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주인의 책임
“혹시 만나기로 한 게 저분이에요?”
여학생이 주눅 든 얼굴로 흘긋 호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미안함을 담아 웃어 보였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여학생은 심각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를 지나쳐 갔다.
어린 학생치고는 눈치가 예사롭지 않다며, 호원은 역시 좋은 대학 다니는 학생이라 머리가 좋은가 보다 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왜… 여기에 있어.”
그런 호원의 정신을 무휼이 다시금 현실로 끌어 내렸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무휼이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는 유니폼인 듯한 반바지에 얇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는 걸 보니 이런 이른 아침부터 운동 중이었던 모양이다.
“부지런하네. 이런 시간부터 훈련하는 거야?”
“…….”
호원은 정말 지인을 만나러 온 사람처럼 가볍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은 의구심을 담은 채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 시선은 이윽고 창백한 목선을 따라 내려가 얇은 셔츠에 닿았다. 쯧, 혀 차는 소리가 유리잔 깨지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이런 날씨에 그러고 온 당신이 잘못한 거니까, 싫어도 뭐라 하지 마.”
점퍼 지퍼를 죽 내린 무휼이 겉옷을 벗어 호원의 어깨에 걸쳤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긴 소매를 가슴 앞에 묶으면서 슬쩍 호원의 눈치를 보는 게 그답지 않게 자신 없는 태도였다.
호원은 제 가슴 앞에 야무지게 묶인 천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무휼을 쳐다보았다.
“옛날에… 너 같은 애가 한 명 있었어.”
삐져나온 소맷자락을 가지런히 정리하던 손이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제 손에 향해 있던 파란 시선이 호원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마치 그러고 있으면 호원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푸른 눈동자가 진지하게 그의 눈을 응시했다.
호원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 무휼이 그를 어떤 눈으로 볼지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을 꼭 해야만 했다.
“그때 당시에 나이가 스물이었으니 지금쯤 스물여섯 정도 되었으려나. 서글서글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좋은 애였어.”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기분 탓이겠지만 어쩐지 허벅지의 상처가 찌르르하게 울리는 듯했다.
무휼은 갑작스럽게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듯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속으로 감사를 읊조리며 호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 안쪽에 고운 모래를 들이부은 것처럼 목이 꺼끌꺼끌했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그게 무슨 일이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주고 싶을 정도로.”
갈라져 나온 목소리에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짢은 기색이 찌푸린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호원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야기를 멈춘다면 다시는 이 화제를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돌이킬 수 없어지고 나서야, 그 애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았어.”
“…….”
호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기다란 손끝은 품이 넉넉한 티셔츠를 따라 올라가 무휼의 왼쪽 허리께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단단한 근육 너머로 이제 막 아물어가는 흉터가 만져지는 듯했다.
“여기 있는 상처와 비슷한 게 내게도 있어.”
직접적인 말은 없었지만 무휼은 단번에 그 상처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사정없이 구겨지며 푸른 눈동자가 확 불타올랐다.
“굉장히… 아프더라.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마주하는 푸른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긴 속눈썹이 바쁘게 깜빡거렸다.
그 얼굴은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다급해 보였다.
호원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초조해하며 뒷말을 이었다. 자신의 목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나서야 그는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휼아,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됐다가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무서웠어.”
지금도 나는 네가 무서워.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주위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무휼이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커다래진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바다처럼 푸른 눈에는 여러 감정이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또다시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카페에서 만났을 때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 그러나 그 깊은 곳에 작은 희망 역시 깃들어 있다는 것을 호원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호원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한테는 이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제 더는 너를 밀어내고 싶지 않으니까.”
“…….”
“너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인 거, 이미 진즉 들켰잖아?”
무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울 것 같은 얼굴로 호원을 잡아당겼다. 호원은 새벽의 서늘한 공기에 식었던 몸이 뜨거운 체온으로 덥혀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맞닿은 가슴께로 전해지는 상대의 고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무휼은 마치 호원이 결국 그를 받아들일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맹목적이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랑을 구걸했고, 호원의 거부에 상처받았고, 그럼에도 곁에 있게 해달라 애원했다.
그토록 맹목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 호원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 무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도 그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자신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젠 다른 누군가와 깊은 관계는 맺을 수 없다고. 그렇게 자기 최면을 하며 무휼을 밀어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저 또 상처받기 싫어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었을 뿐이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무휼만큼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호원의 껍데기를 벗겨내려 했다. 단단한 껍데기에 망치질을 해 금을 내고 그 안에 숨은 호원에게 말을 건넸다.
호원이 깊은 안쪽으로 숨어들면 숨어들수록, 무휼은 껍데기를 깨부수며 안으로 밀어닥쳤다.
그리고 기어이, 비겁하게 숨어 있던 호원을 찾아내 붙잡았다.
