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간식을 보여주며 기다려 가르치기
순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새우를 손질했다. 마침 어제 장을 봐오길 잘했다며 껍질을 벗겨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휼 씨는 거기, 양파 좀 썰어줘요. 그냥 채썰기만 하면 되니까.”
회색 껍질 조각이 묻은 손으로 순영이 도마 위를 가리켰다. 씻어둔 양파 한 개와 부엌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식칼을 들었다. 양파는 직접 기른 건지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컸지만 무휼의 큰 손 안에서는 번번이 미끄러졌다.
“천천히 해도 되니까 조심해서 해봐요.”
누가 봐도 엉성하게 썰리는 모양새를 흘긋 본 순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젠장, 무휼은 괜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딱히 요리에 서툰 것도, 요리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식칼 다루는 게 조금 서툴 뿐이었다. 배구를 하는 사람답게 커다란 손은 이렇듯 세심하고 손재주가 필요한 일에는 맞지 않았다.
‘그냥 대충 넣고 끓이는 건 잘하는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잘 숨겼는데 여기서 칼질 솜씨가 드러나고 말았다. 무휼은 허브를 따러 간 호원이 제발 천천히 돌아오길 바라며 서둘러 식칼을 움직였다.
얼른 해치워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어머, 잘하네. 그럼 이것도 좀 부탁해요.”
그러나 새우살이 담긴 그릇을 들고 옆을 지나던 순영이 자연스럽게 턱 놓고 간 가지 때문에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두툼하고 긴 가지도 텃밭에서 기른 모양인지 모양새가 영 투박했다. 이걸 어쩌라는 건가 싶어 쳐다보니 순영이 그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새우살이 담긴 그릇을 들어 보였다.
“파스타에 넣을 거예요. 아, 혹시 가지 싫어해요?”
“…아뇨.”
무휼은 생각을 읽혔다는 데 머쓱해져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얌전히 다시 식칼을 들어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영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리고 있었다.
타인을 휘두르는 데엔 익숙해도 휘둘려 본 경험은 거의 없는 무휼로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우리 원이랑 많이 친한가 봐요.”
바로 옆에서 끓는 물에 작은 토마토를 데치던 순영이 슬쩍 말을 붙여왔다. 우리 원이, 라고 부르는 말이 자연스러워서 마치 호원의 친어머니라 해도 믿을 법했다.
무휼은 가지를 반으로 자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얼음물에 토마토를 담가 껍질을 벗기던 그녀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가 착각한 건가? 원이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여기 데려올 리가 없는데.”
“아뇨, 아닙니다. 친해요.”
친하다는 말로 표현이 가능한 사이일지는 모르지만 무휼은 서둘러 대답했다. 평소라면 대충 대꾸하고 말았겠지만, 이상하게도 호원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순영에겐 무심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더니 무휼의 머리 바로 위 찬장을 가리켰다.
“그 위에서 푸실리 좀 찾아줄래요?”
무휼은 손쉽게 찬장을 열어 안을 살폈다. 음식점이라던 말을 증명하듯 안에는 여러 종류의 봉투들이 즐비해 있었다. 굵은 원통 모양, 고둥 모양, 얇고 긴 면과 짧은 튜브형까지 가지각색의 모양에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포장지들을 훑던 무휼이 나선형의 짧은 파스타 봉투를 잡아 내려놓았다.
“이거 맞죠?”
“네, 맞아요. 그런데 신기하네, 젊은 청년들은 파스타 이름 같은 거 잘 모르지 않아요?”
“네, 뭐….”
무휼이 뺨을 긁적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호원과 함께 살 적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 그를 따라다니다 외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파스타면의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고, 관심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호원이 해주는 설명은 뇌리 깊숙이 박혀들었다.
“참 어렵죠?”
생각에 잠겨 있던 무휼의 시선이 순영을 향했다. 순간 무슨 말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파스타면 얘길 하는 건가?
순영은 짧은 푸실리 면을 몇 줌 끓는 물에 넣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원이 말이에요.”
“…….”
무휼의 입술이 살짝 달싹거렸다가 다물어졌다. 순영은 냄비 안을 주걱으로 휘휘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얼핏 보면 마냥 상냥하고 다정해서 사람 좋아 보이는 아이인데, 막상 다가서려 하면 그만큼 거리를 둬버리죠.”
섬세하고 약한 아이예요. 보글보글 끓는 하얀 거품 위로 그녀의 말이 촘촘히 내려앉았다. 무휼은 별다른 대꾸 없이 가만히 순영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무휼 씨는 원이를 좋아하죠?”
그러나 바로 정곡을 찔러오는 말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야 말았다. 갈팡질팡하는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순영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아까부터 원이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던데요, 뭐. 그녀는 말을 덧붙이며 손잡이가 달린 체로 푸실리를 건졌다. 팬을 꺼내 오일을 두르고 다진 마늘과 채소를 볶으며 그녀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놓치지 말아요. 원이는 금방 자기 감정에서 도망쳐 버리니까. 무휼 씨가 정말 원이를 좋아한다면 꼭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해요.”
