테일이라 서윤은 준비 기간 내내 꽤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서윤은 호원이 모두 함께 쓰라며 가져다준 도구들 사이에서 카페용 생크림 휘핑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검은색 리큐르 위에 휘핑기로 생크림을 쌓아 아이스크림 같은 비주얼의 숏 칵테일로 메뉴를 수정했다. 그리고 그 메뉴가 손님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지금과 같은 호황을 기록하게 된 것이었다.

호원은 대놓고 힌트를 준 것도 아닌데 바로 개선할 점을 찾아낸 서윤이 기특했다.

사실 말로 하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숏 칵테일용의 작은 잔에 담긴 리큐르 위에 생크림을 깔끔하게 쌓는 건 꽤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서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호원은 뿌듯한 마음으로 그녀의 칵테일을 들이켰다.

“이번 해 주점은 다들 수준이 높네요. A 부스는 이미 성적 상위권 학생들이 꽤 보이더군요.”

“호원 쌤 강의 듣는 반이죠? 역시 젊은 선생이 있어야 한다니까.”

“아닙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한 결과죠.”

호원은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각 학년들의 부스를 거의 다 돌아갈 즈음, 호원은 운동장 한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벌써 공연 시작했나?’

의아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는지, 한 학생이 다가와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쌤도 저기 보셨어요? 체대 부스요!”

그 말에 호원이 아, 하고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저 위치는 무휼이 속한 체대의 주점이 있는 곳이었다.

마침 평가도 끝났겠다, 한번 가볼까.

호원은 슬금슬금 교수들의 눈치를 보았다. 교수들은 평가가 끝난 걸 자축하며 다 같이 한잔하러 가자고 고깃집을 예약하고 있었다.

“호원 쌤도 같이 갈 거죠?”

깐깐해 보이는 갈색 뿔테 안경을 쓴 교수가 호원을 향해 물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않겠냐는 표정에 호원은 난감해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하여간 교수들은 이래서 문제다.

왜 교수라는 생물체는 어딜 가든 조교나 강사, 학생 중에 하나를 동행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호원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길 바라며 방긋 웃었다.

“네, 가야죠.”

***

“…이걸 입으라고?”

무휼은 잘생긴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며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의상을 전해준 과대가 움찔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어… 선배들한테 못 들었어? 난 네가 이미 전해 들은 줄 알고….”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러나 의상이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내미는 손은 물리지 않는 것이, 의외로 강단이 있는 듯했다.

무휼은 아무 말도 없이 과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과대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앞으로 내민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대치는 학과장 선배가 상황 보고를 듣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뒤에야 끝을 맺었다.

“야야, 이왕 돕는다고 한 거 제대로 도우면 너도 좋잖아? 체대에서 운동해서 몸도 좋겠다, 이참에 써먹는 거지.”

학과장은 무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넉살 좋게 말했다. 무휼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지만 이내 학과장의 몰골을 보고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학과장은 척 보기에도 깜찍하기 그지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북슬북슬한 털로 뒤덮인 분홍색 치마는 딱 무릎까지 오는 길이였고, 그 위로는 너무 작아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프릴 블라우스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근육으로 우락부락한 몸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그 몰골에 무휼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 학과장 형 그 옷 결국 입으셨네요? 누나들이 눈 버린다고 뜯어말렸다던데.”

“내가 입고 싶다는데 뭐 어쩔 거야. 그리고 나 좀 어울리지 않냐?”

과대의 말에 무휼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학과장을 쳐다보았다. 제정신으로 저 옷을, 심지어 입고 싶어서 입었다고? 미친 건가?

그러나 학과장은 그런 무휼의 반응을 앞에 두고도 오히려 윙크를 날리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팔락팔락. 그의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리는 분홍색 치맛자락에 무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는 여기에다 요술봉 같은 거 하나 들면 딱인데, 애들이 서빙해야 된다고 손에 뭐 드는 건 안 된다 그러더라고.”

학과장은 진심으로 속상하다는 얼굴로 불평하더니 과대의 손에서 무휼의 의상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무휼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고 씩 웃었다.

“너, 나랑 사이즈 비슷하더라? 안 입을 거면 나랑 바꿔줄게. 언제든 말해, 알겠지?”

그 말에 무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상황 종결을 눈치챘는지 과대가 학교 건물 한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탈의실은 저쪽이야.”

