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카밍시그널 (4)
시간이 막 6시를 넘어갈 무렵, 호원은 거실 소파에 앉아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잠시뿐이라곤 하지만 평소라면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을 시간에 한가로이 보내자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아 어색했다.
가게는 보험 쪽이 얼추 정리되면 공사를 시작하게 될 터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바 3월의 공식 SNS 계정에도 당분간 영업을 못 한다는 안내 게시글을 올려두고 나니 더더욱 할 일도 없어져, 거실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빼 읽고 있던 참이었다.
집안일을 봐주시는 김 여사님은 며칠 뒤에나 오신다고 했고, 집주인인 무휼의 어머니는 불쑥불쑥 간헐적으로 귀국하긴 하지만 하루 이틀 뒤엔 다시 해외로 나가시는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커다랗고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는 호원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저녁 시간에는 돌아온다던 무휼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좀 늦나 보다 하며 뭐라도 만들어둘까 싶어 일어서려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렸다.
-호원 형, 혹시 오늘 바쁘세요?
무휼의 팀메이트인 민호의 문자였다. 무슨 일이지? 호원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본래 호원은 가게 손님과 개인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았다. 가게 SNS를 통해 종종 바텐더들의 개인 연락처를 물어오는 일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정중히 거절하곤 했다.
때문에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 중에 호원의 개인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외에는 없었다.
딱 한 사람, 최민호 빼고는.
그건 호원 입장에서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에는 무휼이 언제 다시 가게에 올지, 혹은 평생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민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민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는 일은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아마 민호는 호원 본인보다는 시영 쪽이 목적이었겠지만 그때의 호원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인연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후에 시영이 ‘개인 번호를 준 건 처음 아니냐’는 말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불문율을 깨버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호원은 그 후로도 민호와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언젠가 민호에게 ‘무휼이는 잘 지낸다’는 한마디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졌지만.
그나저나 얘는 대체 무슨 일이지. 이렇게 급하게 물어보는 일은 없었는데. 호원은 잠시 고민하다 답장을 적었다.
-왜?
너무 짧았나. 호원은 무슨 일 있냐는 말이라도 적어볼까 싶어 자판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나 마침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지 민호의 답변이 더 빨랐다.
-지금 권무휼이랑 조별과제 팀원들이랑 술 마시러 왔는데, 형 괜찮으시면 오실래요?
내가 왜 거길? 순간 호원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거 하나였다. 조별과제 뒤풀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거기에 왜 자신이 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권무휼이랑’이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쟤는 저녁 시간 전에는 돌아온다더니. 술 마시러 갈 거면 미리 말을 하지.
혹시 연락을 줬는데 자신이 못 본 건가 싶어 채팅창에 들어가 봤지만, 무휼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괜히 괘씸해진 호원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때 민호에게서 또다시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실은 조별과제 팀원 중에 식음료학과 누나가 있는데, 저번에 현직 바텐더로 일하는 분들 인터뷰 과제가 있다고 했었거든요. 마침 저녁때기도 하고 괜찮으시면 오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진짜 그냥 한번 물어본 거니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뒤의 내용은 변명이라도 하듯 급하게 보내온 것이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억지라는 건 아는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목적이 뚜렷한 문자메시지였다.
지금이야 강제로 쉬게 되었다지만, 본래 호원은 대학생들 인터뷰 같은 것에 일일이 응해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시영은 과 후배들과도 계속 연락하는 모양이었고 가끔씩 모교로 찾아가 상담도 해준다고 했다.
한마디로, 시영의 연락처가 없으니 호원을 대신 찔러본 것이다.
이 녀석도 참, 어지간히 끈질긴 녀석이다 싶으면서도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호원은 적극적으로 목표를 쟁취하려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영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 은근히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세련되지 못하다. 호원은 피식 웃으며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나야 상관없는데, 어린애들 노는 데 내가 괜히 끼어서 분위기 망치는 거 아냐?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원 형인데요. 오시면 저희가 영광이죠.
민호는 후다닥 답장을 하더니 잠시 후에 또 문자 하나를 보냈다.
-다들 좋대요!
그래? 호원의 입꼬리가 더 위로 올랐다. 권무휼, 나는 바람맞혀 놓고 술자리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다 이거지?
물론 호원이라고 무휼이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6시밖에 안 된 데다 그동안 빠진 죄도 있으니 어떤 상황일지는 대충 짐작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오늘 묘하게 그를 피하는 것 같던 무휼의 태도를 생각해 보니 괜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녀석을 어쩐다. 호원은 소파에 등을 푹 기대고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때 양반은 못 되는지, 무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호원은 괜히 목소리를 내리깔며 전화를 받았다.
