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카밍시그널 (3)
권무휼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확신한 건, 다시 무휼의 집으로 돌아와 짐을 모두 옮긴 직후였다.
“방은 이 방 쓰면 되고, 짐 정리는 천천히 해도 돼.”
무휼은 자신의 방에서 좀 떨어진 손님방에 호원의 짐을 날라다 주며 말했다. 호원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무휼의 방 바로 옆방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는 의아해졌다.
방은 꼭 호텔방처럼 사용감 없는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고,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가 봐도 황량한 공기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방이라는 걸 느끼게 했다.
혹시 누가 쓰던 방인가 싶어, 호원은 슬쩍 무휼에게 물어보았다.
“이 방은 쓰는 방이야?”
“…아니.”
“손님방?”
“응.”
무휼은 난처한 기색으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으나 어째 물어보길 바라지 않았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저쪽 방 써.”
무휼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살짝 열려 있던 옆방의 문을 닫아버렸다.
빈방이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내 방을 멀리 배정했다는 건가. 호원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도 아닌 ‘무휼’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영 이상했다.
그가 아는 무휼이라면 당장 바로 옆방이 문제가 아니라 ‘내 방에서 같이 지내자’라며 달라붙을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까 전 차 안에서 시선을 맞추지 않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김 여사님 눈도 있으니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니면 진짜 정이 떨어졌나? 호원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후자의 가능성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에이, 설마. 그냥 자신의 과민반응일 것이다.
호원은 그렇게 위안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방이라기보다는 꼭 고급 펜션의 객실 같은 분위기가 도는 방이었다.
한쪽의 커다란 통창으로 점심때의 따가운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고, 중앙에 깔린 원형 러그 위에는 작은 티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박스를 펼쳐 짐들을 하나씩 꺼내는데,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무휼이 문간에 서 있었다.
“나 잠깐 학교 좀 다녀올게. 저녁 먹기 전엔 들어올 거야.”
“아, 그래.”
호원은 짐을 꺼내느라 숙였던 허리를 쭉 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녀올게, 하며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는 무휼의 모습을 가만 쳐다보았다.
이럴 때면 그의 나이가 고작 21살이라는 걸 되새기게 된다. 호원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 등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서늘했다.
***
무휼은 정말로, 오후에 있을 영이론 발표 후에 곧바로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저 멀끔하게 빼입고나 오라던 조장 김수영은 무휼이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A4용지 두 장 분량의 대본을 떠넘겼다.
“당장 외워. 아니, 안 외워도 되니까 읽기라도 해.”
그녀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던 터라, 무휼은 발표 직전까지 대본을 달달 외워야만 했다. 다행히 그들의 발표 내용은 꽤 흥미로웠고 대본도 깔끔하게 잘 만들어져서 줄줄 읽기만 해도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경기하는 데 익숙한 무휼은 긴장도 하지 않고 발표를 이어갔다. 중간중간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버벅거렸지만 그마저도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휼 조의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역시 너한테 발표 맡기길 잘했어. 다들 발표 내용보다도 너한테 여친 있는지가 궁금해서 질문도 제대로 못 하더라.”
수영이 깔깔 웃으며 무휼의 등을 장난스럽게 찰싹 내리쳤다. 무휼은 그래도 나름 조원인데 이렇게 묻어가도 되나 싶었지만 다른 이들이 진심으로 만족하는 듯했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그 대가는 엄히 치러야 했지만.
“성공적인 발표를 기념하며, 그동안 조별 모임 불참한 불량 조원 권무휼에게 술 한턱 쏘는 벌을 내리겠노라!”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해서 시선을 모은 민호가 엄숙하게 선포했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수영과 진욱, 서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휼은 흘긋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이제 막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대로 잡혀갔다가 언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애매했다.
호원에게 저녁 시간 전에는 돌아오겠다 했으니 그 성격에 저녁도 안 먹고 기다릴 게 뻔했다.
“나는 저녁 약속이 있는데.”
“약속? 누구?”
민호가 미간을 팍 구기며 물었다. 호원은 어떻게 말을 해야 이 원수 같은 자식이 떨어져 나갈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어머니.”
“웃기지 마. 너희 어머니 해외 계신 거 다 아는데-”
가만, 이놈 봐라? 민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히죽 웃으며 무휼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무휼이 어머니를 팔아? 너 뭐야, 누구 만나는 거야? 썸 타냐?”
눈치 빠른 새끼. 무휼은 아플 정도로 목을 죄어오는 민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의 오랜 친구는 꽤 끈질겼다.
“너 인마 안 가려고 핑계 대는 거 다 알아! 잔말 말고 따라와라? 누나, 그쪽 잡아요!”
“그래! 너 그동안 땡땡이친 값은 해야지!”
대체 언제 친해진 건지, 민호에게 맞장구를 치며 서윤이 잽싸게 무휼의 다른 쪽 팔을 붙들었다.
도움을 구하려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니 수영은 이미 근처 치킨집 이름을 검색하고 있었고, 진욱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편이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은 무휼은 결국 학교 밑 술집으로 질질 끌려가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휼은 역시 아까 전에 도망갔어야 했다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
탕, 소리와 함께 커다란 맥주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저러다 깨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컵이 튼튼한 건지 수영의 힘 조절이 절묘한 건지 다행히 금 간 곳 하나 없었다.
