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Hunting instinct (3)
“강사라고?”
조수석에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무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호원은 익숙하지 않은 길에 애를 먹으며 대답했다.
“응, 정확히 말하면 시간 강사.”
특강 몇 개 하는 거라 강사라 하기도 쑥스럽다며 호원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갑자기 강사라니, 어떻게 된 거야?”
“너도 기억하지? 김순영 여사님. 그분이 부탁하신 건데 이번에는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호원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순영이 강사 제의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창 가게를 꾸리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던 시기, 호원은 순영의 제의로 강사 일을 종종 하곤 했었다. 교육 관련 자격증도 그때 딴 것이었다.
강사 일을 하던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워낙 반응이 좋았던 덕에, 지금까지도 강사 자리가 생기면 순영은 제일 먼저 호원에게 연락하곤 했다.
그전까지는 가게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바 ‘3월’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가게 운영을 하느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 화재로 가게가 강제 휴가에 들어가게 되면서 여유가 생긴 것이다.
호원은 저 좋을 때만 찾는 것 같아 죄송해했으나, 오히려 순영은 기꺼워하며 바로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정말이지, 선생님께는 항상 빚만 지는구나. 호원은 조만간 순영에게 찾아가 뭐라도 선물해야겠다 생각하며 핸들을 꺾었다.
무휼은 집에서 쓰는 차를 빌려주겠다 했지만 호원은 거절했다. 마침 차 수리가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던 데다, 더 이상 무휼의 어머님께 신세를 졌다간 나중에 뵐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침에 무휼의 가정부 아주머니께 대략적인 사정 설명을 해둔 것도 그 이유였다.
“그래서 당분간 너희 대학으로 출퇴근하게 됐어. 강의 준비다 뭐다 바빠서 자주 보긴 힘들지도 몰라.”
어차피 건물이 달라서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중얼거린 호원이 체대 건물 앞에 차를 대고는 핸들에 팔을 얹고 무휼을 돌아보았다. 눈꼬리가 휘며 갈색 눈동자가 보기 좋게 가늘어졌다.
“애인이 신경 못 쓴다고 바람피우면 안 돼? 자기야.”
무휼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다 사레들려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호원은 얄미울 정도로 박장대소를 하더니 무휼 쪽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얼른 가. 이러다 나 진짜 지각하겠어.”
그러고는 지체할 틈도 주지 않고 무휼의 안전벨트를 풀더니 어깨를 밀어댔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떠밀린 무휼은 얼결에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후진해서 다른 건물로 향하는 차를 보며, 무휼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무휼이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주차장 한가운데에 쭈그려 앉은 그가 벌겋게 물든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중얼거렸다.
“…감당 안 된다, 정말.”
왜 점점 요망해져? 어디서 배워오나?
무휼은 어떻게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마른세수를 하고는 벌떡 일어서서 가방을 고쳐맸다.
오늘 들어오기만 해봐, 이호원. 으르렁거리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안녕하세요, 이호원이라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입원하신 구동호 교수님 대신 제가 이번 학기에 본 강의를 담당하게 될 겁니다.”
제대로 잘 말하고 있나? 호원은 긴장으로 식은땀이 배어 나는 손바닥을 주먹 쥐어 감추며 침착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 나이대 애들은 조금만 얕보여도 금방 깔보지만, 반대로 너무 딱딱하게 대하면 벽을 세운다며 경계한다.
성가시기 짝이 없었지만, 호원은 이 나이대 아이들 특유의 그런 면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좋다 싫다 뚜렷하게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나이의 특권이니까.
“쌤, 쌤! 저희 과 선배라는 거 진짜예요? ‘그’ 이호원 선배 맞아요?”
때문에 호원은 다소 무례해 보이는 이런 질문에도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바 스푼으로 셰이커를 톡톡 쳤다.
“네, 네. 맞아요. 질문은 수업 후에 하도록 하죠. 다들 3학년이라고 하던데, 실력 좀 봅시다.”
그 말에 강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호원은 긴장으로 바짝 굳은 얼굴들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다 강의실 한쪽 자리에 앉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서윤이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얼빠진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강사로 온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해진 그는 서윤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서윤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을 흘기고는 자신의 과제에 집중했다.
축제가 코앞이라더니, 과연 학생들 대부분이 본인의 신작을 얼추 마무리한 상태였다.
호원은 학생들의 신작을 하나하나 맛보고는 장단점과 고칠 점을 짚어주었다. 학생들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상태에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구열이 높은 타입인지, 학생들은 강의가 끝난 후에도 호원에게 매달려 질문을 해댔다. 개중에는 칵테일이며 수업과는 상관없는 질문들도 많았지만, 호원은 적당히 능청스럽게 웃어넘겼다.
덕분에 서윤이 호원에게 다가갔을 즈음에 그는 진이 빠져 책상 위에 상체를 기대다시피 하고 있었다.
“선배님 인기 장난 아니네요.”
“다들 열의가 대단하더라.”
이번 축제는 정말 볼만하겠어. 호원은 진심으로 기대를 담아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정작 서윤의 과제는 검토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강의를 듣는 학생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한 명 한 명 검토해 주다 보니 시간이 모자랐던 것이다.