등허리가 뜨거웠다. 밧줄처럼 단단하게 옭아매는 팔의 체온에 델 것만 같았다. 호원은 두 손을 들어 무휼의 등을 감쌌다. 근육으로 짜인 등은 그의 손이 닿자 움찔하는가 싶더니 더욱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호원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가에서 흘러나온 물기에 무휼의 어깨가 젖어들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휼이 고개를 파묻은 호원의 어깨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호원이 무휼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사위는 이미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저기, 무휼아.”
“…….”
아직도 호원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미동도 없는 무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꽉 끌어안은 힘이 너무 강해서 허리가 뻐근했지만 호원은 곤란한 얼굴을 할 뿐,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동안의 일을 생각하고 나니 그를 밀어내는 것이 너무 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너네 학교 안인데.”
“…….”
“지금 사람들이 막 쳐다봐.”
호원이 흘긋 무휼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빨갛게 익은 귓불은 잘 보였다.
“너 꽤 유명인인가 보다. 쟤네 사진 찍고 있어.”
호원이 너무 커다래서 한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무휼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길 건너편에서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기야, 전봇대같이 커다란 남자가 만만찮게 키 큰 남자를 끌어안고 있으니, 그만한 구경거리가 없겠다 싶긴 했다.
“무휼아? 어떡할까, 사진 지우라고 할까?”
“…그냥 내버려 둬.”
당신은 지금 그게 중요해? 웅얼거리듯 들려온 목소리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호원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를 귀엽게 느낄 때마다 부러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새삼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는 조금 더 대범해져 보기로 했다. 호원이 손을 들어 무휼의 뒤통수를 살짝 쓰다듬었다.
“귀엽기는.”
웃음기 어린 말에 무휼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번쩍 고개를 들더니 눈앞에서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억울한 얼굴을 했다.
“당신 진짜….”
“왜?”
“여기 밖이야. 알아?”
무휼이 물기가 남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불퉁하게 말을 내뱉었다. 호원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다, 어린아이 달래듯 무휼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밖이라는 자각이 있으면 그만 놓지?”
“…젠장.”
낮게 욕지거리를 뱉은 무휼이 그제야 맞닿아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하지만 영 미련을 버릴 수 없는 듯, 괜히 호원의 어깨에 둘러준 겉옷을 만지작거리며 뭉그적댔다.
“난 체육관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데….”
그가 말끝을 얼버무리며 흘긋 호원의 눈치를 보았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는 마음이 대놓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얘가 이렇게 단순한 애였나. 원래는 좀 더 어른스럽고 능글맞았던 것 같은데.
호원은 이제야 제 나이대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이 신선한 한편 한없이 귀엽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잠시만 더 어울려 주기로 했다.
“훈련 중이었어?”
호원이 가슴 앞에 묶인 매듭을 풀며 물었다.
“본격적인 건 아니고, 다른 애들 연습할 때 옆에서 근육 트레이닝이나 하는 정도. 지금은 운동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러닝이나 하려고 나왔던 거야.”
설마 당신을 만나서 이런 얘길 할 줄은 몰랐지만. 쑥스러운 듯 시선을 굴리며 덧붙이는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눈가 때문인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잠시 멍해졌던 호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어깨에 걸쳐준 겉옷을 마저 끌렀다. 그러고는 아예 팔을 꿰어 제대로 걸쳐 입더니 휙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언제 끝나?”
“지금 말하고 올까? 어차피 나 오늘 공강이라 훈련 스케줄밖에 없어. 코치님도 부상 완전히 나을 때까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당장 나와도 돼.”
무휼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호원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원래 그렇게 땡땡이 잘 치냐?”
“아니.”
이번만이야. 무휼은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씩 웃었다. 호원은 그 얼굴을 샐쭉하게 노려보고는 겉옷 지퍼를 쭉 올렸다.
누가 봐도 스포츠용인 겉옷 아래로 슬랙스와 비싸 보이는 구두를 차려입은 모습이 누가 봐도 어색할 테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오후에도 트레이닝해야 해?”
“음…. 오늘은 3시면 끝나는데. 아니, 진짜 지금 말하면 바로 나올 수 있다니까?”
“안 돼.”
호원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무휼은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이어진 말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한숨 자고 데리러 올게. 그동안 땡땡이치지 말고 훈련 잘 받고 있어.”
아무래도 일하고 난 뒤 바로 온 데다, 잔뜩 긴장해서 이야길 했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쏟아지는 잠기운을 억지로 밀어내던 호원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입고 있는 겉옷의 옷깃 부분을 검지와 엄지로 살짝 집어 보였다.
“이건 잠깐 빌려간다? 돌려받고 싶으면 나 올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
알겠냐, 멍멍아? 호원이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씩 웃었다. 그 말에 무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기다릴게, 주인님.”
빨리 와야 해? 덧붙이는 말이 호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