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Hunting instinct (4)
“…내가?”
무휼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로서는 정말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되물은 것이었지만, 상대는 그 험악한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너, 네가 싫다면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우리는 네가 꼭 맡아줬으면 하거든. 그날 사람들도 많이 올 거고, 민호가 분명 너도 해줄 거라 그러던데….”
“…….”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지? 무휼은 답답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또 어떻게 오해한 건지 말을 이어가던 과대는 거의 울다시피 하며 말을 마쳤다.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그렇지만 이거 우리 과에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애들도 다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고도 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체대 소속이라는 게 영 믿기지 않을 만큼 소극적인 녀석이었다.
무휼은 어쩐지 이렇게 왜소하고 심약해 보이는 남자애가 과대가 된 이유를 알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할게.”
“진짜?”
“어. 그러니까 뭐 하면 되는지나 말해.”
더 이상 복도에 붙잡힌 채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모처럼 호원이 시간이 나서 둘이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호원이 정문 앞에서 기다린다 하기에 서둘러 그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과대에게 붙들린 것이었고, 과대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로 느릿느릿 말해서 무휼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어차피 축제 때 하는 일이야 거기서 거기일 테고, 무휼이 할 일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을 터였다.
무휼은 작년 이맘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1학년 때 노동력으로 동원되어 천막을 세우고 장비를 날랐던 기억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정작 축제 때는 내내 경기에 나가느라 구경조차 못 했지만.
그러나 과대는 그 화가 날 정도로 느릿한 말투로 다시 한번 무휼의 속을 뒤집었다.
“그러니까 너는… 음… 실은 아직 제대로 정해진 건 아닌데, 우리가 이번 축제 때는 매번 하던 거 말고 새로운 콘셉트로 시도해 보자고 얘기를….”
“아, 됐어.”
결국 참다못한 무휼이 과대의 말을 뚝 잘랐다.
“그냥 나중에 문자로 보내든 해. 됐지? 난 이만 간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과대를 지나쳤다. 정문까지는 뛰어가면 금방이었다. 무휼은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며 한창 학생과 교수 양쪽으로 시달리는 호원을 떠올리며 뭘 먹여야 할까 고민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과대와 했던 얘기 따위는 이미 저만치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는 막상 축제 준비 위원이라는 여학생 둘이 찾아왔을 때,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옷 사이즈?”
“응. 그냥 불러만 줘도 상관없어. 우리가 알아서 적을 테니까. 아, 하의는 딱 붙어야 하니까 사이즈 좀 잴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 여학생은 무휼이 대답하기도 전에 무릎을 척 꿇더니 어디서 꺼낸 건지도 모를 줄자로 허벅지 둘레와 종아리 둘레, 다리 길이까지 쟀다.
그러고는 기대하라는 말만 남기고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무휼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 그제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에 괴로워했다.
***
“축제 때 너도 참가한다고?”
호원은 의외라는 듯 놀란 얼굴로 무휼을 돌아보았다. 그는 저녁으로 연어 스테이크를 굽는 중이었다.
무휼의 어머니가 부득불 식비를 받으려 하지 않아서, 이틀에 한 번 무휼과 저녁을 함께 차려 먹는 것으로 조건을 바꿨다는 모양이었다.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연어 토막의 모습이 먹음직스러웠다.
무휼은 테이블 위에 식기를 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호원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싫어할 거면서 왜 하겠다고 한 거야?”
“이렇게 귀찮게 할 줄은 몰랐지. 끽해 봐야 당일에 주방에서 냉동식품 데우는 정도나 할 거라 생각했어.”
“걔들도 눈이 있을 텐데 너한테 그런 걸 시키겠냐?”
아깝게. 호원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썩 듣기 좋아 무휼도 따라 웃어버렸다.
“그럼 너 호객 행위 같은 것도 하겠네? 광고탑이라며.”
“나도 몰라. 그냥 서 있기만 하라던데.”
무휼은 자신도 들은 내용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호원은 의아한 얼굴을 하며 요령 좋게 프라이팬을 움직여 연어 토막을 뒤집었다.
‘뭐, 저 정도 얼굴이면 피켓 들고 서 있기만 해도 되겠지만… 그걸로 만족한다고?’
그 지기 싫어하는 체대 애들이? 호원은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재밌어 보이니까 일단 두자.’
그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위로 올랐다. 어찌 되었건 그는 제삼자로서 구경이나 실컷 하면 그만이었다.
저 권무휼이 광고탑이라니, 그냥 둬도 시선을 끄는 녀석을 얼마나 예쁘게 꾸며둘까 싶어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했다.
속으로 체대 학생들을 응원하며 그는 잘 구워진 연어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았다.
“그럼 당일에 뭘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하겠다고 한 거야?”
“뭐… 그렇지.”
무휼은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의자에 앉았다. 호원에게 빨리 가려고 급한 마음에 덜컥 승낙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연어 스테이크를 포크로 쿡 찌르며 흘긋 호원을 쳐다보았다.
컵에 물을 따라 무휼 앞에 놓아주던 그가 시선을 눈치채고 살짝 미소 지었다.
“왜?”
“당신도… 축제 구경하러 온댔지?”
“응.”
호원이 자리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도 후배들의 과제를 심사할 겸 축제 기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축제라니, 졸업 이후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호원은 들뜬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아, 그렇지. 이 기회에 시영이랑 바 애들도 부를까? 모처럼의 축제니까.”
