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67)화 (67/101)

제67화. Hunting instinct (1)

“으, 찌뿌둥해.”

호원은 교수실 문을 나서자마자 굳은 어깨를 돌리며 기지개를 쭉 켰다. 장시간 긴장 상태로 웃고 있었더니 안면근육은 물론이고 온몸이 다 쑤셨다.

나이 지긋한 교수님들은 호원을 기억하며 반겨주셨지만, 개중에는 어리고 실력 있는 그를 못마땅해하는 교수님도 있었다.

어차피 옛날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니 신경 쓸 거 없다고 순영은 말했었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얼굴을 봐야 할지도 모르는 호원으로서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오늘은 양손에 커피며 간식거리를 잔뜩 사 들고 아부를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호원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새 약속 시간이 다가온 터라 서윤으로부터 메시지가 꽤 쌓여 있었다.

-선배, 오고 계시나요?

-(박서윤 님이 링크를 보냈습니다.)

-여기로 오시면 돼요! 교수실 있는 건물 바로 앞이니까 천천히 오세요^^

-저 지금 카페 도착했어요!

링크를 열어보니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 위치가 떴다. 와플이 대표 메뉴인, 어디서나 흔하게 볼 법한 카페였다.

호원이 건물 출구와 지도를 번갈아 보며 방향을 잡고 있는데, 서윤으로부터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선배, 죄송한데… 오시면 좀 시끄러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무슨 소리지. 카페에 사람이 많아서 소란스러운가? 일단 가보고 자리를 옮기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호원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 시간대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호원은 노을이 지는 구석 자리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서윤을 발견했다.

“…뭐야?”

호원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서윤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전에 함께 만났던 김수영과 이진욱, 최민호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들?”

호원이 가까이 가며 묻자 서윤이 얼른 아이스커피를 내밀며 자리를 권했다.

“선배 인터뷰한다니까 다들 또 보고 싶다고 해서요. 아, 이거 드세요. 커피 괜찮으세요?”

“어, 그래. 고마워.”

호원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 컵을 받아 들었다. 슬쩍 둘러보았지만 반가움이 묻어나는 얼굴들 중에 무휼의 것은 없었다.

“권무휼은 집 들렀다 나중에 온대요.”

그런 호원의 기색을 눈치채고 최민호가 얼른 말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 호원은 조금 머쓱해졌다.

“선배, 이따가 인터뷰 끝나고 잠깐 저희 과실도 좀 들러주시면 안 돼요? 다들 선배 보고 싶어 해요.”

“날? 왜?”

호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학번 차이가 나는 탓에 아는 얼굴도 없을 텐데 뭐가 그리 궁금한가 싶었다.

그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서윤이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선배는 저희 과 전설이잖아요. 그러니 다들 궁금해하는 거죠. 그러니까 네? 같이 가주실 거죠?”

서윤이 과장되게 말끝을 늘이며 제발요오 하고 애원했다. 호원은 고개를 살짝 젓고는 대답했다.

“전설은 무슨, 그냥 졸업생이지. 애들 노는 데 괜히 꼈다가 눈치 없는 꼰대란 소리 듣고 싶진 않다?”

게다가 조만간 싫어도 질리게 볼 텐데 뭐. 호원은 그렇게 혼잣말을 덧붙이며 빨대 끝을 물었다. 시원하고 검은 액체를 들이켜니 교수님들 사이에서 진땀을 빼느라 쌓인 피로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학교 또 오세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거나 다름없었는데, 용케 알아들은 서윤이 물었다. 호원은 다시금 빨대 끝을 쪼옥 빨고는 탁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인터뷰 안 해? 계속 딴소리하면 나 간다?”

“하이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지금 시작하겠사옵니다, 나으리.”

서윤이 깔깔 웃으며 질문지를 꺼내 들었다.

***

서윤 일행은 인터뷰가 끝나고 이만 일어서려던 호원을 붙잡아 근처 이자카야로 끌고 갔다. 호원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자리 하나에 엉덩이를 붙였고, 그즈음 기다렸다는 듯 무휼이 얼굴을 비쳤다.

“어, 왔냐.”

장소를 알려준 최민호가 한 손을 번쩍 들어 무휼에게 인사했다. 무휼은 머쓱한 얼굴로 앉아 있는 호원을 흘긋 보고는 비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호원은 괜히 목이 타는 기분에 물잔을 벌컥 들이켰다. 며칠 전 무휼의 방에서의 일이 있은 후, 호원은 은근슬쩍 무휼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집 안에서든 어디서든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무휼에게 기가 질린 것뿐이었다.

그날 허세 부린답시고 너무 자극했던 건지, 무휼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거나 호원에게 닿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호원은 가게 수리며 보험사 직원과 상담한다는 등 갖은 핑계를 대며 집 밖으로 나다니고 있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무휼이 집에 꿀이라도 발라둔 사람처럼 칼같이 집에 들어앉아 있게 되었다.

밖에서 끼니를 때운다고 해도 결국 잠을 자려면 무휼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호원은 괜히 식사 시간을 피해 귀가하거나, 아예 새벽이 다 된 시간에야 몰래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무휼을 피해 다니길 며칠째. 기어이 무휼과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게 된 것이다.

‘이래서 오기가 좀 그랬던 건데.’

호원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테이블 위에는 호원이 손도 대지 않은 숙주볶음이 철판 그릇 위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선배, 왜 이렇게 못 먹어요. 뭐 다른 거 시킬까요?”