호원은 능숙한 플로팅 기술로 아래쪽은 검은색, 위쪽은 흰색의 층을 만들어냈던 서윤의 칵테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넌 확인 안 해줘도 괜찮아? 보니까 굉장한 걸 만들던데.”
“그렇지도 않아요. 축제 땐 회전율이 중요한데 제 건 아무리 숏 스타일로 한다 해도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그렇다고 급하게 하려면 층이 어그러지고요.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아요. 서윤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원이 보기에 서윤은 칵테일 기술도 그렇고 술을 고르는 센스도 뛰어났다. 잘만 키우면 대단한 바텐더가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윤의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정말 실력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알려준 정답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네 레시피에 생크림이 들어가던가?”
“네….”
서윤이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호원은 씩 웃었다.
조금의 도움은 괜찮겠지. 호원은 무휼의 집으로 옮겨둔 도구들 중에 상태가 괜찮은 게 있나 떠올리며 말했다.
“그 생크림을 좀 가볍게 해보면 어때?”
“네?”
가볍게요? 서윤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호원은 설명을 해주는 대신 얄미울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서윤은 결국 제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깨닫고는 눈을 흘겼다.
“선배 가끔 엄청 어린애 같은 거 알죠?”
“젊게 사는 거지.”
호원은 뻐기는 것처럼 가슴을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서윤이 깔깔 웃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전화 온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그래그래.”
호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랑살랑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보세요? 아, 네. 지금이요? 네, 네. 그럼 제가 그리로-”
서윤은 전화를 받더니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앞부분 내용을 보아하니 급한 약속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호원은 발랄해 보이는 서윤의 밝은 갈색 단발이 골목을 꺾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기지개를 쭉 켰다.
강단에 서는 건 오랜만이라 혹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넘긴 모양이었다.
호원은 책상 위에 상체를 얹고 늘어졌다. 창문 너머로 새파란 가을 하늘이 유독 높아 보였다.
“…뭐 하고 있으려나.”
설마 아침에 좀 놀렸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호원은 백미러 안에서 황망하게 서 있던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
“죄송합니다만, 어머님.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학생을 개인적으로 불러내 심문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심문이라뇨.”
숙경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건만, 그걸 굳이 ‘심문’이라는 단어로 곡해하는 상대의 저의가 악랄하게 느껴졌다.
“전 그저 뭔가 오해가 있다고 생각해서….”
“물론 오해는 있었죠. 하지만 이미 당사자들끼리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애는 이제 21살이에요! 아직 보호자의 보살핌이 필요한 애들이 자기들끼리 해결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나요?”
숙경이 기어이 새된 소리를 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골치 아프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다물었다.
숙경은 그런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들의 코치를 맡기 시작한 이래로 남자의 행동이 마음에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코치는 당연히 아들의 것이어야 했던 에이스 자리를 엉뚱한 학생에게 넘겨주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아들과 그 학생은 다투기까지 했고, 그 결과 그녀의 아들은 지금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숙경의 생각에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코치의 애매한 태도에 있었다. 진정으로 에이스 자리에 있어야 할 선수를 억지로 밀어내니 이 사달이 나는 것 아닌가.
숙경은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답답함에 목이 너무 타서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으나 종이컵 안의 녹차는 진즉 비어 있었다.
“어머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도 제 아들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면 많이 답답하고 억울할 거예요. 하지만 그 일로 상대 선수도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그 일에 선수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코치는 단호하게 말을 마쳤다. 그러고는 끙차, 하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밖까지 안내해 드리죠.”
축객령이었다. 숙경은 코치가 더 이상 제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다는 걸 직감했다. 아마 다음번 면담 요청은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손톱이 손바닥의 여린 살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숙경은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머리가 시야를 가렸지만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거나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저, 그리고 외람된 말입니다만.”
그녀가 막 건물 밖으로 나서려던 참이었다. 무거운 문을 잡아 열어준 코치가 그녀를 돌아보며 입을 떼었다. 그의 시선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숙경의 왼쪽 이마를 향해 있었다.
“혹시라도 상담 받으실 생각이 있다면 저희 학교 상담실에 말해두겠습니다.”
“…….”
숙경은 그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그 자리를 벗어났다.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는데, 키 큰 청년 한 명이 택시정류장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응, 그래요? 천천히 와요. 기다릴게요.”
연인과 통화라도 하는지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병원에 있는 자신의 아들과 반대되는 것 같아 그녀는 괜히 울컥했다.
“아, 먼저 타시죠.”
전화를 끊은 청년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몸을 살짝 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보니 얼굴도 꽤 반반했다. 숙경은 고맙다는 표시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택시로 향했다.
막 문을 열려는데, 옆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쑥 튀어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얼떨떨하게 올려다보니 아까 그 청년이었다.
“김진수 어머님 되시죠?”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숙경은 그 말에 등허리로 소름이 쭈뼛 돋았다.
숙경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청년이 반듯한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드디어 뵙네요.”
“네? 그게 무슨-”
숙경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제야 차 문을 붙잡고 있는 청년의 오른손이 뚜렷하게 보였다.
손목을 가로지르는 새하얀 상흔. 못 알아볼 수 없는 흉터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 청년의 눈을 향했다.
“얘기할 것이 많은데, 언제 시간 한번 내주시죠.”
짓궂은 미소가 잘 어울리는, 어딘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 서늘한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