“아니, 진짜 어이없지 않냐?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라고 다녀오면 도움 될 거라 큰소리 떵떵 치더니, 알고 보니 무임금 노동이었다니까?”
“그러게 교수들이 추천하는 곳은 인턴으로도 가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 놓고 일은 딱 시답잖은 잡일만 시키고. 제대로 뭐 배우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내가 열이 받겠니, 안 받겠니?”
안 그래, 진욱아? 너도 이해하지?
수영은 제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진욱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커다란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미 그녀 옆에는 아르바이트생이 미처 치우지도 못한 빈 잔이 즐비해 있었다.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서윤 언니까지 그렇게 말하기예요?”
“이미 한다고 했으면 어쩔 수 없지, 뭐. 자자, 짠 해줄게. 마셔, 마셔.”
서윤이 맥주 글라스에 소주를 콸콸 부으며 쓰게 웃었다. 그녀는 상당한 말술인 듯, 혼자만 소주에 맥주를 거의 반반 비율로 섞어 마시고 있는데도 취한 기색 하나 없었다.
맞은편에서 그런 서윤의 모습을 신기한 동물 보듯 하던 민호가 옆자리에 앉은 진욱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저 누나 원래 이렇게 잘 마시냐? 지금 제정신인 건 맞지?”
“서윤 누나? 야야, 말도 마라. 저 누나 진짜 괴물이야. 과에서도 유명하잖아.”
조원들 중 유일하게 무휼, 민호와 동갑인 이진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는 공과대 학생이었지만 교양 과목을 이것저것 듣는 데다 의외로 발이 넓은 타입이라 인문대 상경대 공대 가릴 것 없이 친구가 많았다. 덕분에 듣는 소문도 많은 모양이었다.
“왜, 우리 학교 식음료학과 유명하잖냐. 전문대도 아니면서 전문대 학과 있다고. 실제로 그 과 나와서 잘된 사람도 많고.”
“그건 그렇지.”
민호도 그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과가 개설된 뒤로 꽤 시간이 지나서 신우대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과가 신설된 당시는 꽤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잡음은 신우대 식음료학과에 첫 교수가 부임하며 모두 사라졌다는 모양이었다.
“그 과 만든 교수님이 그쪽에서는 거의 뭐 전설급이라며.”
“심지어 그 전설께서 가끔 특강도 해주신다잖냐. 그거 하나 보고 전문대에서 공부 빡세게 해서 편입하는 애들도 있다더라.”
그리고 그런 독한 애들 사이에서도 유독 독한 게 바로 저 누나, 박서윤이다 이거야. 진욱은 진지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그러니까 잘못 걸리지 않게 조심해, 하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호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윤에겐 절대 개기지 않겠다 다짐했다.
“근데 무휼이 쟤는 괜찮냐? 아까부터 죽상인데.”
진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호 옆에 앉은 무휼을 고갯짓해 보였다.
그는 절대 도망 못 친다는 민호의 엄포에 밀려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의 오 분에 한 번 간격으로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야, 고민하지 말고 그냥 부르라니까?”
민호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노려보는 무휼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시곗바늘은 이제 막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들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무휼은 뭘 그리 고민하는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역시 난 이만 가야겠다.”
무휼이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로 나온 맥주잔을 막 받아 들던 수영이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가게? 너 진짜 약속 있어?”
동그래진 눈이 아쉬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인이 생각보다 웃긴 녀석이라 퍽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만만찮게 웃긴 성격인 민호도 마음에 들었고, 내성적인 듯 보여도 의외로 친화력 좋은 진욱과 서글서글하면서도 의지가 되는 언니인 서윤과도 더 친해지고 싶었다.
그동안 무휼 빼고는 몇 번 카페에서 보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리를 마련하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젠 조별과제도 끝났으니 언제 또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기실 이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으므로,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무휼의 행동에 서운해하는 사람 역시 한둘이 아니었다.
“야아, 왜 벌써 가려고 그래. 모처럼 친해졌는데 좀만 더 놀자.”
“약속 시간 몇 신데? 가까워?”
진욱과 민호가 못 간다며 입구를 몸으로 막고 매달렸다.
“아 좀-”
무휼이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리는 민호를 밀어냈다. 민호는 힘에 밀려 떨어지더니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그래, 가라 가. 치사한 자식…. 근데 누나들, 이따 저 아는 형님 한 분 오실지 모르는데 괜찮아요?”
“아는 형님? 무슨 형님?”
무휼은 핸드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들었다.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집에 들어갈 때 저녁거리를 좀 사갈까 싶었다.
그때, 그의 귓가로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이름이 내리꽂혔다.
“호원이 형이라고, 엄청 멋지고 잘생긴 형님 한 명 있거든요.”
뭐? 누구? 무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민호는 이미 그에게서 관심이 멀어졌는지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자기가 끼면 분위기 망치지 않겠냐고 하는데… 누나들이랑 진욱이만 괜찮으면 합석 어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분위기 망치는 사람 못 봤지. 당장 불러.”
꽤 사교적인 편인 수영이 신난다며 찬성했다. 그러면서 무휼에게 살짝 눈을 흘기는 것이 ‘넌 이 상황에도 갈 거냐’라고 눈치를 주는 듯했다.
그러나 무휼을 나가려고 일어서려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