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어린 개의 육감 (1)
바 ‘3월’이 있던 건물은 다행히 화재 신고가 빠르게 들어간 덕에 전소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재 발생 장소인 부엌 쪽 뒷문과 호원이 거주하는 2층 일부는 새까맣게 그을려 사용이 어려울 정도였다.
가게 쪽은 공사에 최소 2주가 걸린다는 공사 전문가의 대답을 듣고, 호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현장을 찾은 보험사 직원의 말에 따르면, 호원이 자리를 비운 동안 가게 부엌 쪽에서 정체불명의 화재가 일어났고 불이 커지기 전에 출근하던 시영의 신고로 빠르게 소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영업 시간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며, 호원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럼 당분간 가게는 못 열겠네.”
사태가 일단락되고, 보험회사 직원도 돌아간 뒤 호원이 말했다. 직원들에게는 반강제 유급 휴가가 주어졌고, 호원은 2주 동안 가게를 재정비할 예정이었다.
“근데 2층도 피해가 꽤 심하다며. 공사하는 동안 어디서 지내려고?”
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호영은 명확한 답변 대신 음, 그러게. 어쩌지? 라고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하며 실없이 웃었다.
그때, 그을음이 가득한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무휼이 엉망진창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그는 헐떡거리며 어깨를 거칠게 오르내렸다. 헉헉거리는 숨에 말이 뚝뚝 끊겨 나왔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본 호원이 일단 진정하라며 힘없이 웃었다.
“그냥 사고래. 아직 정확한 원인은 모르는데, 그래도 보험 처리는 되겠지.”
“사고라고?”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권무휼.”
그런 그를 시영이 불렀다. 그러고는 돌아보는 무휼에게 목장갑을 휙 던져주었다.
어두컴컴한 허공을 날아오는 목장갑을 가볍게 낚아챈 무휼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고갯짓으로 벽장을 가리켰다.
그을음이 묻은 벽장에는 보틀들이 재를 뒤집어쓴 채 진열되어 있었다. 일부는 불길에 깨져 버렸지만 다행히 대부분 무사했다.
“너도 도와.”
“아니, 아냐. 괜찮아. 어차피 전문가 불러서 할 테니까 두 사람은 그만-”
“뭐부터 하면 돼?”
호원의 만류는 한 귀로 흘리며 무휼이 목장갑을 꼈다. 시영은 그 짧은 시간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커다란 박스를 척척 내려놓더니 멀쩡한 보틀들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무휼은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 보더니 보틀이 가득 담겨 무거운 상자를 번쩍 들어 창고로 옮겼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할 일을 척척 찾아 하는 모습에 대견함을 느끼기도 잠시, 호원은 제발 그러지 말고 집에 가서 쉬라며 두 사람을 졸졸 쫓아다녀야 했다.
“어후, 정말! 호원 오빠도 도울 거 아니면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정신 사납잖아.”
시영이 신경질을 내며 가게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 자리에는 언제 옮겨놨는지 무휼이 쌓아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깨지고 부서지고 불타는 와중에도 용케 형태를 유지한 가구들이었다.
“정말 안 해도 된다니까….”
순식간에 짐덩이 취급을 받은 호원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엉망인 가게 안을 척척 치워 나가고 있었다.
결국 호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목장갑을 끼고 전선에 합류해야 했다.
세 사람은 멀쩡한 보틀과 가구들을 모두 창고 안으로 들여놨고, 무너진 잔해를 대충이나마 치워두었으며, 재가 한가득 쌓여 있던 바닥을 빗자루로 쓸었다.
“끝났다아!”
해가 뉘엿뉘엿 져갈 즈음, 시영이 그럭저럭 정리가 끝난 가게를 둘러보고는 쭉 기지개를 켰다. 호원은 재와 검댕으로 더러워진 목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둘 다 고생했어. 밥이라도 먹을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럼 고기!”
시영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그러잖아도 고된 육체노동 덕에 허기가 지던 참이었다. 무휼도 기대감 어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고기 좋죠. 다들 고생한 모양인데 소고기라도 먹으러 갈까요? 이 앞에 괜찮은 식당이 있거든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호원이 화들짝 놀라 입구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진혁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너… 어떻게 알고 왔어?”
호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혁은 불타버린 잔해들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여기 알바생들 다 나랑 친한 거 몰랐어요?”
“입도 가볍지.”
호원이 피식 웃었다. 말로는 그러면서도 걱정해 준 아르바이트생들과, 그 연락을 받고 바로 와준 듯한 진혁을 생각하니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그래서. 여긴 왜 왔습니까?”
딱딱한 말투로 무휼이 물었다. 그는 이미 호원에게 바짝 붙어 서서 경계하듯 진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혁은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어깨를 살짝 치켜올렸다.
“밥 사주러?”
그 말에 무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네 사람은 진혁이 자주 간다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혁은 고기가 먹고 싶다던 시영의 주문을 적극 수용하여 세 사람을 소고기를 파는 한정식집으로 안내했다.
객실이 전부 별실로 분리되어 있는 데다가 한쪽의 통창으로 작은 화단까지 구경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가게에 재투성이 꼴로 들어오게 된 일행은 머쓱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너무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요. 어차피 별실이라 우리밖에 없는 걸 뭐.”
