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늑대의 흉터
“야, 듣고 있냐? 진짜 기분 나쁜 놈이었다니까?”
“어어, 그래. 듣고 있어.”
무휼은 옆에서 빽빽거리는 민호에게 대충 대꾸해 주며 저벅저벅 앞만 보고 걸었다. 가뜩이나 가기 싫은 곳에 가는 길인데 옆에서 열을 내는 녀석이 있으니 더 내키질 않았다.
후문과 이어지는 길을 지날 때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커졌다. 신우대는 정문 쪽엔 주택단지와 아파트 단지 등이 즐비해 있었고, 후문 쪽에는 영화관이며 술집 등 번화가가 들어서 있었다.
호원의 가게인 바 ‘3월’도 후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생각했더니 더 탈주하고 싶네. 무휼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슬러 멨다.
“그 자식 분명 시영 씨한테 흑심 있는 거야.”
“너처럼?”
“야!”
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자신과 그 남자는 다르다며 또다시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잘못 걸렸네. 무휼은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 민호의 말을 질렸다는 얼굴로 대충 흘려들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두 사람은 지금 무휼 때문에 연기됐던 조별과제 준비를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조장이라던 경영과 여자아이는 그동안 잦은 탈주를 한 무휼에게 ‘커피 한 잔 돌리면 용서하겠다’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그러운 처벌을 내려주었다. 아마 학교 내에서 유명인물인 만큼 어느 정도 수위를 약하게 해준 것 같았다.
지은 죄도 없으면서 덩달아 커피를 사게 된 민호는 ‘잘생긴 놈은 뭘 해도 특별 취급이냐’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차피 교양 아냐? 그냥 내 이름 빼고 하라 그래.”
“그게 말이 되냐? 넌 학점 펑크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회성이라는 걸 좀 기를 필요가 있어.”
민호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무휼은 꼭 필요한 전공 외에는 교양 수업도 거의 듣지 않는 데다 그마저도 출석률이 꽤 저조했다.
민호와 코치가 이대로 가다간 학점을 못 채워 졸업도 못 할 거라며 겁을 줘도 무휼은 태평하기만 했다.
“맞다, 애들 몇 명이랬지?”
“우리까지 다섯 명. 아, 저기 있다.”
카페에 막 들어서서 무휼이 묻자 민호가 대답하며 손가락으로 한쪽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인문대 근처의 카페라 그런지 사방에는 예쁘게 차려입은 1학년들과 척 봐도 과제에 찌들어 있는 듯한 퀭한 얼굴의 상급생들이 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무휼의 눈에 띄는 테이블이 있었다.
불퉁한 얼굴의 여학생과 뚱뚱한 체구에 안경을 쓴 남학생, 그리고 다른 곳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는 갈색 머리 여학생이 둘러앉은 테이블이었다.
민호가 가리킨 테이블이 같은 테이블이라는 걸 확인한 무휼이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 왔다 왔어.”
두 사람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갈색 머리 여학생이었다. 밝은 갈색 단발이 산뜻하게 잘 어울리는 여학생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들 많이 기다렸죠? 이쪽으로는 잘 오질 않아서 길 좀 헤맸어요.”
민호가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사과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시선은 비딱하게 서서 눈만 끔뻑이고 있는 무휼을 향해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각각 호기심과 아니꼬움, 선망의 빛이 짙게 깔려 있었다. 무휼은 그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딱 한 마디를 했다.
“주문.”
“어?”
민호를 포함한 네 사람에게서 멍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에 무휼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메고 있던 가방을 또 다른 빈자리에 내려놓았다.
“커피 사라면서요.”
아, 하고 누군가 감탄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내뱉었다. 각자의 주문을 모두 들은 무휼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쟤 원래 저런 성격이니?”
무휼을 아니꼽게 보고 있던 긴 머리의 여학생이 민호에게 속닥거렸다. 민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잠시 후, 각자 음료 잔을 앞에 둔 조원들이 한 명씩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 무휼은 김수영이라는 긴 머리의 여학생이 조장이라는 것, 한참 선배로 보였던 이진욱이라는 남학생이 의외로 동갑이었다는 것, 그리고 처음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던 박서윤이라는 여학생이 식음료학과 학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두 사람은 차치하고 무휼의 관심을 끈 것은 서윤의 학과 얘기였다.
“우리 학교에 그런 과가 있었나?”
“너 몰랐어? 우리 학교 식음료학과 되게 유명해. 전문대 쪽에서도 알아준다더라.”
“그래?”
자기 과도 아닌데 진욱이 신나서 설명했다. 옆에서 듣던 서윤이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건 그렇고, 너무 유명하셔서 조별과제 할 시간도 없으신 우리 권무휼 님께서는 어떻게 참여하실 생각이신가?”
수영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3학년이라 성적에 꽤 예민한 편인 듯, 처음에는 무휼을 아니꼽게 보던 수영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그를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본 사람이라면 어려워하기 마련인 무휼을 앞에 두고도 여유로워 보였다.
