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Hunting instinct (2)
“대박.”
처음 말문을 뗀 것은 수영이었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리며 놀라더니 이내 작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냐, 겉보기엔 괜찮아 보였냐, 무슨 과냐 하고 쉴 새 없이 질문을 쏘아댔다. 옆에서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민호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뭐… 겉으로 보기엔 미남이었는데.”
“근데 이상한 사람이라면서요.”
조용히 듣고 있던 진욱이 톡 쏘아붙였다. 보통 초면인 사람한테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나?
그의 말에 수영과 민호도 입을 딱 다문 채 서윤에게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냈다.
“그 이상하다는 건 별다른 의미가 아니고, 그냥 좀….”
서윤은 뒷말을 얼버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좀… 꺼림칙했어.”
분위기가 위태롭다고 해야 하나, 말을 거는데 조마조마해진다고 해야 하나. 이상한 압박감이 있었다며 서윤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미남이었다면서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쟤도 봐봐요. 저 위압감. 수영이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무휼을 가리켜 보였다.
아까부터 인상을 구긴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무휼이 그녀의 삿대질에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하긴, 권무휼 쟤도 초면인 사람한테 길 물어볼 때마다 상대가 엄청 쫄더라.”
“오히려 너무 잘생겨서 부담스러운 거지.”
“오, 그럴듯하다.”
민호와 수영, 호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나섰다. 서윤은 역시 그런 거겠지? 라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번호 줬어요?”
진욱이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글쎄…. 지금까지 고민 중이었는데 수영이 말 듣고 보니 괜찮을 거 같아. 내일쯤 연락해 볼까?”
“나중에 꼭 소개해 주기예요?”
수영이 신나서 서윤의 팔을 콕콕 찔렀다. 이윽고 그 자리는 예비 커플이 된 서윤을 축하할 겸 놀리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다들 걱정 반 부러움 반으로 하는 짓궂은 장난에 맞장구치며, 서윤은 남자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내밀 때 보았던 손목 위의 새하얀 흉터 자국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즐거웠어요, 선배.”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들!”
왁자지껄했던 모임은 날짜가 바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겨우 파장 분위기를 맞았다.
호원은 2차를 간다는 수영과 서윤, 그리고 반송장이 된 민호를 질질 끌다시피 부축하는 진욱의 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섰다.
가게에서 무휼의 집까지는 택시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기에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 어색해.’
호원은 제 옆에서 말 한마디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무휼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잔뜩 심통이 나 있는 게 뻔히 보였지만 애써 눌러 참고 있는 듯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영락없이 아이 같아서 귀여운데. 호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소리에 무휼이 고개를 돌려 호원을 쳐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푸른 그 눈을 보니, 호원은 그만 당황해 버렸다.
“어, 그… 좋아하는 거 맞지?”
“…뭐?”
무휼이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그러더니 무슨 오해를 했는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낮게 깔아 음산한 목소리에 호원은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진욱이 말이야. 딱 보기에 서윤이한테 마음 있어 보이던데.”
주절주절 설명하니 무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가 보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어투였다. 사실 호원도 남의 연애사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았으나 말이라도 안 하면 질식해 죽을 것 같은 지금의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떤 화제든 절실했다.
“옆에서 보기에 너무 티 나니까 귀엽더라. 서윤이한테 남자친구 생길 거 같으니까 막 안절부절못하고….”
“귀여워?”
걔가? 무휼이 돌연 고개를 휙 돌리더니 사나운 얼굴을 하고 호원을 노려보았다.
얜 또 왜 이래? 호원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무휼은 성큼 발을 내디뎌 호원의 앞을 가로막은 채 삐딱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걔가 뭐가 귀여워.”
“왜, 왜? 귀엽잖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거-”
“그런 게 귀여워?”
퉁명스러운 말투가 위압적이었다. 아까부터 내내 심사가 뒤틀려 보이더니 기어이 터지는 건가 싶어 호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휼이 불쑥 허리를 숙여 호원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훅 가까워진 잘생긴 얼굴은 뚜렷한 이목구비에 그림자가 져서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 얼굴로, 무휼이 툭 내뱉었다.
“그럼 나는?”
“…어?”
호원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잠시 침묵하던 호원은 한 박자 늦게 무휼의 말을 이해했다.
“큽!”
호원이 이상한 소리를 뱉으며 주먹으로 입술을 짓눌렀다. 그러나 한번 터진 웃음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호원은 신음 소리인지 우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어깨를 떨며 숨죽여 웃어대던 그는 이윽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와… 너 정말 대단하다.”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쓸며, 호원이 숨을 헐떡거렸다. 무휼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한 말에 박장대소를 해버리는 호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웃기잖아!”