유일하게 깔끔한 꼴을 하고 있는 진혁이 상큼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호원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고, 시영은 시큰둥한 얼굴로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무휼은 험악함과 뚱함이 반반씩 섞인 듯한 얼굴로 메뉴판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저 꼴 보기 싫은 놈이 쏜다는데, 호원에게 제일 좋은 고기를 먹여줄 참이었다.
이 정도 가격대의 가게엔 어머니와 종종 왔지만, 한 끼 식사로 쓰기엔 꽤 큰돈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주머니 속 지갑에는 어머니가 맘대로 쓰라며 준 카드가 있었다. 그러나 무휼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원에게는 그가 스스로 번 돈으로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21살밖에 안 된 애송이가 학업 중간중간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수준으로는 이런 고급 가게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척척 주문할 수 없었다.
분하지만 이번에는 잘 써먹어 주지. 무휼은 그런 마음으로 메뉴판을 휙휙 넘겼다.
“그럼 집으로 쓰던 곳도 피해를 입은 거예요? 당장 오늘 묵을 곳은 있고?”
진혁은 고기를 구워주러 들어온 직원을 물리고 직접 집게를 잡았다. 꽤 익숙한 모양인지 능숙하게 고기를 불판 위에 올리며 진혁이 호원에게 물었다.
“그러게. 일단 오늘은 어떻게든 구석에 이불 깔고 자봐야지, 뭐.”
소파 쪽은 그래도 멀쩡하더라. 호원이 부러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침실 쪽이 많이 불탄 데다 화재 진압 직후라 그의 집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돌아가면 또 한참을 치워야겠다며 호원은 올라오는 한숨을 꾸역꾸역 내리눌렀다.
“그런 데서 어떻게 자려고?”
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호원은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실 당장 머물 만한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랜 친구인 수현이네 신세는 져도 됐고, 그 동생인 수환도 활기차고 좋은 녀석이라 얼마든지 방을 빌려줄 터였다.
그러나 수현은 지금 연인과 함께 여행 중이라 나중에야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수현이라면 빈집에라도 개의치 말고 들어가 쉬라 했겠지만 갑자기 하룻밤 묵어야 하는 이유를 대려면 화재 소식도 말해야 했다.
그러면 착하고 걱정 많은 제 친구는 당장 여행을 그만두고 비행기에 몸을 실을 터였다. 호원은 모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 예쁘게 연애하고 있는 친구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한 지 꽤 된 수환 쪽도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사람 좋아하고 구김 없는 성격이지만 입이 가벼운 게 흠인 수환은 사정을 알자마자 형인 수현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터였다.
게다가 그 집은 만년 연애 중인 것 같은 수환 덕에 지내고 있자면 속이 느끼해질 지경이라, 가급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두 사람 외에도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다들 가정도 있고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다 보니 섣불리 신세를 지기가 애매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지내면 되잖아.”
그때, 얌전히 앉아 불판 위의 고기를 호원의 앞접시에 바지런히 나르던 무휼이 입을 뗐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천연덕스러운 말에 호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뭐?”
“우리 집, 빈방 많아. 손님도 종종 들르는 편이라 어지간한 건 다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와도 된다며 무휼이 흘긋 호원의 눈치를 보았다.
말을 뱉어놓고 눈치를 보는 건 무슨 경우지. 호원은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기대감으로 실룩거리는 무휼의 입꼬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 돼.”
“왜!”
무휼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외쳤다. 호원은 무휼이 접시 안 가득 옮겨둔 고기를 몇 개 집어 그의 접시에 덜어주며 다시 말했다.
“안 된다면 안 돼.”
“아니, 이유를 말해줘야 납득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무휼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말했다.
“너희 집에 지금 어른 계셔?”
“불편해서 그래? 음… 나랑, 가끔 와서 집안일 해주시는 아주머니 정도?”
“역시 안 돼.”
호원의 즉답에 무휼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대체 왜?”
“집에 어른도 안 계시는데 함부로 신세 질 수 있겠냐.”
“어차피 어머니는 그런 거 신경 쓰실 분 아냐. 그리고 최민호 그 자식도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한 명 더 머문다고 달라질 거 없어.”
“그건 네 생각이고.”
호원의 단호한 말에 무휼이 입술을 짓씹었다.
이쯤 되면 그냥 가기 싫다는 거 아닌가? 진혁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그가 아는 호원은 저렇게 고집부리는 일이 많진 않았지만, 일단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절대로 꺾을 수 없었다. 그런 점은 천하의 권무휼도 어쩔 수 없구나 싶어, 진혁은 피식 웃었다.
“그럼 호텔에서 머무는 건 어때요?”
가볍게 던진 말에 무휼에게 향해 있던 호원의 시선이 진혁을 향했다. 호텔? 되묻는 말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망가진 가게 수리비며 집도 고쳐야 할 거고, 파손된 보틀들을 다시 사 모으는 것만 해도 꽤 돈이 들어갈 터였다. 하룻밤 숙박에 몇십만 원까지도 호가하는 잠자리는 꺼려질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그건 좀….”
“공사하는 데 며칠이나 걸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동안 계속 그 엉망인 방에서 지내려고?”
“하지만-”
“내가 방 잡아줄 테니까 편하게 묵어요.”
마지막 말에 호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 무휼에게 묻혀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당신이 그걸 왜 잡아줘.”
무휼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