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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62)화 (62/101)

제62화. 카밍시그널 (2)

집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그 후로 한참 동안 말없이 움직이기만 해야 했다. 재와 먼지, 소화액이 뒤엉켜 엉망이 된 안을 대충이나마 치우고 멀쩡한 물건을 찾는 게 생각보다도 훨씬 고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던 호원의 살림살이는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옷과 모자, 가방 등은 구석 방 벽장 안에 넣어두었던 겨울옷과 잘 입지 않는 옷 정도만 겨우 건졌고, 주방 찬장 안의 그릇과 컵은 금이 갔거나 재가 눌어붙어 도무지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책등만 겨우 남아 있는 책과 무늬인 양 그을려 버린 카펫, 반쯤 타다 만 이불이며 베개 따위의 침구는 예상했던 대로 모두 쓰레기통행이 되었다.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처참하네.”

호원은 실소를 흘리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입이 닿는 테두리 부분에 고운 파란색 무늬가 들어간 찻잔은 그가 아끼던 물건이었지만, 곰팡이가 핀 것처럼 재가 들러붙어 있었다.

중국 바텐더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기념으로 사온 거였는데. 호원은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커다란 종이봉투에 던져 넣었다. 거실 쪽에서는 무휼이 군데군데 그을리고 구멍 난 소파를 구석으로 밀어내고 카펫을 들어냈다. 매캐한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한참을 콜록거려야 했다.

“야, 야. 마스크 쓰고 해, 마스크!”

호원이 식겁을 하며 테이블 위에 두었던 마스크를 던져주었다. 마스크는 집 안 꼴을 본 무휼이 근처 편의점에서 목장갑과 함께 급하게 사온 것이었다.

제가 사와 놓고는 정작 쓰지는 않는 무휼의 모습에 호원이 쯧쯧 혀를 찼다. 무휼은 팔랑거리며 발치로 떨어지는 마스크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씩 웃으며 호원을 돌아보았다.

“괜찮겠어? 내가 마스크 써도.”

“뭔 소리야?”

쟤가 먼지 먹더니 돌았나. 호원이 눈썹을 구겼다. 무휼은 허리를 굽혀 마스크 봉투를 집어 들었다. 목장갑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봉투 윗부분을 죽 잡아 찢더니, 새하얀 마스크를 꺼내 입가에 살짝 댔다.

“내 얼굴 좋아하잖아. 가리면 아쉬워서 어쩌려고.”

커다란 눈이 아치형으로 휘더니 긴 속눈썹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위로 길게 휘어 올라가 있을 게 뻔했다.

“…….”

호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당장 등짝부터 맞았을 짓을 앙큼하게 하는 꼴에 기가 막힌 탓도 있었지만, 땀에 젖은 채로 쓸어 올려 훤히 드러난 이마와 시원시원한 눈매에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난 언제가 됐든 쟤랑 싸우면 도저히 못 이기겠다. 호원은 겸허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걸레를 집어 인정사정없이 내던졌다.

***

박스 두어 개에 담긴 짐을 트렁크에 싣고 나니 더 챙길 만한 물건도 없어졌다. 재투성이인 꼴로 비싼 차에 오르려니 영 황송해서, 호원은 차에 오르기 전에 몇 번이고 머리와 옷을 털어야 했다.

‘그나저나 진짜 쟤네 집에 가야 하나?’

차 문손잡이에 손을 댄 채로 호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어젯밤 신세 진 것만으로도 미안한데 이 이상 폐를 끼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역시 나 그냥 근처에-”

“타기나 해. 어머니도 이미 아셔.”

“뭐?”

호원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가? 뭘 아신다고?

상황을 깨달은 호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난처함이 뒤섞였다. 무휼은 그 얼굴을 흘긋 보더니 차 앞을 빙 돌아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김 여사님한테 말했잖아. 그럼 몇 시간 내로 보고가 들어가거든.”

“…그거 괜찮은 거야?”

“감시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김 여사님이랑 친하셔서 그래. 두 분이서 틈만 나면 수다를 떠시거든.”

그래서 김진수에게 다쳤을 때도 집에 들어가길 꺼렸던 거구나. 호원은 이제야 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허락을 받았다고 그 집에 들어갈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좀… 꺼려 하시지 않을까.”

“왜?”

호원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평범한 대학 친구도 아니고, 아무리 건전한 바라지만 술집을 경영하는 입장이니 좋지 못한 인상을 줄까 봐 걱정스러웠다.

호원은 스스로 선택한 직업을 부끄럽다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세간의 눈초리는 곱지 못했다. 그리고 호원은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그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하나뿐인 아드님과 ‘그런’ 관계에 있는 남자. 도저히 반길 만한 구석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나니 더욱 망설여졌다. 호원이 차에 타지 못하고 고민하자 무휼은 그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살짝 눌렀다.

