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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61)화 (61/101)

제61화. 카밍시그널 (2)

“야, 네 맘대로 그러면 어떡해?”

식사가 끝나고 다시 2층 무휼의 방으로 올라온 호원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따졌다. 그러나 무휼은 그런 그를 흘긋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드레스룸 문을 열어젖혔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 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르던 호원이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남에게 신세 진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하필 그 상대가 무휼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여기 있다 보면 무휼의 어머니를 만나게 될지도 몰랐고, 만약 두 사람 사이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아무튼 안 돼.”

호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무휼은 양옆으로 늘어선 옷들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호원을 향해 몸을 틀었다.

“걱정 마. 당신이 걱정하는 상황 안 만들어.”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알기는 해?”

호원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가 아차 하는 얼굴로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가 나와 버렸다. 그래도 딴에는 생각해서 말해준 건데 괜히 무안 준 게 아닌가 싶었다.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무휼이 성큼 호원 앞으로 다가섰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부드러운 빛을 품고 일렁였다.

호원은 그제야 무휼이 아직도 배스 가운 차림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훅 끼치는 청량한 향에 가신 줄 알았던 취기가 다시 오르는 기분이었다.

얼굴로 몰리는 열을 들키지 않으려 시선을 내리자 느슨한 옷깃 사이로 선명한 쇄골 라인과 단단한 어깨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원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나 무휼은 벌어진 간격만큼 몸을 붙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긴장하지 마. 손 안 대.”

“그게 아니라-”

“아니라고?”

그럼 손대길 원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호원은 시선 둘 곳이 없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 행동을 후회했다.

시야 한복판에 무휼이 입은 배스 가운의 매듭이 지나치게 선명한 광경으로 들어찼다.

이제 와서 시선을 돌리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호원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경보를 울려댔지만 아직 술기운을 온전히 배출해 내지 못한 뇌는 사고를 거부했다.

하얗게 변한 머리를 때리고 싶다 생각하는 찰나였다. 무휼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올라와 매듭 위에 안착했다.

헉, 하고 호원이 숨을 들이켰다. 뭐, 뭐지? 얘가 왜… 아니 지금 뭐 하려고? 제정신인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호원이 무휼의 어깨를 밀어내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진지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휼과 눈이 마주쳤다.

미동도 없는 푸른 눈이 시야를 꽉 붙드는 듯했다. 아래에서 천이 스치며 매듭 풀리는 소리 같은 게 나는 듯했지만 호원은 차마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권무휼, 너….”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얕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국 호원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휙 등을 돌렸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당황과 경악이 반씩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미친놈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데? 너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는 있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뭐 해?”

당황해서 마구 내뱉던 목소리가 덤덤한 한마디에 잘려 끊겼다. 어? 호원이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무휼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담백하게 들렸던 것이다.

의아해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편해 보이는 슬랙스에 티셔츠로 갈아입은 무휼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준비 안 해?”

무슨 준비? 호원이 입을 살짝 벌리고 벙찐 얼굴로 쳐다보자 무휼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집에 가서 멀쩡한 짐 있으면 챙겨 와야지.”

그렇게 말하는 무휼의 손에는 검은색 카드키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

내가 이런 애를 조수석에 태웠구나. 호원은 어쩐지 허탈하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휼 말로는 ‘어머니 것’이라던 검은색 승용차는 빙판 위를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호원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여유롭게 운전하는 무휼을 흘긋 쳐다보았다.

속도도 꽤 빠른 편인데 코너링이며 방지턱을 넘을 때 물 흐르듯 넘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비단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차가 좋은 차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제 스물한 살 먹은 게 무슨 운전을 이렇게 잘하나 싶어서 쳐다봤더니 무휼은 싱긋 웃고 말 뿐이었다.

“이 층 쪽은 밖만 살짝 그을렸다고 했었나? 안에는 괜찮아?”

답지 않게 차분한 말투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아까부터 가면처럼 웃는 얼굴도 그렇고, 꼭 가게에서 손님을 대할 때의 호원 자신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냉랭하게 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담긴 느낌은 아닌 표정과 행동.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적당히 신경 쓰는, 건조하다면 건조한 분위기.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을 듣는 게 불안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젯밤에 저지른 짓이 있다 보니 무휼이 정떨어졌다고 해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하긴, 어제 좀 많이 진상이긴 했지. 호원은 머쓱한 얼굴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도 머릿속에 끈적한 점액질이 들러붙은 것처럼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차가운 유리창에 대어 식히며 호원은 흘긋 무휼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운전하는 옆모습이 조각처럼 매끈하다. 무심코 쳐다봤을 뿐인데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오래 머물렀다.