“왜.”
[나 지금 갈 거야. 금방 가. 십 분도 안 걸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최민호 말은 그냥 농담이니까 무시해도 돼.]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통에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호원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핸드폰을 귓가에서 살짝 떼어냈다. 소리를 죽인 채 어깨를 떨며 웃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무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녁은 먹었어? 뭐라도 사갈게. 뭐 먹고 싶어? 초밥 사갈까?]
평소에는 무슨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치는 녀석이, 목소리만 들어도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눈치를 볼 거면서 연락은 왜 안 했담. 호원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권무휼.”
[응, 말해.]
“너 대학 때 인맥이 사회 나와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어?]
수화기로 멍한 음성이 넘어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방금 전까지 초대에 거절하려 했던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너 조별과제도 제대로 참여 안 했었다며. 그런데 뒤풀이까지 빠지려고? 너 그러다 욕먹는다?”
[상관없어.]
“뒤에서 팀원들 원성 소리가 들리는데?”
호원은 최대한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를 피해 전화하는 건지 뒤쪽에서 ‘권무휼 뭐 하냐!’, ‘너 진짜 갈 거야?’ 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정말로 상관없어.]
무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호원이 뭐라 하든 당장 출발할 기세였다. 호원은 자꾸만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안 돼.”
[…….]
무휼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넘어오지 않았지만,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선명했다. 호원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내가 갈 테니까 기다려.”
***
호원은 택시를 타고 민호가 얘기해 준 술집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갈까 싶었지만 그의 차는 가게 화재 때 엉망이 되어버려 수리를 맡긴 상태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왁자한 분위기가 그를 덮쳤다. 대학교 앞이라 그런지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내뿜는 활력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어, 호원이 형! 여기요, 여기!”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는 자리에 그들이 있었다.
민호가 가게 입구로 들어서는 호원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호원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자신에게 꽂히는 5쌍의 눈을 천천히 마주 보았다.
“…대박.”
수영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말을 내뱉자마자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후다닥 자기소개를 했다.
“김수영이에요! 스물두 살입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나머지 두 사람도 서둘러 자기소개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이호원입니다.”
초면인 세 사람을 향해 화사하게 웃은 그는 유일한 빈자리인 서윤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네? 아, 네네. 그럼요. 얼마든지요.”
멍하니 호원을 올려다보던 서윤은 화들짝 놀라더니 후다닥 옆자리에 두었던 가방을 치웠다.
고마워요. 호원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대각선 끝자리에 앉아 초조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는 무휼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형 바쁘신데 오시라 해서 미안해요. 갑자기 연락해서 당황하셨죠…?”
아, 저녁은 드셨어요? 여기 메뉴판이요. 민호가 슬쩍 눈치를 보다 메뉴판을 내밀었다. 호원은 괜찮다며 살짝 손사래를 쳤다.
반은 장난, 반은 심술로 온 자리였지만 그리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근데 형님 오늘따라 더 멀끔하십니다. 무슨 배우인 줄 알았어요. 아주 그냥 얼굴이 번쩍번쩍해요.”
민호는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과장되게 호원을 칭찬하며 헤헤 웃었다. 호원은 그를 향해 장난기 어린 얼굴로 씩 웃어 보이고는 수영과 서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과제가 있다면서요?”
“아, 그거 저예요.”
서윤이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보고 대충 짐작하고 있던 호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표정을 했다.
“원래 그런 인터뷰는 저보다 우리 가게 매니저인 시영이 쪽이 잘하는데-”
시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맞은편에서 민호가 눈을 빛내는 것이 보였다. 호원은 입꼬리를 더 올리며 말을 맺었다.
“가게 수리 때문에 당분간은 제가 한가하거든요. 그래서 이왕이면 직접 응해드리고 싶은데요.”
“엑.”
민호가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호원은 시선만 굴려 그를 장난스럽게 흘겨보았다.
“저희 매니저가 당분간 휴가라 본가로 내려가서 당분간 안 올 거기도 하고요.”
그 말에 민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쌤통이다. 호원은 살짝 통쾌한 기분을 느끼며 그 옆으로 시선을 굴렸다. 무휼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로는 어려울까요?”
“아, 아뇨! 전혀요! 응해주셔서 영광이에요!”
서윤은 호원의 말에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그러다 호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잠시 주저하는가 싶던 그녀는 이윽고 뒷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 과 졸업생 아니신가요?”
엥? 하고 맞은편에서 민호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고 호원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쿨럭-
물을 마시다 말고 사레들린 무휼이 쿨럭거리며 호원을 쳐다보았다. 취기 한 점 없는 푸른 눈이 당황으로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