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65)화 (65/101)

제65화. 카밍시그널 (5)

“어떻게 된 거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무휼이 내뱉은 말이었다.

호원은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다 말고 흘긋 그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무휼은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호원은 서윤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는 다 함께 건배를 했다.

목적을 상실한 민호는 이렇게 된 거 술이나 마시자며 즐겁게 술잔을 들었고, 진욱과 수영은 새로운 멤버의 등장에 기뻐하며 신나서 술을 주문했다.

왁자지껄한 와중에도 무휼의 시선은 줄곧 서윤과 이야기를 나누는 호원을 향해 있었다.

아직 어제의 숙취가 다 가시지 않은 건지 호원은 앞에 놓인 300cc짜리 맥주잔만 천천히 비우고 있었다. 중간중간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옆자리에 앉은 서윤과 오붓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오붓하게.

무휼은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게 말하던 호원의 모습에 배알이 꼬였다.

가게에서 손님을 대할 때와 같은 얼굴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가게와는 달리 이곳은 사적인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호원의 태도는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다.

게다가 무휼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호원의 태도만이 아니었다.

선배라기엔 학번이 꽤 높을 텐데도 서윤은 별로 호원을 어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얼굴에 홍조까지 띠고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대는 것이 퍽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그 관심이 단순히 ‘선배님’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쪽으로는 둔한 편인 무휼이 눈치챈 것을 눈치 빠른 호원이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뭐가?”

그러나 호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무휼은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확 덮쳐 버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오늘은 자신의 잘못이 크다 보니 함부로 반박도 못 하겠다.

연락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지만, 호원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호원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도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다.

‘아마 심술이거나… 또 변덕 부리는 거겠지.’

어쩌면 대놓고 질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무휼은 더 이상 호원이 휘두르는 대로 놀아나 줄 생각이 없었다.

무휼은 호원과 함께 있으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 되어버리는 스스로를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호원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었다.

그래야 오롯이 호원에게만 향해 있는 시야를 넓힐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의 호원이 자신 앞에서 그러하듯이, 그의 옆에서도 냉정하게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에게 닥치는 불행이 무엇이든, 자신이 먼저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이상 호원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정신을 못 차릴 순 없는 일이었다.

무휼은 자꾸만 호원의 어깨를 감아쥐려 하는 손을 애써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선배라면서. 당신, 우리 학교 졸업생이라는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할 필요가 없었잖아. 너도 물어본 적 없었으면서.”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호원은 그것이 감정이든 과거든, 자기 자신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때문에 무휼도 부러 그에게 묻는 대신 스스로 관찰하고 판단해서 그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휼이 다니는 학교가 신우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도 그 학교를 나왔다고 가볍게나마 한마디 얹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무휼은 습관처럼 말을 아끼는 호원이 답답했다.

“졸업은 언제 했는데?”

“…그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처럼 말해놓고, 호원은 휙 고개를 돌렸다. 씻으러 간다며 2층으로 휘적휘적 올라가는 뒷모습에 무휼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설마 아직도 알아보는 후배가 있을 줄이야.”

호원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중얼거렸다.

졸업한 지 꽤 되었으니 이젠 좀 잊혀지나 했는데, 그놈의 학연은 호원만 쏙 빼놓고 절찬 운영 중이신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소문이 사그라들질 않았다.

혹시 과에 다른 애들도 다 그런 상태는 아니겠지? 호원은 물에 젖어 달라붙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민했다. 만약 그렇다면 순영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아 진짜 쪽팔리는데…. 이 나이면 화석을 넘어서 먼지 아니냐고.”

호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뜩이나 요즘 만나는 연하의, 그것도 남녀노소 다 후리고 다닐 것처럼 생긴 애인이 저를 슬슬 피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런 상황에 굳이 나이 차이까지 들먹여 더 정떨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눈치 없이 졸업 연도나 물어보고. 하여간 바보 같은 멍멍이 자식. 호원은 투덜거리며 물을 잠그고 샤워부스를 나왔다.

‘그래도 아예 안 먹힌 것 같진 않던데.’

가운을 걸친 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호원이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건 반은 심술, 반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연락을 안 한 게 괘씸하기도 했고, 이틀간 대놓고 그를 피하고 있는 무휼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치한 행동이긴 했지만,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다른 조원들이 즐겁게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좀 오싹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나 눈에 뻔히 보이게 질투할 거면서 대체 왜 피하는 거지? 혹시 나한테 정떨어진 게 아닌가?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건데? 호원은 수건을 어깨에 얹고 한참 생각해 보았으나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에이씨, 짜증 나.”

호원은 느슨하게 묶었던 가운의 허리끈을 꽉 조여 매고는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이 이상 혼자 고민해 봤자 답도 안 나올 거, 차라리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성싶었다.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무휼의 방으로 향하는데, 살짝 열린 문 안에서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도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슬쩍 방 안을 둘러보니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셔츠와 슬랙스가 소파 한쪽에 널려 있는 게 보였다.

조금 이따 다시 올까. 호원은 슬쩍 시선을 굴리며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물소리가 뚝 끊기더니 달칵- 하고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원은 시야를 찌르는 듯한 푸른빛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허리에 수건만 대충 감고 나오던 무휼과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거기서 뭐 해?”

무휼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상황에서 돌아가자니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호원은 부러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 얘기나 좀 할까 해서. …좀 이따가 올까?”

