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울타리 밖의 늑대
무휼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게 호원의 눈에도 잘 보였다.
“무휼아,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그럼 왜 그런 얼굴인데.”
호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는 말을 단번에 자르며 무휼이 말했다. 호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그 사진을 처음 봤을 때 호원은 숨이 덜컥 멎는 것 같았다.
무휼이 유명인이라는 거야 그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고, 그런 유명인의 스캔들로 학교가 시끌시끌하다는 게 그저 귀여웠다.
그 나이 때 애들은 동경하는 대상 한둘 정도야 당연히 있을 거고, 그 대상이 무휼이라는 게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무휼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힌 사진을 봤을 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가벼운 행동 하나가 무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무휼은 앞으로 못 하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비단 학교 내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휼이 다니는 신우대는 바 ‘3월’이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게다가 이 근처에는 술집이며 예쁜 카페도 많고, 24시간 운영하는 곳이 많아 신우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근 대학교 학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3월이야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골목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조용한 분위기 덕에 대학생 손님이 적은 편이었지만, 당장 요 앞 큰길만 나가도 어린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만약 그들이 무휼을 알아보고, 권무휼에게 남자 애인이 있다는 걸 소문내기라도 한다면. 그럼 무휼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호원은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좀 더 조심해야 했다. 괜히 차 같은 걸 끌고 가서 시선을 끈 게 잘못이었다. 호원은 바보 같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지금, 무휼은 오히려 그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러운 거 당연해. 사진도… 껄끄러울 거 이해하고. 정 싫으면 학교 밖에서 만나도 괜찮고 새벽에 만나도 괜찮아. 그러니까-”
데이트, 해줘. 무휼은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호원의 고민일랑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나는 너를 걱정했는데, 너는 나만 걱정하는구나. 호원은 어쩐지 가슴속에서 울컥하며 무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멍청이.”
“어?”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찬연하게 푸른 빛으로 일렁이는 눈이 호원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호원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화면 가득 무휼의 얼굴이 떠 있었다.
세팅되지 않은 앞머리를 매만지며 다소 곤란해 보이는 듯한, 그러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
“이런 사진이나 찍히고 말이야. 질투 나게.”
“…어?”
“너 앞으로는 내 앞에서만 웃어. 다른 사람 앞에서 예쁘게 웃었다간 혼날 줄 알아.”
“…어어?”
무휼의 눈이 동그래지며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어버버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호원이 종이 박스에서 올리브유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가서 시영이나 도와. 혼자 바쁘겠다.”
“뭐? 아니, 잠깐만.”
멍하니 있던 무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호원의 팔을 붙잡았다. 기대감 어린 얼굴이 바짝 다가와 호원과 눈을 맞췄다. 간식을 앞에 두고 꼬리를 붕붕 흔드는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방금 뭐라 그랬어? 한 번만 더 말해줘.”
“다 들었으면서 뭘.”
“아냐, 제대로 못 들었어.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말해줘.”
“시끄러워.”
호원은 팔에 엉겨 붙는 무휼을 대충 떼어내며 주방 밖으로 떠밀었다. 무휼은 순순히 떠밀리면서도 계속 ‘한 번만’을 연호해 대더니, 결국 마감 시간까지 졸라대어 호원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
호원의 얼마 없는 휴일, 혼자 오픈 준비를 하던 시영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호를 발견하고 생긋 웃어 보였다.
“오늘도 오셨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민호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직 어둑어둑한 가게와 대걸레를 든 채 혼자 서 있는 시영을 보고는 아, 하고 뒷걸음질 쳤다.
“죄송해요. 아직 오픈 시간 전이죠? 이따가 다시 올게요.”
“아뇨, 괜찮아요. 지금 막 청소 끝냈거든요. 아르바이트생들도 금방 올 거고요. 여기 앉으세요.”
시영은 바 쪽 자리를 손짓해 보인 뒤 들고 있던 대걸레를 청소도구함에 넣었다. 민호는 무휼의 친구인 데다 가게에서의 매너도 좋은 편이라 시영으로서도 반가운 손님 중 하나였다.
그런 손님이 오픈 시간보다 좀 일찍 들어왔다고 내쫓을 리 없었다. 물론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시영이라면 상대가 꼭 민호가 아니라도 일단 들여보냈겠지만.
시영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오면 잠시 소란스러울 수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바 안으로 들어섰다.
“항상 마시던 거?”
“아, 아뇨! 사실 오늘은 마시러 온 게 아니라….”
민호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손사래를 쳤다. 당황하는 얼굴과 어색하게 더듬는 말투에서 시영은 이미 대략적인 용건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저기….”
민호는 쉬이 본론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시영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쉰 민호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이번 휴일에 시간 되시면 같이 영화-”
“죄송합니다.”
칼 같은 거절이었다. 민호는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듯 멍한 얼굴을 입을 벌렸다.
“…네?”
“저희 가게는 손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않는 게 규칙이라서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지만, 그림처럼 웃는 시영의 얼굴은 가게 이야기는 단순히 핑계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민호는 새 차를 뽑자마자 가로수를 들이받은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군요.”
“모처럼 제안해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민호는 시영이 머리 숙여 사과하자 화들짝 놀라 팔을 허우적거렸다. 이내 그는 슬며시 손을 내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큼큼, 하며 헛기침을 했다.
“저… 그럼 일단은 계속 손님으로 있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시영이 활짝 웃어 보였다. 민호는 그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 데이트 제안을 거절당한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치 기력을 다 소모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네.”
