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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54)화 (54/101)

제54화. 영역 지키기

“너 역시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잖아!”

남자는 무휼을 삿대질하며 닦달했다. 소란스러운 등장에 바 안에 있던 손님들 중 한두 명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야, 조용히 안 해? 민폐잖아.”

무휼은 놀란 기색도 없이 인상부터 찌푸렸다. 타당한 핀잔에 상대는 아차 싶었는지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서 와요, 민호 씨.”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흘긋흘긋 눈치를 보는 그에게 시영이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섰다. 최민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시영이 안내하는 대로 바 가까이에 가 앉았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누나. 그리고 사장님도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주문은요?”

“아, 그럼 저번에 먹었던 그….”

여전히 붉은 얼굴로 민호가 흘긋 시영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게, 보는 사람이 다 간질간질할 정도였다.

“빨갛고 예쁜 칵테일로요.”

“코스모폴리탄?”

“네, 그거요!”

“알겠어요.”

시영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민호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 수줍은 얼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무휼을 보자마자 언짢은 얼굴로 바뀌었다.

“야, 권무휼. 너 왜 연락이 안 되냐?”

“연락했냐?”

무휼은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이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이쪽은 하루 종일 연상의 애인한테 휘둘리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무휼이 흘긋 호원을 돌아보았다.

민호는 인상을 팍 구기더니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채팅창을 보여주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한 줄로 쭉 나열되어 있었다. 얼핏 봐도 몇십 개는 가뿐히 넘은 듯했다.

“으, 뭐야 그게. 너 나한테 집착하냐?”

“개소리하지 말고. 너 오늘 4시에 뭐 있었는지 기억 안 나?”

민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휼은 눈썹을 으쓱하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호원과 데이트한다는 데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이제 기억났냐? 영이론 조별과제 오늘 모이기로 했잖아.”

너 이름 빼겠다는 거 내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다음으로 시간 미뤘다. 민호는 그렇게 덧붙이며 살벌한 눈으로 무휼을 노려보았다.

영화의 이론과 감상. 학점 채우려고 대충 아무거나 주워 담아두었던 교양 과목이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조별과제며 리포트 쓸 게 많아 귀찮아하던 차였다.

“조장인 경영과 애가 다음에는 너 꼭 끌고 오라고 난리도 아냐. 너 지금까지 걔네 얼굴 한번 안 봤다며?”

“어, 뭐….”

무휼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김진수 일이며 호원의 일 때문에 학교생활은 뒷전이다시피 했었다.

그나마 학교에 나가도 훈련이 목적이었고, 민호의 닦달로 전공 수업에나 얼굴을 비추는 게 다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같은 수업을 듣는 조원들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학교에 벌써 소문 다 돌고 있어. 네가 이미 프로 입단 결정돼서 학교생활 막 한다느니 부자 애인이 있어서 내년 초에 결혼한다느니 말이 많아.”

“프로 입단은 그렇다 치는데, 결혼은 또 뭐야?”

“어, 너 몰랐냐?”

황당하다는 무휼의 반응에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심 그 소문을 꽤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너 또 에○ 안 봤구나? 너한테 연상에 부자 여친 생겼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연상에 부자? 여친? 무휼은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민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냐는 표정이었다.

그 살벌한 얼굴에 살짝 기가 질린 민호는 애먼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너 오늘 낮에 애인 차 타고 갔다며. 정문에서 고급 외제차 타고 가는 거 봤다고 누가 에○에 올렸어.”

“아….”

무휼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호원과 데이트하러 가는 모습을 누군가 보고 대학교 커뮤니티에 올린 모양이었다.

흘긋 옆을 돌아보니 호원이 숨죽여 웃는 게 보였다. 아하, 그래. 아주 남 일이라 이거지? 무휼은 서운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민호를 돌아보았다.

“그거 여자친구 차 아닌데.”

“어, 진짜? 근데 올라온 사진이 딱 애인 기다리는 얼굴인걸.”

민호가 이거 보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거나 머리카락을 넘겨보는 등 누가 봐도 첫 데이트를 앞두고 설레하는 무휼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이거 올라오자마자 난리 났어. 네 팬들이 절대 아니니까 사진 내리라 난리난리를 쳐서 지금 원본은 내려갔고.”

저도 볼래요. 입꼬리에 웃음기를 단 호원이 다가와 민호의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풋풋한 느낌이 물씬 나는 모습이 꼭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근사하고 귀여웠다.

“사진 진짜 잘 찍었다. 민호 씨, 저 이거 보내줄래요?”

아, 지금 보낼게요. 민호는 호원에게서 다시 받아든 휴대폰을 조작하며 무휼을 흘긋 돌아보았다.

“뭐, 진짜 여친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였냐. 그래도 이번 스캔들 때문에 한동안 학교가 시끌시….”

“근데 애인은 맞아.”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던 민호는 무휼의 말에 입을 떡 벌렸다.

“뭐? 진짜야?”

“어.”

무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민호에게 받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는 호원을 돌아보았다.

지금 당장 이 사람이 애인이라고 말해 버리고 싶은데. 말하면 안 되겠지. 아무리 눈치 없는 무휼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데 이런 사진은 대체 언제 찍은 거야?”