“괜찮으니까 타. 오히려 좋아하실 테니까.”

아까 김 여사님 반응 봤잖아? 무휼이 안심하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인지하고 나서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호원이 의아한 얼굴로 무휼을 돌아보았다. 무휼은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슥 올렸지만 이내 호원의 등에서 손을 떼고 조금 물러섰다.

그 모습에 호원의 미간 사이에 골이 깊어졌다. 호원이 막 입을 열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전화 받아. 안에 뭐 두고 온 거 없나 보고 올게.”

무휼이 툭 던지듯 말하고는 호원이 말릴 틈도 없이 등을 돌렸다. 차 안에서 편하게 통화하라는 배려인 듯했다.

호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의외의 사람이었지만 그 용건만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선생님.”

[원이 너 괜찮아?]

걱정과 흥분이 어린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호원의 스승이자 어머니뻘인 존재, 김순영 여사였다.

어떻게 또 소식을 들었는지, 그녀는 호원의 가게에 화재가 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바 3월이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잘 알고 있는 만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순영의 걱정이 향하는 방향은 가게도, 당분간의 영업 정지로 인해 벌어질 손실도, 하물며 망가진 가게를 복구하는 일도 아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가장 먼저 그 말부터 물어봐 주는 그녀의 따스함에 호원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내리눌렀다. 다행히 대답하는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마침 그때 장 보러 나가 있었거든요.”

[그럼 다행이다만… 많이 놀랐지?]

“…네.”

순영에게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호원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서 땀에 젖어 한데 덩어리진 재와 머리카락 한 올이 달랑거렸다. 호원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느 정도 정리되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네가 퍽이나 그랬겠다. 아마 주변 사람 몰래 혼자 정리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하게 있었을 테지.]

호원은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은 하등 틀린 것 하나 없었다.

호원은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녀에게 화재에 관한 일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마 순영이 화재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시영이나 단골손님들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원아.]

수화기를 통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렴. 소중한 사람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란다.]

호원은 순영이 그를 ‘원아’ 하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그 특유의 애정과 사랑이 담뿍 담긴 음성에는 하염없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네, 그럴게요.”

그래서일까. 대답도 순순히 나왔다. 비록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볼게요’를 줄일 말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대답이 호원의 최선이라는 걸 순영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 대답에 낮게 웃던 순영은 이윽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호원이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가 더욱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저번에 얘기했던 일은 어떠니? 아직 생각이 없어?]

좋은 기회이고 상황도 이러니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며 순영이 물어왔다. 호원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한 달에서 두 달 정도면 되는데. 네가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역시 너무 좋은 기회이다 보니 자꾸 욕심이 드는구나.]

순영이 온전히 선의로 제안을 해주고, 그가 답변할 때까지 오랜 시간 기다려 준 것은 호원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가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고사해 왔던 일을, 당장 가게가 이렇게 되었다고 냉큼 받아들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돈이 필요한 건 맞았지만, 어쩐지 순영의 호의를 이용하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

[그래, 그러려무나.]

순영은 원하던 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선히 대답했다. 호원은 재촉하지 않는 그녀에게 속으로 감사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 긴 통화는 아니었음에도 꼭 따듯한 물에 잠겨 있다 나온 것처럼 피곤함과 나른함이 몰아쳤다.

호원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카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검댕이 묻었다면 나중에 닦으면 되겠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의 시야에 계단을 내려오는 무휼이 들어왔다.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타이밍 한번 귀신같았다.

호원은 무휼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긴 다리를 접어 안을 딛고 허리를 굽혀 커다란 몸을 들여놓는 모습이 우아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무휼은 별거 아닌 동작도 산뜻하고 우아해 보일 때가 있었다.

호원이 가만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무휼이 씩 웃으며 조수석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왔다.

“왜? 새삼 잘생겼어?”

“뭐래.”

“아닌 척은. 내 얼굴 좋아하면서.”

그렇다고 한 적도 없는데 무휼은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단언했다. 말이 안 통하는 녀석.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단어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던 호원은 시동을 켜는 무휼에게 시선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무휼아.”

“응.”

무휼은 후진을 하면서도 지체 없이 대답했다. 사이드미러를 보던 시선이 힐긋 호원을 향했다가 돌아갔다.

“너 다니는 학교가 신우대였지?”

“응. 근데 그건 왜?”

무휼이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되물었지만 호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휼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호원을 쳐다보았다. 호원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신우대란 말이지….”

나직한 중얼거림이 그의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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