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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58)화 (58/101)

제58화. 어린 개의 육감 (2)

방 안이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숨소리마저 죽인 네 사람 가운데에는 타닥거리는 숯불의 불티 튀는 소리와 맹렬하게 돌아가는 환기구의 은은한 소음만이 맴돌았다.

“왜? 끔찍하게 아끼는 형이 곤란해하는데 그깟 방 하나 잡아주면 안 되는 건가?”

진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어조는 날카롭게 날이 선 채 무휼을 향했다.

“어. 안 돼.”

지금 그딴 걸 말이라고 지껄이냐. 무휼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한 음절씩 씹어 뱉듯 내뱉는 목소리에 그의 대각선 쪽에 앉아 있던 시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러다 진짜 큰일 난다. 호원은 속으로 혀를 차며 손을 들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무휼의 얼굴을 턱 덮었다.

“넌 좀 진정하고.”

저도 모르게 무먹?!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낸 무휼은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호원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호원은 이미 진혁에게로 고개를 돌린 뒤였다.

옆얼굴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열기를 띤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호원이 불판 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고기 탄다, 진혁아.”

“아.”

진혁이 아차 싶은 얼굴로 집게를 고쳐 잡았다. 살을 엘 듯하던 팽팽한 긴장감이 수그러들자 호원이 무휼의 얼굴에서 손을 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호텔은… 일단 집에 들어가 보고 정 답이 없으면 당분간 방을 잡든가 해야겠지.”

“그럼-”

“근데 그 방을 네가 잡아줄 필요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희망 어린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던 진혁이 이어진 호원의 말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반대로 무휼은 장난감을 쟁취한 아이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진혁은 잠시 침묵하다 손에 든 집게도 내려놓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호원을 쳐다보았다.

“부담 주려는 거 아니에요, 형. 그래도 싫으면… 음… 그래, 위자료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위자료?”

“진수 일, 피해 보상도 제대로 안 받았잖아요.”

진혁으로서는 이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거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괜히 안 좋은 기억을 끌어내 호원에게 반발심만 갖게 할 수도 있을뿐더러, 모처럼 좋게좋게 넘어가던 그 자신도 냉대받을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진심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그저 호원을 돕고 싶고,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사실만을 말하는 얼굴에는 그 어떤 꿍꿍이나 흑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위자료니 피해 보상이니 하는 말 싫다고,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의 진심이 투명하다 해서, 호원이 반드시 그 진심을 받아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담담하게 내뱉는 호원의 말에 진혁이 입술을 달싹이다 지그시 말아 물었다.

“그리고 그 일은 네 동생이 한 일이지 네가 한 일도 아니잖아. 책임을 지는 건 그 애 몫이야.”

그리고 그 애는 사죄하는 것으로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어. 호원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진혁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피해 보상을 받지 않겠다던 말이 그런 뜻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형….”

“그리고 그 일로 너도 많이 힘들어했잖아. 네가 부채감 느낄 필요 없어.”

그러니까 이 얘기는 여기서 끝. 호원이 더는 누구도 말을 얹지 못하도록 딱 잘라 선언했다.

무휼과 진혁은 더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한쪽 자리에 불편하게 앉아 홀로 조용히 체해 가던 시영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식사 자리가 불편해졌네. 이제 안 그럴 테니까 맘 편히 들어요.”

그런 시영의 기색을 눈치챈 진혁이 머쓱하게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영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래, 진혁이 너 때문이니까 책임져. 여기서 가장 비싼 술이라도 주문하라고.”

호원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씩 웃으며 말했다. 마냥 거절만 해대던 시영도 그 말에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잖아도 배가 차기도 전에 폭풍 같은 상황을 겪느라 더 허기가 지던 참이었던 데다,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환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진혁은 호원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고는 점원을 불러 청주와 증류주를 한 병씩 주문했다. 점원이 잔과 길쭉한 모양의 고급스러운 병을 들고 들어오자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사실 술 덕분이라기보다는 호원이 단칼에 진혁의 제안을 거절한 데 만족한 무휼이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기 때문이었지만, 시영과 호원은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모처럼 맛집에 왔는데 즐겨야지. 어차피 내일부터 휴가니까 마음껏 마셔.”

호원이 그렇게 말하며 시영의 잔에 청주를 채워주었다. 시영은 소리 내 웃으면서 냉큼 잔을 들어 올렸다. 생각해 보니 이게 얼마 만의 장기 휴가인지 모르겠다며 시영이 엄살을 부렸다.

직업의 영향인 건지, 호원도 시영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세 사람 모두 만만찮은 술고래에 주당이라 술잔을 마를 새가 없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해 슬쩍 한 잔 마셔보려던 무휼의 손을 호원이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넌 안 돼.”

“왜!”

이번에는 진짜 너무했다. 애 취급도 정도가 있지. 무휼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 항의하자 호원은 가볍게 대꾸했다.

“재활 중이잖아. 술 금지.”

“허.”

무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직하게 한숨만 내쉴 뿐, 얌전히 물만 들이켰다.

‘두고 보자, 이호원.’

가느스름하게 뜬 푸른 눈동자가 즐거워 보이는 호원의 옆모습을 흘긋 노려보았다.

