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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60)화 (60/101)

제60화. 카밍시그널 (1)

찌르듯 날카로운 햇빛에 눈이 따끔거렸다. 호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가 낯선 천장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를 도끼로 쪼개는 것만 같은 두통이 밀려들었다.

“하….”

호원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 옆을 짚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앞에서 하얀 빛이 번뜩거리는 듯했다. 맘 같아서는 이대로 드러누워 한숨 더 자고 싶었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이 그의 정신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 말 안 듣는 똥깡아지야아.’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데에- 연예인도 아닌 게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아씨- 목소리도 좋아…. 미친놈….’

‘화장실이 어디야.’

머릿속을 아련하게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추태에 호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발, 내가 뭘 한 거야.’

죽자. 지금 당장 죽어버리자. 호원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역시 지금 당장 죽는 수밖에 없다.

호원이 어디 목매달기 좋은 기둥 없나 천장을 훑어볼 때였다.

“일어났어?”

인기척도 없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호원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한번 내려앉았다가 도로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감각이 들 리 없으니까.

“…어어.”

호원은 어색하게 대답하면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무휼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디서 말하는 거지? 의아해하는데 침대 옆쪽에 놓인 긴 소파가 눈에 밟혔다.

대한민국 남자 평균 신장은 가뿐히 넘을 법한 긴 소파임에도 무휼의 발목이 팔걸이 밖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 반대쪽에서 무휼의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피곤에 절어 푸석한 얼굴과 뻗친 뒷머리가 간밤의 고생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저 새끼는 왜 자다 일어나도 잘생겼냐.’

호원은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쪽팔림과 수치심을 애써 외면하며 딴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잠이 덜 깨 몽롱한 푸른 눈이 천천히 위아래를 훑어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을 때는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술은 깼나 보네.”

×발. 호원은 생전 안 하던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차라리 필름이 끊겼다고 할까. 그럼 덜 민망할 것 같은데. 호원은 고민 끝에 조금이나마 연상의 위엄을 지킬 만한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이내 이어진 무휼의 말에 전부 다 포기해야 했다.

“얼굴을 보아하니 다 기억하나 본데. 천천히 씻고 나와. 갈아입을 옷은 꺼내둘 테니까.”

무휼이 방의 한쪽에 딸려 있는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원은 아무 대꾸도 없이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는 동안 속이 뒤집히고 머릿속이 쾅쾅 울렸지만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등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호원은 샤워부스 손잡이에 수건으로 목을 매는 것과 세면대에 물을 받아 얼굴을 박는 것 중 뭐가 더 죽을 가능성이 높은지 고민하며 화장실 문을 탁 닫았다.

문에 기대서서 멍하니 허공을 보던 호원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옷을 벗고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찬물을 머리끝부터 뒤집어쓰니 이제야 좀 제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숙취와 쪽팔림에서 벗어나자마자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그의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보수 공사는 어떻게 하지, 어디에 맡겨야 할지 아직 못 정했는데. 보틀도 주문해야 하고, 보수 후에 주방이랑 홀 쪽 모두 인테리어를 바꿔야 할 거 같던데. 인테리어는 업체에 맡겨야 하나? 하지만 전부 맡기기엔 돈이… 그렇다고 직접 할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가게 앞에 안내문 하나 붙이지 못했다. 손님들이 평소처럼 들렀다가 다 타버린 가게를 보면 당황할 텐데.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자금이었다.

가게를 되돌리는 것만 해도 큰돈이 드는 데다 공사 기간 동안 영업을 하지 못해 생기는 손해도 문제였고, 당장 화재 원인이 불투명한 이상 보험금이 어떻게 들어올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공사야, 그동안 모아둔 돈을 다 써서 해결한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인데. 호원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부 위로 사정없이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가도 절망적인 현실을 떠올리면 아득해지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잠시 후, 수건을 어깨에 걸친 호원이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방 안을 훑어봤지만 당장 보이는 시야에 무휼은 없었다.

방이 하도 넓어서 보이는 공간이 다가 아니라는 게 영 불안했지만, 다행히 발치에 놓인 속옷과 바지, 반팔 티를 보니 옷을 가져다 놓고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속옷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새것에, 무난한 디자인의 반바지는 허리를 고무줄로 조일 수 있는 것이었다. 세세한 배려에 오히려 머쓱해진 호원은 옷을 갖춰 입고 방문을 열어보았다.

눈앞에 널따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복도로 걸어 나가니 화려한 샹들리에와 장식품들이 곳곳에 배치된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게 한국에서, 그것도 서울에 있는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인가 싶게 호화로운 집이었다.

호원은 저택이라 불러야 할지 집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왔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바닥이 거울처럼 매끈한 바닥에 닿을 때마다 황송해서 안절부절못할 지경이었다.

혹시 발자국 같은 게 생기진 않았나 싶어 돌아보니 덜 닦은 물기가 바닥 여기저기 찍혀 있는 게 보였다.