무휼의 행동을 종잡을 수 없는 거야 지금까지도 숱하게 그래 왔지만, 대체로 표정이나 행동에서 속마음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이번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왜 그래?”

오랫동안 긴 침묵이 이어지자 무휼이 슬쩍 시선을 돌려 그를 살폈다. 질문에 대한 답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게 영 이상했던 모양이다.

호원은 창밖으로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안은 뭐… 엉망이긴 해도 건질 건 있겠지.”

소방차의 소화액과 아래에서 올라온 재, 그을림으로 엉망일 집 안을 떠올리며 호원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현금이나 귀금속 같은 건 집 안에 두는 타입이 아니라 피해가 없을 테지만, 옷이며 집기류, 책들은 전멸이나 다름없을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열심히 읽어두는 건데. 호원은 책장에 넣어두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들의 제목을 더듬으며 후회했다.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책등에 쓰인 제목들도 흐릿했다.

“마실 거라도 사갈까?”

옆에서 넘어온 음성에 호원의 고개가 다시금 옆을 향했다. 무휼은 저 앞에 보이는 카페를 고갯짓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의견을 묻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가운 커피라도 마시면 안개 낀 것처럼 멍한 머릿속이 좀 나아질까 싶어, 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무휼은 기다렸다는 듯이 갓길에 차를 대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린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빤히 쳐다보던 호원은 창문을 살짝 내리고 긴 숨을 토해냈다.

“쪽팔리게 진짜….”

갑자기 어제의 기억이 밀려오며 또다시 얼굴이 화륵 불탔다. 미쳤어, 이호원. 대체 어쩌자고 그런 추태를….

가뜩이나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호원은 만약 한참 연상인 상대가 자신 앞에서 그런 꼴을 보였다면 당장 오만 정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취객들의 추태를 보는 일이야 익숙하긴 하지만, 손님은 손님이고 연인은 연인이지 않은가. 호원은 창문 유리에 머리를 콩콩 부딪치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술김에 뭔가 안 해도 될 말을 지껄였던 것도 같은데, 그 부분이 기억나질 않았다. 하필 필름이 끊겨도 거기서 끊기냐 싶어 호원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뭐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열심히 생각해 내려 했지만, 오늘 묘하게 차분한 무휼의 분위기를 보면 뭔가 못 할 말을 한 건 맞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절대 취하지 말아야지. 아니, 꼭 그렇게 다짐하지 않아도 당분간은 술 따위는 꼴도 보기 싫었다.

호원은 스스로의 추태를 마음 깊이 되새기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집에 도착하니 그새 한층 황량해진 건물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호원은 새삼스럽게 가슴이 욱신거리는 기분에 눈을 내리깔았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가족을 떠나보내는 듯한 허탈함과 슬픔,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무신경한 이의 발길질 한 번에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울분이 가슴께에 빠듯하게 들어찼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까?”

그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걸까. 무휼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호원은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앞장서서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도 군데군데 불에 타 난간이 허물어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고꾸라질 것 같은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는데, 돌연 발밑이 훅 꺼졌다.

“어?”

호원의 왼쪽 발아래 계단이 바스러지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본능적으로 팔이 난간을 잡으려 했지만 계단 바닥도 바스러지는 판에 손잡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난간이 있던 곳을 향해 뻗은 손은 허공만 긁으며 허우적거렸다.

망했다. 호원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하와 1층을 겸하고 있는 가게의 층고가 높지 않아 떨어져도 큰 부상은 입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팔만 무사하면 된다. 호원은 그런 생각으로 두 팔을 꽉 감싸 안았다.

“또 정신 놓고 있지.”

몸이 확 당겨지는 감각에 뒤이어 등 뒤로 따듯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갑작스럽게 변한 자세에 호원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바로 뒤에서 호원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치고 있던 무휼이 심드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술이 덜 깼나. 호원은 어제부터 이어지는 추태의 퍼레이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휼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밀착해 있는 등을 통해 그의 어깨와 가슴 근육이 움직이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무휼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 건 꽤 여러 번이었던 듯했다. 새삼스럽게 믿음직하지 못한 연상이었구나 생각하며 호원은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무휼은 균형을 되잡고 계단을 올라가는 호원의 등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천천히 올라온 손이 호원의 등 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허공에 뚝 멈췄다.

긴 손가락이 천천히 굽어들다 꽉 쥔 주먹이 되었다. 무휼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호원의 뒤를 따라 계단 층계에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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