“…왜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조용하던 무휼이 처음으로 뱉은 질문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에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순영은 날씨 얘기나 하는 사람처럼 태평하게 팬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원이가 이젠 행복해졌으면 하니까요.”
이젠? 무휼은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볼 틈은 없었다. 옆구리에 바구니를 낀 호원이 부엌으로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둘이서 만드는 거예요?”
“무휼 씨가 보기보다 칼질이 야무지더라. 평소에도 요리 자주 해요?”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무휼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순영이 가리키는 대로 찬장을 열어 접시를 꺼냈다.
“걔가 보기에는 도련님 같아도 의외인 면이 많긴 해요.”
호원은 바구니를 도마 옆에 놓아두고는 그중에서 보들보들하게 생긴 이파리를 몇 개 꺼내 씻었다. 그 역시 순영의 부엌을 드나드는 게 퍽 익숙해 보였다.
무휼과 순영이 함께 만든 파스타 위로 호원이 따온 타임과 애플민트가 가볍게 안착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순영은 무휼과 나눴던 대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가볍게 근황을 묻고 답하는 호원과 순영을 보며 무휼은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순영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호원의 차에 오를 때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호원은 왜 그를 여기 데려온 걸까. 순영은 왜 그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고민하는 눈동자가 심해처럼 깊어졌다.
시선이 닿는 창밖은 해가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여름에 비하면 낮 시간이 조금 짧아진 것 같았다. 언덕배기에 걸친 해가 강렬한 주홍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그 빛에 잠겨 붉었다.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무휼의 기색이 신경 쓰였는지, 호원이 운전을 하다가도 흘긋 그의 눈치를 봤다.
“혹시 불편했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창밖을 향했던 무휼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혹여나 불편했을까 흘긋흘긋 눈치를 보는 얼굴이 괜히 심술부리고 싶을 정도로 귀엽게 보였다. 불편했어, 라고 대답하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아니.”
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호원은 그 말에 안심했다는 듯 작은 숨을 내쉬며 웃었다. 무휼은 역시 이쪽이 곤란해하는 얼굴보다 보기 좋았다.
“너하고는 꼭 한번 뵈러 가고 싶었어. 김순영 선생님은 내가 본격적으로 바텐더를 목표로 하게 된 계기를 주신 분이거든.”
어머니 같은 분이기도 하고. 호원은 그렇게 말하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정말로 순영을 닮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 모자지간이라 생각할 법했다.
“지금은 숲속에 은둔하다시피 사시지만, 사실 굉장한 분이야. 세계에서 손꼽히는 바텐더 중 한 분이거든. 지금도 선생님의 칵테일을 마시러 유명인사들이 종종 오곤 하는데 어떤 사람이냐면….”
호원은 아이 자랑을 하는 부모라도 된 것처럼 상기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순영의 자랑을 하는데 이상하게 호원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알 것 같아 무휼은 어쩔 수 없이 조금 서운해졌다.
한참이나 순영의 칭찬을 늘어놓던 호원은 이윽고 아차 싶었는지 큼큼, 하며 헛기침을 했다.
“아, 미안. 너무 내 얘기만 했지.”
“더 해도 괜찮아.”
아닌 게 아니라, 무휼은 정말로 괜찮았다. 비록 호원의 입으로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좀 거슬리긴 했지만, 순영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해맑은 아이 같아서 보기만 해도 퍽 즐거웠던 것이다.
무휼은 머쓱하게 웃는 호원의 옆모습과 식사 때 걷어붙인 뒤로 줄곧 그 상태인 카디건 소매,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가는 손목과 핸들을 쥔 긴 손가락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저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에 허락 없이 마음껏 닿으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선생님이 계신 곳은… 내게는 새로운 시작을 한 곳이나 마찬가지야. 이래 봬도 어릴 땐 진로고 뭐고 꽤 방황했지.”
“당신이 그랬다니 좀 상상이 안 가네.”
“옛날 일이니까.”
꽤 쑥스러웠는지 호원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얀 피부에 노을빛이 닿아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무휼은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마른침을 삼켰다. 손가락이 몇 번이나 짧게 허공을 내리그었지만 차마 호원을 향해 뻗어지지는 못했다.
“그냥, 너랑 와보고 싶었어. 나한테 소중한 분과 소중한 장소를 소개해 주고 싶었거든.”
살짝 고개를 돌린 호원이 그를 향해 웃었다. 사르르 접히는 눈꼬리에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너도 이젠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역광 때문에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몸을 웅크렸다.
“하…. 당신 진짜-”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앓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쩐지 자신이 운전한다 해도 극구 사양하더니, 무휼은 이제야 호원이 왜 굳이 운전대를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운전대를 잡았더라면, 지금 당장 갓길에 차를 세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리기만 해봐.”
“너 집 앞에 내려주고 난 바로 갈 건데?”
그런 무휼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호원이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면서 무휼의 집 주소를 찍어달라며 휴대폰을 넘기기까지 했다.
무휼은 샐쭉하게 치켜뜬 눈으로 호원을 흘겨보더니 이윽고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휴대폰에 주소를 입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