서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더니 아예 메뉴판을 가져다 호원 앞에 펼쳐 보였다. 대학교 앞 이자카야가 대개 그렇듯, 가게 메뉴판에는 썩 먹을 만한 메뉴가 없었다.

양이 많고 저렴한 대신 어디서 먹어도 거기서 거기인 메뉴들을 슥 훑어보던 호원이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컥!”

“선배! 괜찮아요?”

호원이 사레들려 쿨럭거리자 서윤이 깜짝 놀라 물잔을 찾았다. 호원은 그녀가 내미는 물잔을 받아 마시면서 슬쩍 맞은편 눈치를 보았다.

무휼은 여전히 숨이 막힐 것처럼 사나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저건 분명 화가 난 거다.

호원은 들고 있던 메뉴판을 슬쩍 올려 시야를 가렸다. 이 기름때로 끈적거리는 플라스틱 메뉴판이 잠시나마 저 시선을 가려주길 바라며 한 행동이었다.

‘아니, 하지만 어색한 걸 어떡하라고.’

그날 이후 무휼과 한 공간에 같이 있을 때면 온몸이 간질간질한 기분이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괜히 숨 쉬는 동작 하나도 의식이 되어,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물론 명확한 설명도 없이 대놓고 피하는 것이 상대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대차게 허세를 부려둔 상황에서 이제 와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선배, 이거 먹고 싶어서 그래요?”

옆에서 웃음기를 숨긴 목소리가 넘어왔을 때야 호원은 자신이 메뉴판 한쪽의 사진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딱 보기에도 기름이 줄줄 흐를 것처럼 보이는 닭튀김이 한가득 쌓인 사진이었다.

“아니, 그런 건-”

“마침 잘됐다. 저희도 사실 좀 모자랐거든요. 안주 하나 더 시켜요!”

서윤이 붙임성 있게 말하며 호원의 손에서 메뉴판을 가져갔다.

호원은 아연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다. 테이블에는 거의 바닥을 보이는 숙주볶음과 국물만 남은 짬뽕탕, 나무 꼬치만 덩그러니 남은 빈 그릇이 몇 개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먹고도 모자라다고?

그러나 황당해하는 호원과는 달리 한창 많이 먹을 때인 대학생들은 새 접시 둘 자리를 만든다며 신나서 빈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호원은 탑처럼 쌓이는 빈 그릇 옆으로 인테리어의 일부인 양 늘어서 있는 빈 병을 보고는 아, 하고 납득했다. 초록색 소주병이 한눈에 숫자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새삼스럽지만 너희 진짜 젊구나.”

“에이, 오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까 민증 검사도 같이 받았으면서.”

수영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털털하고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인상만큼이나 말술이었다.

진욱은 술이 약하다며 맥주 한 잔을 따로 시켜 마시고 있었으므로 저 초록색 벌판을 만든 건 순전히 수영과 서윤, 민호 셋이었다.

“형, 오늘따라 너무 몸 사리시는 거 아니에요?”

“맞아. 듣기로는 바텐더들은 다 주량 세다면서요.”

취기가 오르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민호가 말했다. 그러자 수영이 바로 끼어들며 소주병을 들었다.

“그거 다 편견이야, 너네. 바텐더도 사람이란다.”

호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비어 있던 잔에 투명한 액체가 출렁거리며 가득 찼다.

잔을 막 입에 가져다 대는데, 얼굴에 따끔따끔하게 와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체하겠다, 정말. 호원은 마시려던 잔을 내리며 흘긋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무휼은 기다렸다는 듯이 살벌한 시선을 보내왔다. 보아하니 호원이 술을 마시는 것도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쟤는 차라리 말을 하지, 왜 노려보기만 하는 건데?’

호원은 입술을 비죽이고는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쓰고 미지근한 액체가 검게 타들어가는 속에 불씨를 확 지피는 듯했다.

“맞다. 술 하니까 생각났는데, 언니네 과 축제 준비는 잘돼 가요?”

수영이 서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히,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잔을 비우고 있던 서윤이 그 말에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야, 말도 마. 나 사흘 밤 꼴딱 새고 아까 낮에 눈 잠깐 붙였다.”

“어? 누나, 그럼 술 마셔도 되는 거예요?”

민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술을 마셔도 되냐는 지극히 정상적인 의문이었지만, 서윤은 오히려 ‘술이 무슨 상관이야?’라며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모두를 경악케 했다.

수영이 희귀 생물을 보는 눈으로 서윤을 보다 호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에서 또다시 편견을 읽은 호원은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축제 평가 아직도 하는구나.”

“네에…. 선배 때 이후로 허들이 더 높아졌다고요.”

서윤이 이게 다 호원 때문이라면서 눈을 흘겼다. 호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호원 오빠가 왜요?”

수영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자 서윤이 과장스럽게 어깨까지 들썩여 가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여기 앉아 계시는 우리 과 레전드께서 역대급 매출을 올려주신 장본인이란다. 나는 그냥 대학교 행사에서 그런 금액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지 뭐야.”

“와….”

수영과 민호, 진욱의 시선이 감탄을 담아 호원을 향했다. 호원이 머쓱하게 웃는 와중에 직원이 한가득 쌓여 김을 풀풀 내뿜는 닭튀김을 들고 들어왔다.

“그래도 축제라니 재밌겠다. 그때 맘에 드는 사람 번호도 많이 따고 그랬는데.”

호원이 그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닭튀김 접시를 받아 한가운데 내려놓던 서윤의 행동이 뚝 멈췄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드물게 심각해 보이는 서윤의 얼굴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이상한 사람이 번호 달라 그러더라.”

서윤의 말에 테이블 위로 정적이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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