호원이 그 얼굴을 보고 또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웃느라 얼굴로 열이 오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온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하… 진짜, 권무휼.”
헐떡거리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호원이 큭큭 웃었다.
호원의 눈에는 제 앞에 선 문짝만 한 남자가 꼭 간식을 안 줘서 토라진 치와와처럼 보였다.
눈앞에 불량한 자세로 서 있는,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성인 남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다니. 호원은 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해 키득거렸다.
이윽고 겨우겨우 숨을 가다듬은 호원이 미소 띤 얼굴을 들어 무휼을 마주 보았다.
“네가 더 귀여워.”
그러니까 걱정 마. 호원이 사르르 웃으며 덧붙인 말에 무휼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더니 휙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호원은 그 넓은 등판을 쳐다보다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무휼의 귓불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보일 만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무휼은 평소처럼 등교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학교생활 좀 충실하게 하라는 호원의 잔소리에 못 이겨 최근 그는 모든 수업에 성실히 출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대로 시간표를 그따위로 짜는 건 뭐야. 무휼은 전공 필수 과목을 죄다 아침에 몰아넣은 교수들을 욕하며 덜 마른 머리를 털었다.
아침 부엌에서 인기척을 듣고 나온 김 여사님이 보여 무휼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머, 무휼 학생도 벌써 나가요? 요즘 학교 성실하게 잘 나가네.”
학생‘도’? 무휼은 의아한 얼굴로 식탁을 쳐다보았다. 숟가락을 입에 문 호원이 한 손만 들어 흔들고 있었다.
“호원 학생… 아니, 호원 씨도 지금 나가는 모양이던데. 사이좋게 같이 나가면 되겠네.”
김 여사님이 평소처럼 부르려다 얼른 호칭을 고쳤다. 무휼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호원을 쳐다보았다.
호원은 씩 웃더니 식탁 맞은편 자리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일단 앉아. 반찬 다 식겠다.”
“그래그래, 앉아요. 내가 얼른 밥이랑 국 떠다 줄게.”
김 여사님이 멀뚱하게 서 있는 무휼을 손짓해 부르고는 부엌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자리에 앉은 무휼은 건너편에서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밥을 먹는 호원을 쳐다보았다.
“관두기로 한 거야?”
“뭐를?”
“나 피하는 거.”
막 국을 뜨던 숟가락이 허공에 뚝 멈췄다. 호원은 흘긋 눈만 올려 무휼을 쳐다보았다. 눈치를 보는 듯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알고 있었냐?”
“모르길 바랐어? 그런 것치고는 너무 노골적으로 피해 다니던데.”
하여간 말버릇하고는. 호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무휼은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팔짱을 척 끼었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투였다.
“응, 관뒀어.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오히려 의식하는 게 티 나면 이상한 소문만 날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무휼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김 여사님이 척 보기에도 2~3인분은 되어 보이는 고봉밥과 김이 펄펄 오르는 소고기뭇국을 들고 왔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무휼은 방으로 올라가는 호원의 뒤를 따랐다. 호원은 두고 온 게 있었는지 책상 근처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문가에 기대서 있던 무휼이 못마땅한 투로 툭 내뱉었다. 김 여사님이 갑자기 호원을 ‘호원 씨’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자신만 모르는 채 상황이 변하는 것이 그는 영 불쾌했다.
호원은 ‘잠시만~’이라고 대꾸하더니 책상 서랍을 이것저것 열어가며 뭔가를 찾았다.
“계속 그럴 거야?”
결국 참다못한 무휼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발끝에 뭔가가 차여 데굴데굴 굴러갔다. 뭐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평범한 각 티슈였다.
이런 걸 왜 방 한가운데 둔 거야? 무휼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각 티슈를 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여기 두는 거야.”
찾던 물건을 찾았는지, 서류철을 손에 든 호원이 무휼에게서 각 티슈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뜬금없는 위치 선정이었으므로 무휼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굳이 그런 데다 두는 거야? 불편하게.”
“…그냥 버릇이야. 혹시 방 안 물건 마음대로 옮겨서 불쾌한 거면 원래 위치에 둘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이젠 당신 방이니까 마음대로 해. …그보다 나하고 할 얘기 많지 않아?”
“그래그래, 알겠어.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이러다 우리 둘 다 지각하겠어.”
재촉하는 무휼에게 피식 웃은 호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툭 내밀었다.
“나 오늘부터 너희 학교로 출근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