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Hunting instinct (4)
서윤은 후문을 넘으며 긴장을 숨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자꾸만 쿵쿵거리는 심장께를 주먹으로 콩콩 치며 심호흡도 해봤지만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천천히 와요. 기다릴게요.’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핫초코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떠올리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들을 때마다 온몸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근래 들어 알게 된 남자는 정말로 그녀에게 호감이 갔던 모양인지 부지런하게도 연락을 취해왔다.
좋아하는 것이며 자주 가는 가게, 과 생활 같은 것을 자꾸만 물어오는 덕에 화젯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학교 안에서 만나는 건 처음 본 날 이후로 꺼리는 모양이었지만, 학교 관계자도 아닌 사람이 캠퍼스를 자주 드나드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며 서윤은 대충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네.’
남자는 평범한 회사원이라며 이제 갓 입사한 신입이라 바쁘다고 했었다. 그 말이 정말인지, 낮 동안에는 연락도 잘 되지 않았고 야근이 잦아 저녁에도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바쁜 건 남자뿐만이 아니라서, 두 사람은 번호를 교환한 날 이후로 이렇다 할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직장에 대해 더 물어볼까 싶었지만, 별로 좋아하는 화제가 아닌지 남자는 회사 이야기는 교묘하게 피해갔다. 볼 때마다 편한 차림인 걸 보면 그리 빡빡한 직장은 아닌 모양이라며 서윤 혼자 짐작할 뿐이었다.
서윤 쪽에도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상대가 피하는 화제를 굳이 꺼낼 만큼 눈치 없지도 않았고 아직 가깝지도 않은 사이에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았다.
‘뭐, 내키면 말해주겠지.’
서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자가 위치를 보내준 카페는 이 근처인데 간판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학교 후문에서도 꽤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와야 했던 터라 아무리 봐도 낯선 가게들뿐이었다.
그래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을 때, 서윤은 퍽 반가웠다.
“권무휼!”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무휼을 어깨를 툭 쳤다. 무휼은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달려든 그녀의 행동에 놀란 기색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얘는 어쩜 저런 얼굴 달고 짓는 표정이 늘 뚱한 얼굴이람. 정말이지 낭비가 따로 없다며 서윤은 쯧쯧 혀를 찼다.
“이런 데서 다 보네.”
“아, 뭐.”
무휼은 본인도 서윤을 만난 게 예상외인지 대충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에 들린 커피를 발견한 서윤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구 만나기로 했나 봐?”
“…….”
무휼은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서윤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카페 캐리어를 든 무휼의 손을 흘긋 쳐다보았다.
캐리어에 든 커피는 두 잔이었다. 저 권무휼이 몸소 커피를 배달하다니 신기하다며 서윤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어? 나 이 가게 찾는 중이었는데. 어느 쪽인지 좀 알려주라. 아까부터 찾고 있었는데 안 보였거든.”
서윤이 캐리어에 적힌 카페 로고를 보고 반색을 하며 물었다. 마침 그녀가 찾던 카페의 것이었다.
무휼은 화제를 돌릴 수 있어 만족한 듯 친절하게 몸을 틀어 가게 간판을 가리켜 보였다. 간판은 큰데 적힌 글씨가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아, 찾았다! 고맙다, 야. 그럼 난 가볼게. 너도 얼른 가봐.”
서윤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대단한 권무휼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꼴은 볼만했지만, 더 지체했다간 미운털이 박힐지도 몰랐다.
무휼은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하더니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멀어졌다. 달리는 속도나 다름없는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요?”
남자는 편안한 소파 자리에 앉아 작은 크기의 책을 보고 있었다. 아니, 가죽으로 된 표지와 얇은 펜이 꽂혀 있는 걸 보면 책보다는 수첩에 가까운 듯했다.
“빨리 왔네요?”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수첩을 덮었다. 서윤은 그가 수첩을 가방 안쪽 깊숙이 넣는 걸 보고는 테이블에 놓인 빈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기다리셨나 봐요. 늦어서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저도 방금 전에 왔거든요.”
남자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 두 개의 빈 컵이 얼음 부딪치는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며 들어 올려졌다.
“이건… 목이 좀 말라서.”
남자가 머쓱하게 웃고는 뭐 마실래요? 하고 되물었다.
서윤은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늦었으니까 제가 살게요, 명훈 오빠.”
남자, 여명훈은 그런 서윤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
무휼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문패에는 구동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간제 강사긴 하지만 호원은 구동호 교수의 호의로 그의 교수실을 빌려 쓰게 됐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교무실처럼 시끌시끌한 강사실보다야 개인 교수실이 편한 건 당연했으므로 호원은 기꺼이 교수의 호의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구동호 교수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때문에 지금 안에는 호원 혼자일 터였다.
그러나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애초에 무휼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없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저렇게 높고 거북한 목소리는 없었다.
