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개의 권리
“민호야, 권무휼 그 자식 못 봤냐?”
코치의 부름에 한창 코트에서 후배들에게 토스를 올려주던 최민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요?”
그러고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코치를 향해 걸어왔다. 코치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있잖냐, 우중충하니 좀비 같은 몰골로 골골거리는 놈.”
“무휼이라면 오늘 훈련 끝났다면서 방금 막 샤워하러 갔는데요.”
벌써? 코치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평소 같으면 훈련이 끝나고 나서도 남들의 배는 걸리는 속도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던 놈이 웬일인가 싶었다.
“드디어 정신 차렸나? 아침에 러닝 다녀와서도 계속 싱글벙글이더니….”
“정신을 차리긴커녕 드디어 맛이 간 모양이던데요. 오후에 교양 하나 듣고 왔더니 1학년 애들이 저한테 권무휼 선배 미친 거 같다고 무섭다고 난리였다고요.”
민호가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며 진저리를 쳤다.
“제가 권무휼 그놈 안 지는 좀 됐지만, 오늘만큼 미친놈처럼 보인 적이 없었어요. 가만히 있다가 혼자 막 헤벌쭉 웃고… 아까는 덤벨 끌어안고 히죽거렸다니까요?”
“…내일 걔 데리고 병원 좀 다녀오마.”
“꼭 다녀오세요. 근데 지금은 왜 찾으세요? 권무휼 또 사고 쳤어요?”
민호가 불안한 얼굴로 코치의 눈치를 봤다. 그러잖아도 두 에이스가 번갈아 가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신경성 두통까지 생긴 그였다.
심지어 에이스 한 놈은 앞으로 평생 운동을 못 할지도 모르고, 나머지 한 놈은 당분간 경기도 못 뛰게 생겼으니 두통은 나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요즘엔 무휼의 회복도 순조롭고 1학년들의 실력도 일취월장한 덕에 이제야 겨우 팀다운 팀이 되어가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코치가 권무휼을 찾자, 민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초조한 민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코치는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오늘은 학교에서 뭉그적대지 말고 바로 집 가라고. 지금 과 사무실에 손님 와 계시는데 마주쳐 봐야 좋을 거 없다.”
“아… 또 오셨어요?”
“그래.”
코치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도 바로 갔다니 됐다. 그리고 너희들도, 인마. 아무리 훈련이 좋아도 그렇지, 공부들은 하고 있는 거야? 학점 빵꾸 나는 놈들은 대회 안 내보낼 줄 알아?”
코치가 으름장을 놓자 민호가 왜 불똥이 이리로 튀냐며 울상을 지었다.
“근데 그분은 왜 계속 오시는 거예요? 무휼이 때문에요?”
“넌 몰라도 돼. 그냥 나중에 권무휼이 보면 당분간 과사 근처는 얼씬도 말라고 해라.”
코치는 그새 주름이 깊어진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쯤 과 사무실에서 다 식은 차를 앞에 두고 앉아 있을 여자를 생각하니 절로 두통이 일었다.
그 여자가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 건진 몰라도,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이야 사이에 낀 자신이 시간을 벌고 있다지만 한쪽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한 마주치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역시 이 학교 오는 게 아니었어.”
발치까지 길게 늘어지는 햇빛을 내려다보며 코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
무휼은 어쩐지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제껏 누구를 만나든, 어떤 약속이든 이렇게 긴장이 된 적은 없었다.
그는 도로 쪽으로 등을 돌리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술을 마시고 도로로 난입하는 학생들이 하도 많아서, 캠퍼스 초입의 입도에는 평범한 사람 허리 높이의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가볍게 엉덩이를 걸치고 기대 있으려니 이런저런 고민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샤워를 하고 오긴 했지만 혹시나 땀 냄새라도 나면 어떡하지. 라커룸에 배어 있는 퀴퀴한 냄새가 옷에도 배기라도 했으면 낭패인데.