무휼은 당당한 태도와 지적인 외모가 어째 시영을 닮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뭘 하면 되는데요?”
“이미 자료조사는 서윤이랑 민호, 진욱이가 하고 있고, 나는 자료 취합이랑 정리. 아 발표 자료도 내가 프레지로 만들 거야.”
수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쉬지도 않고 다다다 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무휼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활짝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너는 발표하면 되겠다.”
바로 옆에서 민호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휼은 옆에 앉은 민호를 사납게 흘겨보았지만 민호는 실실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잘됐다, 야. 앞에 나가서 얼굴마담 역할 톡톡히 해라.”
“…….”
무휼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자신 없어 하는 게 눈에 보였는지 수영이 걱정 말라며 덧붙였다.
“어차피 질의응답 때는 나나 다른 애들이 답변할 테니까 너는 대본이나 잘 외워오면 돼.”
대신, 발표 날에는 예쁘게 입고 오라며 수영이 히죽 웃었다. 이제 와서 발을 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휼은 별수 없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쯤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려나. 느지막하게 일어난 호원은 5시에 가까운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그 생각부터 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무휼을 떠올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낯설어하며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딱히 정해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할 일을 정해두었다 해도 곧 들이닥칠 커다란 멍멍이 때문에 무산될 확률이 높았기에 호원은 느긋하게 샤워부터 하기로 했다.
머리부터 쏟아지는 따듯한 물을 멍하니 맞으며 호원은 잠이 덜 깬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가게는 시영이 잘 돌볼 테니 걱정할 필요 없고, 집안일은 어제 대충 해놓았으니 급할 게 없었다. 무휼이 오기 전에 무선 청소기나 한번 돌려두면 될 터였다.
보관함에 넣어만 두고 보지 않은 미국 드라마나 연달아 볼까. 아무리 그래도 휴일인데 더 생산적인 걸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집에 먹을 게 마땅치 않다는 것이 떠올랐다. 장을 본다는 게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편하게 다녀도 그 녀석 재활 중인 선수인데, 배달음식 같은 걸 먹이면 안 되겠지?’
고민하는 사이 몇 분이 훌쩍 지나갔다. 호원은 온몸의 거품을 씻어내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나왔다. 팩에 든 사과주스를 꺼내 컵에 따라 마시면서 호원은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깔끔하게 정돈된 집 안이 흡족했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쿠션과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거실 한가운데에 있었고, 마주 보는 티비장 위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고 매끈했다. 햇빛 드는 창문 쪽에는 바짝 마른 옷들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 저건 걷어서 개어놔야지. 호원은 남은 주스를 한입에 털어 넣고 건조대 쪽으로 향했다. 커튼을 걷어둔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 호원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턴가 파란색만 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이렇게 팔불출이었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지만, 막상 또 다른 파란색을 보면 기다렸다는 듯 떠올리고야 마는 것이다.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파란 눈. 최근에는 애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바람에 마주 보기가 조금 쑥스러워진 그 눈을 떠올리며 호원은 기지개를 쭉 켰다.
“장 보러 나가야겠네.”
역시 배달음식은 포기다. 결정을 내린 호원은 빠르게 빨래를 걷어 개켜놓고는 집을 나섰다.
휴무인 날 밖에 나와 올려다보는 하늘은 유독 높아 보였다. 곧 시영이 출근할 가게 쪽을 흘긋 본 호원은 홀가분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도 있었고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 종종거리며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는 사람을 발견한 호원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대학생인데, 과제는 잘하고 있는 건가?
매번 가게에 놀러 오거나 호원에게 데이트를 하자며 징징거리는 걸 보면 학교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조만간 민호가 가게에 오면 슬쩍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호원은 마트 입구의 플라스틱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무휼은 은근히 어린애 입맛이었다. 뭐든 주는 대로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긴 했지만 가만 보면 달고 짜고 매운 음식, 특히 매운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곤 했다.
오랜만에 맛있는 거라도 해줄까 싶어 정육 코너를 맴돌던 때였다.
“오랜만이야.”
머릿속에 내리꽂히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주변에는 호원에게 말을 건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호원은 고기 팩 하나를 들고 말을 주고받는 젊은 부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생선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까지 둘러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잘못 들었나? 어쩌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식혔다.
호원은 일단 눈에 보이는 고기란 고기는 하나씩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무휼이야 고기면 뭐든 좋아하니 메뉴 같은 건 집에 가서 생각해 볼 셈이었다.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가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불길한 감각.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한 기분에 호원이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호원은 들고 온 비닐봉지를 놓쳐 버렸다. 비닐에 감긴 고기 팩들이 와르르 쏟아져 아스팔트 위로 나뒹굴었지만 그는 멍하니 건물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굴로 와 닿는 열기가 너무 강렬해 피부가 따끔거렸다. 시야 전체는 붉고 검게 물들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스쳤다.
달아오른 공기가 사나운 바람 소리를 내며 위로 솟아올랐다. 불티와 재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의 집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 ‘3월’이 있는 오피스텔 전체가 노을처럼 붉은 빛을 내며 불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