나중에 걸레든 뭐든 달라 해서 닦아두자. 호원은 고개를 저으며 1층 거실에 내려섰다. 푹신한 러그에 발을 딛자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어머, 벌써 내려왔어요? 좀 천천히 와도 괜찮은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호원은 빽 소리를 지를 뻔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니 중년의 여성이 마른 수건에 손을 닦으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네? 아… 괜찮습니다.”

호원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하다시피 하며 눈을 굴렸다. 그러나 광활하기까지 할 정도로 넓은 1층 어디에도 무휼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허공을 배회하는 호원의 시선을 발견한 상대가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도련님은 지금 씻고 있어요. 그나저나 웬일로 아침 메뉴 주문을 다 하나 했더니 친구분 먹이려고 그랬구나?”

도련님? 호원은 숨을 들이켜다 말고 콜록거렸다. 그녀는 푸근하게 웃으며 호원을 식탁으로 이끌었다. 호원은 드라마에서나 봤던 커다란 대리석 식탁에 놀라는 동안, 그녀는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국그릇을 들고 왔다.

“방금 끓인 거라 뜨거워요. 조심해서 들어요.”

황태가 들어간 해장국이 뽀얀 국물을 내보이며 호원을 향해 김을 뿜었다. 호원은 향긋하게 올라오는 콩나물과 국물 향을 맡으며 얼떨떨해했다.

“저 그런데….”

“김 여사님.”

호원이 막 말을 걸려는 찰나, 배스 가운 차림으로 머리에 수건을 얹은 무휼이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식탁에 앉아 있는 호원을 흘긋 보고는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때요? 잘생겼죠?”

뭐? 호원은 자신을 눈짓하며 묻는 무휼의 행동에 허공에 들던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옆쪽에서 흥분 어린 대답이 들려왔다.

“그걸 말이라고? 어쩜 이렇게 참하니 예쁘게 생겼나 몰라. 도련님 친구만 아니었으면 당장 데려가서 내 아들 삼는 건데.”

‘김 여사님’은 무휼의 앞에도 고봉밥과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화색을 띠었다. 격의 없이 말하는 것이 무휼과는 꽤 오래된 사이처럼 보였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호원만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슬쩍 치뜬 눈으로 그만하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무휼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어디 가서 꿇리지 않겠죠?”

“어유, 무슨. 난 솔직히 도련님보다 이쪽 친구분이 더 잘생겼는걸?”

“김 여사님 보는 눈이 있으시네.”

무휼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얄밉도록 잘생긴 얼굴을 쏘아보던 호원이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친구분 성함은 뭐예요?”

“아, 이호원입니다.”

김 여사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호원이 퍼뜩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김 여사는 그 어색한 행동을 귀엽다는 듯 보더니 호원 앞의 반찬들을 앞으로 당겨주었다.

“많이 먹어요, 호원 학생. 아까 서 있는 거 보니까 너무 말랐더라.”

호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김 여사는 그 모습을 테이블에 양손을 대고 턱을 괸 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살다 살다 도련님 친구 아침상을 다 차려줘 보네. 그동안 친구라고 오는 건 민호 학생뿐이라서 우리 도련님은 다른 친구는 없나 걱정했다니까요?”

“무휼이가요?”

호원은 놀라 무휼을 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싸가지 없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친구가 별로 없어 보이긴 했다. 가끔 가게에 놀러 오는 민호 정도가 다인 게 아닐까.

“내가 도련님이랑 사장님 모신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동안 여자친구는커녕 민호 학생 말고는 친구들도 데려온 적이 없지 뭐예요.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아깝게시리-”

슬쩍 무휼 쪽을 흘겨보는 얼굴이 친조카를 대하는 이모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무휼은 별다른 말 없이 국에 밥을 말아 떠먹기 시작했다. 호원은 김 여사님을 자신에게 떠맡기고 태평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을 얄밉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집에 불이 났다면서요? 당장 지낼 곳은 있어요?”

끝내 김 여사님이 그 말까지 꺼냈을 때, 호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무휼을 곁눈질로 노려보았다. 대체 자신이 씻는 그 잠깐 사이에 무슨 말까지 한 건가 싶었다.

그때, 무휼이 깨끗하게 비운 국그릇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낼 거예요.”

“어머, 정말요?”

“어?”

호원이 젓가락으로 집어 들던 장조림을 뚝 떨어뜨렸다. 그러나 무휼은 설명도 없이 국그릇을 들고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가서 직접 밥과 국을 퍼담았다.

묵묵히 움직이는 등짝을 사정없이 노려보고 있는데, 호원의 시야로 김 여사님의 환한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머, 너무 잘됐다! 머무는 동안 푹 쉬었다 가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아, 그렇지?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못 먹는 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내는 그녀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버린 호원은 차마 아니라는 말도 못 하고 절절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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