***

결국 그날 저녁 호원의 잠자리는 무휼에게 맡겨졌다. 호원이 무휼의 억지를 받아주었거나 진혁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호원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진짜 괜찮겠냐?”

진혁이 반은 걱정스러운 얼굴, 나머지 반은 못 미덥다는 얼굴로 무휼을 쳐다보았다. 무휼은 진혁의 차 뒷좌석에 드러눕다시피 늘어져 잠든 시영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오른쪽 팔로 시선을 내렸다.

“왜애… 나 괜차나아….”

무휼의 옆구리에 끼어 달랑 들리다시피 한 호원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혀가 꼬부라져 제대로 된 발음도 안 되는 모양인지 말끝이 자꾸만 늘어졌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무휼은 호원의 한쪽 팔을 들어 제 어깨에 걸고 오른팔로 허리를 감싸 안아 지탱했다. 호원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무휼에게 몸을 맡겼다.

“시영 씨면 모를까, 형은 이 정도로 취할 사람이 아닌데-”

진혁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호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제껏 만취한 호원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신도 어디 가서 술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건만, 옛날부터 호원과 마실 때면 항상 먼저 취하는 건 진혁 쪽이었다.

‘그 정도로 피곤했나.’

하긴, 자기 가게가 하루아침에 불타 버렸는데 허허실실 웃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진혁은 취기와 함께 올라오는 안쓰러움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핸드폰을 들었다.

“잠깐 기다려. 지금 근처에 호텔이라도 잡아볼 테니-”

“괜찮으니 그만 귀가나 하시죠.”

웬 존댓말? 진혁은 말의 내용보다도 갑작스러운 존대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오기라도 부리는 것처럼 꼬박꼬박 반말을 찍찍 해대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다.

“나는 뭐 존댓말도 하면 안 되나.”

무휼은 툴툴거리면서 자꾸만 늘어지는 호원을 고쳐 안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택시를 부르더니 진혁의 차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시영 누나나 잘 챙겨줘요.”

“아… 어, 그래.”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영 어색하네. 진혁은 뻘쭘하게 대답하고는 호원을 흘긋 보고 등을 돌렸다. 인사라도 하고 갈까 싶었지만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어서야 인사를 한다고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저기.”

막 차로 향하려던 그의 발걸음을 나직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진혁이 고개를 돌리자 무휼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로등의 희끄무레한 불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파란빛을 뿜는 눈동자가 진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늘은… 고마웠습니다.”

이 빚은 꼭 갚죠. 무휼은 은혜를 갚겠다는 건지 원수를 갚겠다는 건지 모호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하곤 그렇게 말했다.

진혁은 잠시 멍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더니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는 대리기사와 시영이 기다리고 있는 차로 돌아갔다.

무휼은 새카만 자동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 쳐다보았다. 뒷좌석에서 시영의 어깨를 흔들며 말을 건네는 모습이 시야 안에서 점점 작아지다가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어어? 뭐야, 다 갔어어?”

그리고 남아 있는 건 만취한 취객 하나. 무휼은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호원의 몸을 추어올렸다.

“어, 다 갔어. 그러니까 이제 정신 좀 차리지?”

그러나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입꼬리를 슬쩍 올라가 있었다. 항상 어른이랍시고 무게 잡으려 하는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모습 함부로 보여서 어쩌려고 그래.”

“너어….”

신장 개업한 가게 앞에서 흔들거리는 바람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던 호원이 불현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무휼을 노려보았다.

“이 말 안 듣는 똥깡아지야아.”

이것 봐라? 무휼은 허 하고 헛웃음을 웃으며 호원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호원이 한층 사납게 눈을 치뜨더니 두 손으로 턱 무휼의 얼굴을 붙잡았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무휼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원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히죽 웃었다.

“짜식, 잘생겼네.”

“어?”

“자알- 생겼다고오….”

“…어?”

왜 이래? 무휼은 진심으로 당황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주사가 원래 이런가. 생각보다 꽤….

그러나 생각도 잠시, 앞쪽에서 빵빵거리는 소리에 무휼이 호원의 손을 떼어냈다. 호출한 택시가 도착한 것이다.

안 간다고 징징거리는 그를 억지로 차에 태운 무휼은 주소를 부르고 호원의 머리를 붙잡아 제 어깨에 꾹 눌렀다. 그 와중에도 호원의 입은 쉬지 않고 주절거리고 있었다.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데에- 이건 완전 일반인 학살 아니냐고…. 연예인도 아닌 게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아주 기분 나쁘게 잘생겼어. 호원이 웅얼거렸다.

대체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이었음에도 무휼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들었는지 무휼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호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야, 권무휼.”

“이번엔 또 왜.”

무휼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보다 웃긴 주사라 은근히 재밌게 구경하던 참이었다.

호원은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가만 듣다가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무휼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씨- 목소리도 좋아…. 미친놈….”

급기야 욕까지 한다. 무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어깨에 얹어진 호원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이 사람 취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다른 놈 앞에선 절대 취하지 말라 해야지. 무휼은 자꾸만 입가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호원의 머리에 살짝 뺨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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