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카밍시그널 (6)
“당신한테 닿으면 나 자신이 제어가 안 돼.”
무휼이 뒤통수를 감쌌던 손을 내려 호원의 뺨을 감쌌다. 이윽고 그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등허리를 쓸었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밖에 안 해. 보이면 닿고 싶고, 닿으면 안고 싶고.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보면 나만 아는 곳에 가둬두고 싶다는 생각만 해.”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은근한 손길로 허리께를 느릿하게 매만졌다. 호원이 입은 목욕가운의 허리끈을 느른하게 쓸어 만지며 무휼이 고개를 숙여 호원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하지만 여기서 그랬다간 당신은 당장 이 집을 나가 버릴 거잖아.”
호원을 생각하면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괜히 무휼과 함께 있다가 또다시 그에게 불행이 닥칠 수도 있었다.
무휼은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새까맣게 변해 버린 가게를 바라보던 호원의 뒷모습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원을 놓아줄 순 없었다. 그는 이미 호원에게 한 번 거절당했었다. 호원이 없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괴로운지는 무휼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호원이 그의 감정을 받아준 지금, 그에게 호원을 놓아준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비록 호원이 그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다 해도.
“내 눈 닿는 곳에,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 당신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참아볼 테니까.”
무휼은 양팔로 호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호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호원은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놀란 듯도 하고 화가 난 듯도 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돌연 호원이 목소리를 냈다. 살짝 불퉁한 목소리에 의아해하기도 전에 어깨가 떠밀렸다.
“어?”
무휼은 갑작스럽게 반전된 시야에 당황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위에 올라탄 호원이 무게를 실어 어깨를 누르는 통에 크게 뜬 눈으로 호원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듣고 있자니 아주 웃기고 자빠졌잖아.”
호원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무휼을 노려보았다.
“야, 누가 너더러 지켜달래? 멍멍이 주제에 누굴 지키네 마네 그딴 소리나 하고 말이야.”
그늘이 져 고동색으로 보이는 갈색 눈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내가 맘먹었음, 넌 진작 잡아먹혔어.”
호원이 도발하듯 무휼의 입술을 핥아 올렸다. 적나라한 유혹에 무휼이 윽, 소리를 내며 호원을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보다 호원이 한발 빨랐다.
언제 풀어냈는지, 무휼의 팔을 붙잡고 훌쩍 몸을 일으킨 그는 쪽 소리가 나게 무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씩 웃었다.
“아가는 얼른 잠이나 자라. 시간 늦었다.”
그러고는 뺨을 톡톡 치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산뜻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며 친절하게 방 불을 꺼주기까지 했다.
“…하.”
무휼은 멍하니 닫힌 문을 쳐다보다 헛웃음을 뱉었다. 이러고 가면 어쩌라고. 그는 어질어질한 머리로 지금 당장 호원을 쫓아 나갈지 고민했다.
…참아야겠지.
다행히 호원 때문에 날아갔던 이성은 그 잠깐 사이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몸을 일으킨 무휼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나이트가운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은 호원은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참았던 열이 화르륵 타올라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침착해 보였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는데, 잘 먹힌 걸까?
호원은 열기로 가쁜 숨을 들이쉬며 심호흡을 하다 혹여나 방 안에 숨소리가 들릴세라 소리를 죽였다.
내 나이가 몇 갠데. 저렇게 까마득한 어린애의 유혹에 홀랑 넘어갈 순 없지.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긴 했지만,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흥분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오기 반 허세 반으로 어떻게든 상황은 무마한 것 같지만 이런 짓은 두 번은 못 하겠다 싶었다.
“쟤는 대체 뭘 믿고 저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호원이 붉어진 얼굴로 흘긋 방문을 흘겨보았다. 아직도 목소리가 닿았던 귓가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밖에 안 해. 보이면 닿고 싶고, 닿으면 안고 싶고.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보면 나만 아는 곳에 가둬두고 싶다는 생각만 해.’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와서는, 요망한 똥강아지 같으니. 호원은 갑자기 열이 올라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으로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쟤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은 몰라도 한 3~4년만 지나면 통째로 홀랑 잡아먹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호원은 빠르게 고개를 저어 정신을 다잡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방에 가서 문 닫아걸고 잠이나 자자. 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
서윤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자 퀭한 얼굴로 캠퍼스 안을 걷고 있었다.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해 배가 죽을 것처럼 고팠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서인지 식욕마저 일지 않았다.
‘일단 기숙사 가서 자자. 자야겠어. 더 못 자다간 진짜 죽는다.’