무휼은 티셔츠를 움켜잡고 킁킁거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편해서 자주 신는 운동화에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트레이닝복 바지. 그리고 품이 넉넉한 흰 티셔츠가 눈에 밟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장에서 셔츠라도 한 벌 챙겨 오는 건데. 평소 공강인 날에는 운동만 하는 탓에 그저 몸을 움직이기 편한 옷만 찾았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집에 들렀다 올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리고 막상 집에 들렀다 올 시간이 있었다 해도, 아마 옷을 고르느라 시간에 제때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딱히 패션에 관심이 없는 편도, 스스로를 꾸미는 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런 때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은 탓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입어야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할까. 아무리 봐도 일단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너무 후줄근해 보이지 않을까? 바 ‘3월’에 있던 때에는 슬랙스에 셔츠라도 입었지, 이건…. 무휼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티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호원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면 어쩌지. 조금이라도 그런 기색이 보이면 당장 아무 옷가게나 들어가서 옷을 사 입어야겠다. 무휼이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왜 그러고 있어?”
바로 등 뒤에서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로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무휼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들었나?’
분명 호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의아해하는데 등 뒤에 서 있던 검은색 차량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여기야, 여기.”
안에서 호원이 그쪽으로 몸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설마하니 차를 끌고 올 거란 생각은 못 했었기에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만 놀라고 일단 타주면 안 될까?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호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무휼은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길가 곳곳에 사람들이 멈춰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휴대폰 카메라를 이쪽으로 향한 사람도 있었다.
무휼은 난간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넘듯 가볍게 뛰어넘었다. 차 문을 열고 보조석에 앉자마자 옆에서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역시 신우대 유명인은 다르네. 꼭 연예인 픽업하러 온 매니저라도 된 기분이야.”
연인도 아니고 매니저? 무휼은 괜히 서운해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그래?”
자리에 꼿꼿하게 굳은 채로 쳐다만 보는 무휼의 모습에 호원이 흘긋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있다가 눈이 딱 마주친 무휼이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자꾸만 시선이 얇은 카디건 아래 보이는 맨 무릎에 닿았다. 항상 긴바지만 입던 그라서 그런지 새하얀 무릎과 그 아래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다리 선이 유독 낯설었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열을 식히려 창문을 열려는데, 시야 한쪽에 불쑥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안전벨트를 매야 출발하지.”
길쭉한 손가락이 무휼의 얼굴을 지나 안전벨트를 붙잡아 내렸다. 그 특유의 달콤한 체향이 바로 곁에서 느껴졌다가 천천히 멀어졌다.
미치겠네. 무휼은 오늘 처음으로, 자신이 입은 티셔츠가 품이 넉넉한 것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근데 너 오늘 그렇게 입으니까 되게 신선하다.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대학생 같아.”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킨 호원이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가볍게 웃었다. 창문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무휼이 그 말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냥… 오늘 제대로 된 옷을 챙기는 걸 깜빡해서….”
왜 이런 말까지 하고 있지. 쓸데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휼은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원래는 이런 옷 잘 안 입고… 그러니까….”
한번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나니 제정신을 잡기가 어려웠다. 무휼은 스스로의 모습이 꼴불견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근데 너 밥은? 혹시 배고파?”
호원이 흘긋 중앙 계기판의 시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3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6시에는 바 ‘3월’의 오픈 준비를 해야 했기에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무휼은 뜬금없이 밥 얘기를 꺼내는 모습에 당황해서 눈을 껌벅거렸다.
“아니, 별로 안 고픈데….”
말을 마치고 나서야 지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게 대답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무휼은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 재차 심호흡을 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하고 나니 이제야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나저나 어딜 가는 거지? 무휼의 시선이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도로를 훑다 옆으로 돌아갔다.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여유롭게 운전 중인 옆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운전하는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꽤 익숙한 듯 한 손으로도 매끄럽게 코너를 도는 모습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이 하얗고 반듯한 이마 위로 나긋하게 굽이쳤다. 머리카락을 따라 미끄러진 시선이 긴 속눈썹에 맺혔다가 오뚝한 콧날을 지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선홍색 입술로 내려갔다.
사슴처럼 곧고 긴 목선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처럼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운전 중에 건드리면 화를 낼까? 조금만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홀린 듯 탁한 시선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좋아?”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는 듯한, 누가 봐도 놀리는 말투였다. 목덜미를 진득하게 훑던 시선이 도로 올라와 자신을 보고 있는 갈색 눈과 마주했다.
완만한 곡선으로 휜 눈꼬리가 조금 긴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져 있었다. 무휼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괜히 자극하지 마. 사고 내고 싶지 않아.”
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떨어져 나갔다. 담백한 손길이었지만 가볍게 닿았던 체온의 여운이 길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호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슬쩍 흘겨보는 눈 아래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