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46)화 (46/101)

제46화. 주인에게 돌려보낸 줄 알았는데

병실을 나오니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

“남의 얘기나 엿듣고, 취미 한번 고상하네.”

“지금 비꼬는 거야?”

진혁이 가소롭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무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행이네. 별로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여서.”

“크게 다쳤으면 좋았을 거라는 말로 들리는 건 내 귀가 이상한 건가?”

무휼이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진혁은 피식 웃었다.

“좋을 대로 생각해.”

아, 피해 보상 관련해서는 걱정하지 마. 최대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테니까. 진혁은 혹시 나중에라도 아픈 곳 있으면 바로 말하라며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번호는 알지?”

“글쎄.”

그딴 번호, 굳이 저장했을 리가 없다. 무휼은 불퉁하게 말을 뱉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이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 이 정도 어울려 줬으면 됐겠지 싶은 생각이었다.

“호원 형은… 좀 어때?”

그때, 속삭이는 듯한 진혁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들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진혁은 벽에 기대선 채로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니 무휼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몰라.”

“쩨쩨하기는.”

진혁이 픽 웃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는 무휼이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휼은 괜히 억울한 기분이 되어 인상을 찡그렸다. 그 사람 소식을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정말 몰라.”

“…….”

이번에는 진혁도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의심쩍다는 얼굴을 했다가 일순 눈을 크게 뜨더니 대뜸 무휼의 팔을 붙들었다.

“너 혹시… 했냐?”

“뭐?”

가뜩이나 안 좋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이든 더럽게 느껴지는 건 똑같았다.

“개소리할 거면 놔.”

무휼이 진혁의 손에 잡힌 팔을 거칠게 빼냈다. 진혁은 자신의 빈손을 가만 내려다보더니 눈썹을 구겼다.

“그럼 형이 왜….”

널 내친 거지? 중얼거리는 소리는 작았지만 잔뜩 신경이 곤두선 무휼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취향인 애가 들이대는 걸 그냥 보낼 사람은 아닌데.”

“그만 좀 하지?”

무휼이 왈칵 화를 내며 진혁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사람까지 함부로 대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진혁은 씩씩거리는 무휼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 내가 지나쳤다. 미안.”

더 이상 듣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무휼은 그대로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병원을 나섰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주인한테 버림받은 개다. 이제 와서 다른 녀석을 견제하거나 그 사람 일에 끼어들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무휼은 그것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호원은 이상하게 날이 어슴푸레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가 일어날 즈음이면 이미 해는 중천에 있고 암막 커튼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들곤 했었다. 그러나 어제 깜빡하고 커튼을 젖혀 둔 채로 잠들었는데도 묘하게 방 안이 어두웠다.

의아해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에야 그는 지금이 이른 아침이라는 걸 깨달았다.

‘3시간 정도 잤나.’

호원은 영 무겁게 느껴지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계속 이런 식이었다.

김진수 소동 이후, 바 ‘3월’은 드디어 본래의 영업 시간을 회복했다. 오후 8시에 문을 열고 4시에는 마감을 한다. 그 후에는 청소를 하고 직원들을 돌려보낸 뒤에 호원 혼자 남아 정산을 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어느덧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본래라면 오후까지는 줄곧 잠들어 있었을 테지만, 최근 이상할 정도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1시, 2시까지는 뒤척이지도 않고 시체처럼 자던 그가 7, 8시만 되어도 잠에서 깨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갑자기 시간대가 바뀌어서, 아무래도 큰일을 겪고 나서 지쳐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사고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도록 호원은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이 부족하다 보니 손끝이 무뎌지고 시야도 흐릿했다. 지금이야 오기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가게에서 큰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덮고 있던 호원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이대로 누워 있는다고 잠이 오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불을 젖히고 땅에 발을 디뎠다. 냉장고를 열었지만 딱히 입맛에 당기는 것도 없었다.

결국 호원은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야채주스를 한 컵 따랐다. 이대로 가다간 영양실조에 걸리겠다며 부득불 시영이 사다 안겨주고 간 것이었다.

초록색 액체가 든 잔을 들고 소파에 푹 파묻혔다. 잠을 못 자게 되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최근에는 온갖 인터넷 TV가 나와주는 덕분에 볼거리는 넘치도록 많았다.

한 손에는 컵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리모콘으로 채널을 휙휙 돌리던 호원이 어느 한 채널에서 손을 멈췄다.