그동안 일하느라 바빠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으니 떠들썩한 축제에 와서 실컷 놀다 가게 해줄 셈이었다.
신나 보이는 호원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무휼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에 열중했다.
무휼로서는 자신이 뭘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을 가급적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탈이라도 쓰는 날엔 호원을 피해 내내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르지 말라 한다고 말을 들을 사람이었으면 무휼이 매일 밤 찬물로 샤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
그래서 그는 반쯤 포기한 말투 그대로 대답하고는 커다란 연어 조각을 한입 크게 넣고 씹었다.
***
식사가 끝난 뒤, 호원은 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가 한참 동안 짐들을 뒤적거렸다.
무휼은 평소라면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예능 편성표나 들여다보고 있을 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따라 올라가 방문 앞을 기웃거렸다.
“뭐 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며 무휼이 물었다.
호원은 아직도 채 풀지 않은 종이상자를 마구 열어젖히더니 그 안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들치며 살피고 있었다.
뭔가를 찾는 듯한 그 모습에 무휼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그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도와줘?”
찾는 게 있으면 말을 하지. 덧붙이는 말에 호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기특하다는 듯 무휼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고마워. 근데 벌써 찾았어.”
그의 손에는 카페에서나 보던 질소 휘핑기가 들려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매끈한 유선형의 기계는 무휼도 자주 봤던 것이었다.
“가게에서 쓰던 거잖아.”
“응. 축제 때 학생들이 필요할 거 같아서 가져다주려고.”
“꽤 열성적이네.”
무휼이 입술을 비죽였다. 호원이 학교로 출퇴근하는 건 좋았지만, 학생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쨌거나 사귀는 사이 아닌가? 학생들 하는 거 반만 나한테 해줘도 되잖아. 괜히 기분이 자꾸만 엇나갔다.
싫은 소리를 하려던 건 아닌데, 더 있다간 정말로 질투할 것 같아서 무휼은 애써 몸을 일으켰다.
“더 찾을 거 있어?”
“음… 글쎄. 이왕이면 애들 볼 만한 교본이랑 가게에서 쓰던 도구들도 좀 꺼내둘까? 어차피 가게 물건들은 다 새로 살 테니까.”
호원은 가게 물건들을 들어 살펴보며 학교에 가져갈 것과 남겨둘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손에 착 감기게 길이 잘 든 셰이커와 바 스푼, 계량컵 등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니 도움이 될 거라며 싱긋 웃는 얼굴이 기뻐 보였다.
무휼은 그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심술을 부릴 수도 없어졌다. 그는 호원의 옆에 털썩 앉아서 그가 구분해 둔 물건들을 작은 박스 안에 담았다.
눈치 빠르게 포장을 도와주는 모습에 호원이 눈꼬리를 휘었다.
“정리 끝나면 와인 마시면서 영화 볼까? 도와준 답례로 간단한 안주 정도는 만들어줄게.”
아직 뚱한 상태인 무휼은 호원을 잠시 돌아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건을 집어 상자 안에 넣는 손길이 빨라지는 것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신속하게 물건을 정리하는 그를 발견한 호원이 크게 웃었다. 덕분에 무휼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가득 찬 상자를 번쩍 들어 1층으로 옮겨야 했다.
무휼의 집 거실은 유독 큼직큼직한 가구가 많았다. 공간이 넓어 큰 가구를 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어머니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작은 것도 아기자기해서 좋지만, 소중한 사람과 함께 지낼 곳이라면 가구는 큰 게 좋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성인 장정 두어 명은 동시에 뒹굴어도 무리 없을 만한 소파를 들여두었다.
처음에는 그런 어머니의 취향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널찍한 집에서 굳이 이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이유가 있단 말인가 싶었다.
중학생 즈음에는 유독 큰 가구에 집착하는 어머니가 이해 가지 않아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듯 침묵하다 이윽고 부드럽게 웃으며 무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무휼이도 크면 알게 될 거야.’
당시의 무휼은 어머니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키로는 어머니를 추월한 지 오래인데도.
그리고 지금, 무휼은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너희 집 가구는 다 크네. 네가 커다래서 어머님이 맞춰주신 건가?”
침대라 해도 될 만큼 커다란 소파에 기대며 호원이 말했다. 푹신한 쿠션에 푹 파묻힌 나른한 얼굴이 기분 좋아 보였다.
“뒹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늘어지게 돼. 어떨 때는 평생 이렇게 누워 있고 싶다니까?”
무휼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사람을 집 안에 붙잡아두는 것은 퍽 사소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갓 세탁해 뽀송뽀송한 이불이나 푹 파묻힐 것처럼 푹신한 침대, 그리고 늘어져서 뒹굴기 좋은 소파 같은 것들.
‘그러지 않아도 내가 여길 떠날 일은 없을 텐데.’
무휼은 호원의 곁에 붙어 앉아 슬그머니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다행히 호원은 팔을 밀어내는 대신 어깨에 편하게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이 연인에게 하는 스킨십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인형이나 쿠션을 대하는 것 같은 모습이라 문제였지만.
소파 테이블에는 무휼이 와인셀러에서 골라 가져온 빈티지 와인과 잔, 그리고 호원이 금세 뚝딱 만들어낸 카나페가 놓여 있었다.
호원은 신중한 얼굴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영화 선정에 나름의 고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휼은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마치 꿈속을 떠다니는 듯 평화로운 나날이 깨지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