시영은 그의 마음을 배려해 준 것인지 부러 잡지 않았다. 그 프로다운 태도에 민호는 더 쓰려오는 속을 부여잡고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
“아.”
민호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곱상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선이 얇은 미남이었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남자가 들어올 수 있게 살짝 비껴섰다.
남자는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바 안으로 들어섰다. 바 ‘3월’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그조차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라, 민호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뒤에서 보니 얼굴과는 달리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이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얼핏 보면 민호와 크게 다를 게 없을 정도로 다부진 체격이었다.
‘…모델인가?’
민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등을 돌렸다. 그때, 시야 한쪽에 얼핏 남자가 바 근처 자리에 앉는 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앉아 있던, 시영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문밖을 향하려던 민호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설마, 착각이겠지. 민호는 부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떼려 했지만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귓가에 은근한 남자의 목소리가 때려 박히듯 들려왔다.
“혼자 일해요?”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민호는 예의 남자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서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도 시영이 곤란해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자 혼자 있는 가게에 다짜고짜 혼자 일하냐 묻는 낯선 남자라니, 위험하지 않은가. 민호는 여차하면 남자를 제압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시영 씨, 코스모폴리탄 한 잔이요.”
시영이 칵테일을 준비하는 동안 남자와 민호 사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조금 긴 듯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흘긋 민호를 돌아보았다.
“단골?”
“네? 아, 네.”
민호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남자를 정면에서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웃음기 어린 얼굴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많은가?’
민호는 찬찬히 남자의 모습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얼핏 과 선배들과 비슷한 나이대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덩치에 비해 추위를 타는 체질인지 손목을 완전히 덮는 긴팔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단순한 디자인의 베이지색 카디건이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젠장, 스타일 좋네. 민호는 괜히 입술을 비죽거리며 가게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여기 원래 남자 바텐더 한 명 있지 않았나?”
“아, 오너 말씀이신가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오프예요.”
남자가 붙임성 있게 묻는 말에 시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코스모폴리탄 나왔습니다, 하며 시영이 내려놓은 빨간 칵테일을 민호는 얼른 쥐어 잡았다. 쓸데없는 긴장감에 목이 탔다.
“그래요…?”
남자는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시영이 건넨 메뉴판을 받아 들고 아무거나 주문했다. 책자를 펴자마자 눈에 들어온 메뉴를 집는 것이, 술을 마시러 온 사람치고는 무성의해 보였다.
‘저 자식, 뭐 다른 목적 있어서 온 거 아니야?’
민호는 한층 의심스러워진 남자의 태도에 눈을 가늘게 뜨고 견제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시영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시영이 남자가 주문한 칵테일을 제조하며 가볍게 물었다. 남자는 바 테이블을 천천히 쓸어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같은 남자인 민호가 보기에도 화사하다는 표현이 절로 생각날 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지나가다 봤어요.”
“아까는 원래 있던 바텐더라는 둥 아는 척했잖아요.”
저도 모르게 말이 불퉁하게 나갔다. 민호는 시영의 난처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아차 싶어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뭐라 하려던 건 아니고-”
“괜찮아요.”
남자는 흔쾌히 민호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러고는 아예 민호 쪽으로 상체를 틀어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여기 단골이면 자주 보겠네요. 나도 앞으로 종종 올 거거든.”
“아, 네에-”
민호는 미적미적 대답하며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했다. 어쩐지 영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사랑의 라이벌 같은 유치한 이유가 아니라,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가까이하면 안 될 것 같은 음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 오너라는 사람은 자주 쉬나 봐요?”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영에게 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시영은 상황이 잘 마무리되자 안도하며 대답했다.
“아뇨, 보통은 격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쉬세요.”
“그럼 내일은 나오겠네요?”
“음… 죄송하지만 내일도 어렵겠네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 이번 달 오프를 오늘 내일에 몰아서 쉰다 하더라고요. 오너는 주로 화요일에 오프니까 다른 날에 오시면 볼 수 있답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시영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호원의 솜씨는 꽤 유명한 편인 데다 스승이 스승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부러 그를 찾아오는 손님도 꽤 있었다. 개중에는 수양 중인 프로 바텐더도 있었고, 칵테일 쪽으로 유명한 인플루언서도 종종 눈에 띄었다.
시영은 평소보다 공들여 만든 칵테일을 남자 앞에 내려놓았다. 남자가 오른손으로 칵테일 잔을 받느라 소매가 살짝 당겨졌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에 흉터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꽤 깊은 상처였던 듯 상당히 옛날에 다친 거로 보이는데도 피부 위에 선명한 금이 그어져 있었다. 그 흉흉한 기운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잘 마실게요.”
남자는 시영이 건넨 연한 녹색의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그때, 바의 문을 열고 아르바이트생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영은 안도와 반가움이 반씩 섞인 얼굴로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 때문에 잔에서 입술을 뗀 남자가 작게 중얼거린 소리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민호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호는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좀체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남자가 말끔하게 비운 잔을 앞쪽으로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제 잔을 홀짝홀짝 들이켤 뿐이었다.
남자는 시영의 배웅을 받으며 바 ‘3월’을 떠났다. 민호는 그 등 뒤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거슬린다고?”
뭐가, 내가? 민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남은 붉은색 칵테일을 한입에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 꺼림칙한 인상의 남자였다.
다신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민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