생중계는 아닌 것 같은데 영상이 뜬 걸 보면 그가 즐겨찾기 해둔 채널에서 올린 영상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로 경기도 아닌 대학배구의 시합 영상 같은 게 뜰 리가 없으니까.

-대학배구 U-리그, 신우대 vs 영연대 경기 영상.

무휼이 다니는 학교 이름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왔던 날 이후 문턱이 닳도록 바 ‘3월’에 드나드는 무휼의 팀메이트, 최민호에게 진작 들은 것이다.

뭐, 사실 최민호가 말하기 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인터넷에 ‘권무휼’ 이름만 검색해 봐도 기사들이 줄줄이 뜨는데, 이쯤 되면 오히려 모르기가 어려웠다.

배구에 대해 잘 모르는 호원이 봐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기사가 무휼을 극찬하고 있었다.

프로 세계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백어택과, 다른 선수들의 손끝도 닿지 않을 높은 타점에서 내리꽂는 스파이크가 주무기라는 모양이었다.

공수 모두 완벽한 보기 드문 선수, 라는 부분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럼 그렇지, 처음 주웠을 때 보이던 그 오만한 성격과 딱 들어맞는 실력이지 않은가.

호원은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경기장 안에서 무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는데 마침 채널 관리자가 영상을 보며 중계하듯 설명을 해주었다. 역시 이럴 때는 공식 채널보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채널이 낫다고 호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 채널을 보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대회에서 신우대의 에이스 두 선수가 모두 불참했다고 합니다.]

[권무휼 선수와 김진수 선수 모두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들이라 이번 불참이 더 아쉽게 느껴집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훈련 중 부상으로 부득이하게 시즌 불참을 하게 되었다는….]

한 경기만이 아니었나. 그만큼 부상당한 곳이 안 좋은 걸까. 호원은 눈썹을 구기며 컵을 들었다. 녹색 야채주스는 보기만큼이나 맛이 없었다.

[권무휼과 김진수, 양쪽의 공격을 맡아주던 강력한 윙스파이커들의 불참으로 사실상 신우대의 공격력은 없어진 셈인데요. 이렇게 되면 세터인 최민호 선수의 부담이 크다고 할 수 있죠.]

이제야 겨우 아는 얼굴이 나왔지만, 일주일 전에도 가게에서 본 얼굴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아 역시나, 신우대 꽤 고전하는데요. 저번 시즌에서 큰 차이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던 영연대에게도 밀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카메라를 좋은 걸 쓰는 모양인지,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잔뜩 찡그린 최민호의 얼굴이 비쳤다.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팀인데 안타깝네요.]

채널 운영자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호원은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괜히 아침부터 마음만 불편해졌다.

문득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유독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고 등을 살포시 떠미는 것처럼, 아까울 정도로 청명한 하늘이었다.

그래, 커피를 사 오자.

카페인이 들어가면 잠이 덜 깬 것처럼 꿉꿉한 머릿속도 맑아질 터였다. 호원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켜 지갑을 찾아 들었다.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는 지금쯤 한산해져 있을 시간이었다. 느긋하게 앉아 커피나 한잔 마시고 올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러나 정작 대로변의 익숙한 길을 지나 모퉁이를 꺾자마자, 호원의 얼굴이 대번 굳어져 버렸다.

왜 여기에? 왜 이 시간에? 그런 생각이 날 틈도 없었다. 신발 밑창이 직-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었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데 유리문 안에서 막 잔을 받아 들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놀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오늘의 하늘과 꼭 닮은 푸른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문 너머의 남자는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더니 성큼성큼 호원에게로 걸어왔다.

유리문이 안쪽으로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넓은 어깨에서 시선을 올리니 조금 야윈 듯한 잘생긴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미안.”

가장 첫마디부터 사과였다.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해서 저렇게 저자세로 구는 건지, 호원은 괜히 울컥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알려준 곳이었는데, 깜빡했어. 난 이제 안 올 테니까 편하게 다녀도-”

“왜 그렇게까지 해.”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눈앞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파란 눈이 보였다.

잘못은 자신이 했는데, 꼭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눈치를 살살 보는 모습이 답답했다.

“편하게 다녀. 내 눈치 볼 거 없으니까.”

“…….”

무휼에게서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보는 사람의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로 서글픈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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