조금 뒤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에 무휼이 발길을 돌릴 때였다.
“호원 쌤은 애인 없어요?”
뭐? 무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착각의 여지도 없이 문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무휼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문고리를 잡고 휙 돌려 문을 열어젖혔다.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본 여자가 화난 듯한 무휼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또 봬요, 호원 쌤.”
여자는 허둥지둥 짐을 챙겨 일어서더니 그대로 교수실을 나섰다. 무휼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다 호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 서류 뭉치를 들여다보던 호원은 그대로 눈만 들어 무휼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 되게 살기등등하다. 누가 보면 깡패인 줄 알겠어.”
“누구야?”
“우리 과 조교. 내가 부탁한 서류 전해주러 온 거야. 너무 겁주지 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서류를 넘기는 호원의 모습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무휼은 그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툭 올려두고는 호원의 바로 옆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맞은편에 자리 넓은데.”
“시끄러워.”
나보고는 바람피우지 말라는 둥 해놓고는. 무휼이 작게 중얼거리자 호원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그는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열려 있는 교수실 문을 닫고 돌아왔다.
캐리어에서 아이스커피를 꺼낸 호원이 그대로 허리를 숙여 무휼의 뺨에 입술을 댔다. 생경한 감각에 눈을 크게 뜬 무휼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그는 커피 잔을 들어 보였다.
“잘 마실게, 자기야.”
그러고는 입술만 벙긋거리는 무휼 맞은편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약았어.”
한참 침묵하던 무휼은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호원은 크게 웃더니 다시금 서류를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심각해지는 얼굴에 무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건?”
“아. 이거? 저번 축제 때 교수님들이 평가했던 내용이야.”
나도 나름대로 기준을 세울 거지만, 그래도 의견 드릴 때 통일된 기준이 있으면 좋으니까. 호원은 그렇게 말하며 뻐근하다는 듯 어깨를 돌렸다.
“아주 이때다 싶었는지 골수까지 빼먹으려 드신다니까.”
한낱 기간제 강사인 그는 본래 참가할 권한도 필요도 없었지만, 구동호 교수는 물론이고 과의 다른 교수들도 그에게 의견을 요청했던 터라 도저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의 의견은 단순히 참고만 할 뿐 평가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충 했다가는 스승의 명성에 누가 될 터였다.
“당장 다음 주면 축제 시작이잖아. 너네 과에선 뭐 한다는 말 없었어?”
호원이 슬쩍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무휼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무휼이 속한 체대도 매번 축제 때 식음료학과 못지않게 떠들썩했던 것을 기억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무휼은 들은 얘기가 없는지 뚱한 얼굴로 글쎄, 하고 답할 뿐이었다.
대학 축제는 주목도와 홍보가 가장 중요한 만큼 저 정도 얼굴의 홍보탑을 놓칠 리가 없었다. 호원은 어지간히도 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나 싶어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너… 친구는 있지?”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무휼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아, 다행이다. 친구는 있나 봐. 호원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오후 강의는?”
“끝났어. 당신 강의 끝나면 같이 가려고 온 건데.”
드물게 기특한 말에 호원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 얼굴을 본 무휼은 저녁에 훈련이 있지만 빼먹을 거란 말은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뭐, 강의 끝나자마자 체육관 가서 메뉴 한 바퀴 끝내고 왔으니 됐겠지.’
무휼은 며칠 전, 드디어 재활훈련을 끝내고 연습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무휼은 지루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최민호야 이전부터 그럭저럭 제 몫을 하는 녀석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팀원들의 실력이 너무도 부족했다.
김진수가 있을 때에는 몰랐던 격차가 적나라하게 보이자 무휼은 연습하는 일 자체가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코치님은 그런 무휼의 불만을 예상했었는지 그를 따로 불러내 당분간 연습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하는 게 좋겠다고 언질을 주었다.
1학년에 실력 있는 팀원이 몇 명 들어왔으니 그 녀석들을 잘 키워서 팀워크를 맞춰보자는 것이었다.
코치님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무휼은 초조했다. 벌써 반년이나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이미 업계에서는 그가 다시 경기를 뛰지 못하는 거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고 있었다.
그는 퇴근 준비를 하는 듯 서둘러 서류를 정리하는 호원의 모습을 가만 쳐다보았다.
호원은 가게가 불타 사라졌음에도 그에게 기대지 않는다. 김 여사님에게 듣자니 얼마 전부터 어머니와 이야기해서 숙박료 대신 식비를 일정 부분 부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이뤄내는 호원의 모습에서 그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를 느껴야만 했다. 호원도, 어머니도 그에게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무휼은 그런 두 사람이 야속했다. 한편으로는 한낱 대학생인 데다 미래도 불확실한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 됐어. 가자!”
그러나 막상 호원이 밝게 웃으며 그를 불렀을 때, 무휼은 모든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내며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