눈앞이 아찔한 기분에 무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호원은 피곤한 얼굴은 한 채로 정문을 나섰다.

학생들의 실력에 감탄한 교수들이 부어라 마셔라 한 덕분에 금방 풀려날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술을 들이켜야 했던 터라 속이 울렁거렸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제 막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운동장은 부스들이 내뿜는 빛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새벽까지도 부스를 운영하긴 한다지만, 이 시간쯤 되면 분위기도 다소 누그러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10월 말의 싸늘해진 공기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호원은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높은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연은 모두 끝났을 시간인데 이상하리만치 많은 인파가 어느 한쪽에 몰려 있었다.

그 장소가 예의 체대에서 운영하는 주점이라는 것을 깨달은 호원이 아차 싶어 발걸음을 멈췄다.

오늘부터 사흘간, 무휼이 저녁 시간대의 광고탑을 맡게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시간 나면 놀러 간다고까지 말해놨는데,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무휼 성격에 그냥 넘어가진 않을 터였다.

어쩌지. 호원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고심했다.

평가 때문에 바빠서 올 짬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교수들에게 불려 다니느라 축제 구경도 제대로 못 했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사실에 입각한 말이었지만 무휼이 믿어줄지는 미지수였다.

일단 얼굴이라도 보고 말하자.

호원은 서둘러 결론을 내고는 멈춰 있던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환하게 불이 켜진 천막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체대 주점은 천막 안은 물론이고 야외에 마련해 둔 간이 테이블까지 모두 만석이었다. 개중에는 테이블이 모자라 합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호원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무휼을 찾았다. 저 멀리에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큰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앞에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걸 보면 무휼임이 확실할 것이다.

호원은 일단 그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다른 부스에서 간이 테이블을 빌려온 건지 좁은 공간에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걷기가 불편했다.

몇 번이고 ‘죄송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를 반복한 끝에 호원은 무휼을 둘러싼 인파의 끄트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 탓에 무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호원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셔츠 칼라로 보이는 옷깃과 그 위 얼굴 정도였다.

무휼은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였다.

머리를 고정한 지 시간이 좀 지난 탓에 몇 가닥이 반듯한 이마 위로 내려와 있었지만, 오히려 일부러 연출한 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피로감이 짙은 얼굴에서 그가 오늘 하루 얼마나 시달렸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됐다.

그러고 보니 일 끝나고 연락하자고 했었던 것 같은데 하루 종일 연락 온 것이 없었다.

호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보았지만 점심 즈음에 전화 한 통이 온 이후로는 무휼로부터 온 연락이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대신이라는 듯 모르는 번호로 온 연락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스팸인가 싶어 받지 않은 탓에 부재중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연락을 할 틈도 없을 정도로 바빴거나, 연락이 없는 자신에게 서운해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호원은 조금 미안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가하는 중에 살짝 빠져나와 얼굴이라도 보고 갈 걸 그랬다.

일 끝났으면 데리고 돌아갈까 싶어 호원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였다.

“쟤가 걔지? 체대 유명한 애.”

“체대 콘셉트 진짜 제대로 잡았네. 이런 주점이면 입장료 받았어도 납득하고 줬겠다.”

“핼러윈 콘셉트인 거지? 근데 저기 분홍색 쟤는 뭐야?”

“나도 몰라. 솔직히 쟤 외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바로 앞에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어깨를 붙이고 휴대폰을 든 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호원은 휴대폰 속 카메라 화면에 비치는 무휼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타이밍 좋게도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옆으로 비켜나며 무휼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

눈이 마주쳤다. 피로감 탓인지 평소보다 쌍꺼풀이 진해진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짙푸른 눈동자가 보기 좋게 가늘어졌다. 그러나 호원은 반가움이 잔뜩 어린 그의 미소에 화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무휼의 얼굴부터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본래는 멀쩡했을 흰색 셔츠는 여기저기 찢겨 넝마나 다름없었고, 군데군데 핏자국을 연출하려 한 것인지 붉은색 물감이 묻어 있었다.

긴 다리에 잘 어울리는 검은색 가죽 바지 밑으로는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호원의 눈에 그따위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시선은 그저, 찢어진 셔츠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탄탄한 복근과 선명한 쇄골뼈만을 향해 있었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돌았네, 권무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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