결연하기까지 한 다짐을 되뇌며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피곤에 절어버린 몸은 마음과는 달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길 거부했다. 그 덕에 그녀는 거의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겨우겨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곧 다가올 축제 때문에 그녀를 포함한 신우대 식음료학과 학생들은 막판 총연습에 돌입해 있었다.
신우대 식음료학과에 있어 이번 축제는 단순히 먹고 노는 유흥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2학기 중간평가 대신 축제에서 각자 만든 메뉴로 경합을 벌이는데, 학년별로 부스를 따로 낼 정도로 그 열의가 대단했다.
심사에는 전공 교수님들의 메뉴 평가 점수와 신우대 학생들의 투표 점수를 반영하기 때문에 단순히 메뉴가 좋다고 고득점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고객의 니즈에 맞춰 맛있는 메뉴를 만들고, 그것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판매하는 것. 그것이 심사 기준이었다.
식음료학과 학생들은 이날을 위해 MT도 안 가고 모아둔 학과 운영비로 부스를 휘황찬란하게 꾸며댔다. 칵테일 메뉴는 물론이고, 안줏거리조차 평범한 대학 축제 부스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화려한 메뉴들이 줄지었다.
덕분에 신우대 축제는 외부인들도 드나들 정도로 유명해졌고, 그 수익 규모 역시 타 대학 축제와는 궤를 달리했다.
그러나 축제의 명물이 되어버린 탓에 정작 그 기대를 감당해야 하는 식음료학과 학생들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학생들은 각자 만들어낸 메뉴를 어떻게 판매할지 고민하느라 열을 올렸고, 메뉴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가니시로 쓰는 과일들이 상자째로 공용 냉장고 안에 쌓였고, 부스를 꾸미느라 주문한 장식용품들이 천막 옆에 굴러다녔다. 어떤 학생은 자기가 만든 메뉴를 시음하다 고주망태가 되기도 했다.
서윤 역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만들어낸 메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마자 잠시 쉬러 나온 것이었다. 잠시 눈 좀 붙였다가 다시 그 치열한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돋았다.
‘하필 전필이라 쨀 수도 없고 진짜-’
중얼중얼 교수님들 욕을 하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문짝이라 해도 될 만한 등판에 작고 동그란 뒤통수는 타인과 착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침 피곤에 절어 뭐라도 회복될 만한 게 필요하던 차라,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등짝을 툭 쳤다.
“야, 권무휼!”
무휼은 놀란 기색도 없이 무덤덤한 얼굴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자 서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너 오랜만에 본다? 수업 가?”
“아니. 집.”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서윤은 충분히 만족했다. 신우대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권무휼’과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볼 때마다 감격스러운 얼굴은 존재만으로도 피곤한 삶의 위안이 되었다.
다소 불퉁한 대꾸에도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재차 물었다.
“너 호원 선배랑 친하지? 나 이따 선배 인터뷰 갈 건데 너도 와?”
“그거 결국 해?”
무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반듯한 미남이라 그런지 인상을 찌푸렸을 때의 박력이 상당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서윤은 얼떨떨해하며 생각해 봤지만 딱히 잘못이라 할 만한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왜? 호원 선배는 좋다던데. 오랜만에 교수님들도 뵙는다고 학교로 온다고 했는걸.”
“…학교로 온다 했다고?”
역시 뭔가 실수한 걸까. 더욱 험악하게 구겨지는 무휼의 표정을 보며 서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학교로 온다 했단 말이지. 무휼은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커다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윤 못지않게 그 역시 잠을 설쳤는지, 잘생긴 얼굴에도 피곤이 묻어났다.
“어디서 하기로 했어?”
“어? 아… 학교 앞에 카페 하나 있잖아? 그 와플 맛있는 집. 거기서 이따 보기로 했어.”
“알겠어.”
무휼은 짧은 대답을 뱉고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가는 통에 서윤은 따라갈 엄두도 못 낸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뭐야, 둘이 싸웠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과에서는 거의 전설급 존재인 호원 선배를 알게 된 건 조별과제를 함께했던 최민호 덕분이었지만, 듣기로는 무휼도 호원과 절친한 사이라는 듯했다.
그런 무휼이 호원 소식에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서윤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 그래서 온다는 거야, 안 온다는 거야?”
그녀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무휼의 등에 대고 외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 참, 눈요기 한번 하려다 영 마음 불편해졌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이왕 잠이 다 깨버린 거, 커피나 한 잔 사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저기요.”
그런 그녀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듣기 좋은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네?”
무심코 대답하던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곱상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미남자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딘지 장난기가 가득한 짓궂은 미소였지만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어, 저기….”
학생은 아닌 것 같고, 외부인이 길을 잃었나? 그녀는 피곤에 절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쪽이 제 타입이라 그러는데,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
부드러운 어조의 목소리가 서윤의 귓가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