대신, 무휼은 이번 사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호원과 자주 데이트할 텐데 그때마다 사진이 찍힌다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은 상관없다 해도 호원은 입장이 곤란해질 터였다.

“뭐… 넌 우리 학교 비공식 아이돌 같은 거잖냐. 우리 과 애들 그걸로 은근 과비 쏠쏠하게 벌고 있더만.”

“…돈을 벌어?”

내 사진으로? 무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민호는 아차 싶었는지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 아니! 몰래 찍는 게 아니라 그 왜, 우리 작년 엠티 때 단체 사진이며 뭐며 엄청 찍었잖냐. 그리고 그거 팔아서 과비로 쓴다고 했잖아.”

그 말에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엠티 첫날에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이 속한 체육학과의 사진은 은근히 인기가 많아 꽤 수입이 쏠쏠하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그때 너 덕분에 사진 판매량이 엄청나서 추가 주문까지 들어왔다더라. 근데 정작 너는 그 뒤로 대회며 재활 치료 때문에 과 생활을 잘 못 하니까 선배들이 엄청 아쉬워했어.”

“그래서 훈련 때마다 사진을 그렇게 찍어댄 건가.”

“뭐, 그 이유도 있지. 근데 그중 절반은 개인 소장용일걸?”

무휼은 훈련 때면 꼭 체육관 한쪽에서 카메라를 든 채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의 사진을 팔아서 저들만 이득을 보다니, 이건 조만간 따져봐야겠다.

“야, 그건 그렇고. 너 진짜 애인 생겼냐?”

민호가 슬쩍 목소리를 죽이며 은근하게 물어왔다. 이제 무휼을 조별과제에 참여시킨다는 당초의 목적은 그의 뇌리에서 사라진 듯했다.

가만히 민호를 내려다보던 무휼은 살짝 고개를 틀어 그 옆에 앉아 있는 진혁을 돌아보았다. 여유로운 얼굴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진혁이 시선을 눈치채고 무휼과 눈을 맞췄다.

“어, 생겼어.”

‘애인’. 들으라는 듯 강세를 두는 목소리에 진혁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가만 쳐다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에 사이에 낀 민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긴 무휼 씨는 잘생겼으니 인기 많겠네요.”

잠시의 정적 후에 진혁이 먼저 입을 떼었다. 무슨 속셈이지?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근데 그 애인분도 참 피곤하겠어요.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아무 때나 사진을 찍힐 정도로 유명인이면 말이에요.”

“…….”

“그런 일에 무감한 사람이면 모를까. 섬세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방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겠어요? 이를테면-”

진혁의 시선이 무휼에게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눈이 시영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웃고 있는 호원에게 닿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 익숙한 호원 형 같은 사람이면 더욱.”

뭐? 그 말에 무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호원이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다는 걸까? 하지만 아까 전에는 귀엽다는 둥 사진을 보내달라는 둥 하지 않았나?

무휼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는데, 시야 한쪽에서 호원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시영에게 뭐라 말을 하더니 바를 나서 주방 쪽으로 향했다.

“가봐요.”

진혁이 무휼을 향해 말했다.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 말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무휼은 진혁을 살벌하게 노려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시영은 자리를 비우는 그를 흘긋 볼 뿐, 말리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한 잔 더 어때요?”

그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민호에게 생긋 웃으며 권할 뿐이었다.

***

호원은 주방 안쪽에서 분주하게 뭔가를 찾고 있었다.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 무휼의 눈에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잠시 주저하던 무휼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종이 박스를 열고 라벨을 확인하던 호원의 어깨가 일순 움찔했다.

“아, 너구나. 그러고 보니 너랑 시영이도 이제 휴식 시간이지.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 볼 테니….”

“좀 봐봐.”

무휼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호원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도 호원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왜 그래…? 혹시 사진 때문에 그래? 당신 얼굴은 안 나왔어. 그리고 사진도 앞으로는 찍지 못하게-”

“그런 거 아니야.”

호원이 슬쩍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그런 게 아니면 왜 그러는 건데.”

“놓으라니까?”

호원이 다시 힘을 줘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무휼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도 순순히 호원을 풀어주었다.

호원은 굳세게 잡힌 어깨를 살짝 문지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음속이 소란스러웠다.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힌 건 무휼인데 자신이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사과해야겠다 싶어 호원이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미안해.”

호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가득 들어찬 푸른 눈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형광등 빛에 부드럽게 일렁이는 푸른 빛깔에 호원은 그 어떤 말도 입술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미리 경고를 했어야 했어. 난 그런 거에 둔감한 편이고, 평소에도 사진을 찍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니까… 당신이 그걸 불편해할 줄 미처 몰랐어.”

“아니, 잠깐만. 무휼아?”

“사진 건은 어떻게든 해결할게. 앞으로 학교 안에서 몰래 찍으려는 사람 없도록 할게. 그러니까….”

무휼은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팔랑거릴 때마다 푸른 빛이 깜빡거렸다. 호원은 그 모습을 홀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데이트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뭐?”

호원이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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