“이미 들어와 놓고 무슨. 저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무휼은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더니 침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원은 저도 모르게 쭈뼛거리는 태도로 침대에 가 앉았다.

방 크기가 이렇게 넓은데도 드레스룸 쪽으로 가는 무휼의 맨 등이 지척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재활훈련 외에는 격한 운동은 하지 않는다던 말과는 달리, 넓은 어깨에서 아래로 흐르는 근육의 짜임새가 세밀하고 탄탄해 보였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흐른 물방울이 날개뼈 사이를 지나 근육의 골을 타고 허리로 흐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호원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 봤어?”

무휼이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호원은 컥, 하고 숨을 들이켰다. 콜록거리는 그를 두고 무휼은 낮게 웃으며 나이트가운을 걸쳤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무휼이 가운의 끈을 돌려 묶으며 다가왔다. 호원은 그가 당연히 제 옆쪽에 와서 앉을 줄 알고 자리를 비켜주려 했지만, 그는 소파에 딸린 보조 의자를 호원 쪽으로 돌려놓은 뒤 마주 앉았다.

‘이것 봐라?’

호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무휼은 명백하게 그를 피하고 있었다.

“야.”

호원이 찌푸린 얼굴로 무휼을 불렀다. 불쾌한 심사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어투에 무휼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너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와는 달리, 시선은 호원에게서 벗어나 바닥 언저리를 향했다. 호원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고, 그저 슬쩍 떠보기만 하려던 계획은 그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권무휼 너, 어제부터 날 피하고 있잖아.”

“…….”

찔리는 건 있었는지, 무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무휼의 태도는 호원의 화를 더 돋웠다.

“뭔가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사람 답답하게 대놓고 슬슬 피하지 말고.”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이딴 태도를 취해서 사람 마음 심란하게 하는데?”

호원이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휼의 시선이 호원의 얼굴을 향해 번쩍 들렸다.

호원은 성큼 발을 내디디며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감겨오는 나이트가운의 매끄러운 재질을 놓치지 않으려 꽉 붙잡았다.

호원에게 멱살을 잡힌 채, 무휼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소파에 살짝 눌린 몸이 반동으로 출렁거리다 위에서 눌러오는 힘에 더 깊게 처박혔다.

“말해. 뭐야.”

무휼을 소파에 넘어뜨려 깔고 앉은 호원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무휼의 눈빛이 떨렸다.

호원은 형광등의 불빛 아래에서 더 말갛게 빛나는 푸른 눈을 노려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서 울컥 답답함이 치밀었다.

“추태 부린 건 미안한데, 그거 보고 정떨어졌으면 그렇다고 차라리 말을 해! 이제 와서 대놓고 피해서 사람 심장 철렁하게 하지 말고.”

“뭐…? 아니, 일단 진정해.”

무휼이 호원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호원은 그의 멱살을 쥔 손을 더 꽉 움켜쥘 뿐이었다.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혼자 끙끙거리면서 나 밀어내지 말고!”

“밀어내긴 누가 밀어냈다고 그래?”

울컥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무휼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멱살을 쥔 호원의 손목을 틀어잡더니 그대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무휼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호원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무휼은 호원의 손목을 꽉 잡고 뒤로 넘어가는 그의 몸을 바싹 당겼다.

호원은 갑자기 가까워진 무휼의 얼굴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휼은 호원이 도망가지 못하게 두 손목을 모아 잡고 제 가슴에 딱 붙였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고 있는데? 그러는 당신도 내가 뻔히 보는 앞에서 여자랑 약속을 잡았잖아!”

“네가 말을 안 하잖아!”

호원이 버럭 소리쳤다. 무휼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네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을 안 하는데!”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던 호원이 고개를 숙여 무휼의 어깨를 꾹꾹 밀어냈다. 잡힌 손을 풀려 했지만 꽉 붙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갑자기 피하니까… 불안했어. 초조했어. 그래서 괜히 그런 거야. 네가 어떻게 나올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

“이런 거 성가시고 부담스럽겠지. …미안.”

꼴불견이다. 나이는 한참 많은 주제에 쉽게 의심하고 쉽게 상처받는다.

이래서 더는 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호원은 스스로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호원은 그의 가슴을 꾹 밀어내며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당장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일단 머리를 좀 식히고, 당분간 지낼 곳도 알아봐야-

생각을 더 잇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입술에 뜨겁고 말랑한 피부가 닿았을 때야 파악할 수 있었다.

눈앞이 무휼의 긴 속눈썹과 젖은 머리카락으로 어지러웠다. 뺨에 와 닿는 숨결과 조심스럽게 맞물리는 입술의 감촉, 그리고 뒤통수를 감싼 단단하고 큰 손에 속절없이 심장이 떨렸다.

이윽고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렀다. 호원은 당황과 의아함이 반씩 섞인 얼굴로 무휼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쪽 팔이 호원의 등허리를 감싸 당기는 게 느껴졌다. 호원의 얼굴과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무휼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성가시다거나 부담스럽다는 생각, 전혀 안 해.”

내가 당신을 상대로 그런 생각이 들 리가 없지. 나직하게 말하며 무휼은 눈꼬리를 휘었다. 빨려들 것 같은 새파란 눈동자가 고운 반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일렁였다.

“당신이 내 주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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