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뜻밖의 접점
“합의라고요?”
시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맞은편에서는 경찰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쩝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아니, 보아하니 전과도 없는 초범이고. 아가씨 집에 쳐들어간 것도 아니니 불법 침입도 아니고. 그 식칼 그것도 그냥 홧김에 들고만 나온 거라잖아요. 아가씨도 다친 곳은 없다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다친 곳이 없으면 이 사람이 절 죽이려 한 게 없던 일이 되나요?”
“에이, 죽이려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 본인도 찌를 생각까지는 없었다잖아요. 적당히 합의 보고 합의금 받고 끝내는 게 아가씨도 편하고 좋을 거 아니야.”
“지금 제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로 보이세요?”
시영은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얼굴 가득 드러나는 분노는 숨길 수 없었다. 벌써 몇 시간째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유리창 밖으로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시영은 초조하게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틈만 나면 호원과 무휼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얼른 이쪽을 정리하고 가봐야 하는데.’
경찰은 말이 통하지 않고, 상황은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휼이 기껏 잡아준 스토커를 도로 풀어주게 생겼다.
시영은 입술을 짓씹으며 경찰 쪽을 노려보았다.
경찰은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흘긋 보더니 그녀 옆에서 제 손목에 찬 수갑을 덜그럭거리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요. 홧김에 그런 거 맞죠? 앞으로 이 아가씨한테 엄한 짓 안 한다면서요.”
“아무렴요.”
남자가 수갑 찬 손을 모아 잡으며 어깨를 위로 크게 으쓱여 보였다.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서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사실 경찰서까지 올 일도 아니었어요. 어장관리 좀 당했다고 울컥한 저도 잘못하긴 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는 제 탓이죠.”
“어장관리라고?”
시영이 허탈한 얼굴로 헛웃음을 뱉었다. 저 혼자 망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해 엄한 사람에게 칼까지 휘둘렀으면서, 남자는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이분과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가게 손님이라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고요. 이 사람이 절 스토킹했다는 증거도 여기 똑똑히 있고요.”
시영이 다시 경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제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남자가 시영의 집 앞을 기웃거리는 영상과 남자가 보낸 협박 편지의 사진 등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시영이 사는 오피스텔의 건물주가 흔쾌히 CCTV 메모리를 보내준 덕에 얻을 수 있던 것이었다.
건물주 아주머니께 다시금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영은 휴대폰을 통째로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휴대폰 속의 사진과 영상들을 대충 슥슥 넘겨 보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시영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집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뭐 해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겠어요? 듣자니 이 사람 때린 게 아가씨 남친이라던데. 오히려 그쪽이야말로 폭행죄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알아요?”
경찰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따지고 들 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시영은 그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한들, 상대는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옆자리의 남자도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걸 진즉 파악하고는 여유롭게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영은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시영이 고개를 들었다. 차분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는 그녀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이의 것이기도 했다.
“어, 시영 씨 아니에요?”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시영의 얼굴을 알아본 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 일순 당황하는가 싶더니 시영과 옆자리의 남자, 그리고 여전히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경찰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 모양이네요.”
“뭐야. 아가씨, 아는 사이?”
경찰이 의자를 당겨 앉더니 시영과 새롭게 등장한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것은 시영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무휼이 온 줄 알고 잔뜩 굳어 있던 그는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자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시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영은 자신을 쳐다보는 세 남자의 얼굴을 슥 둘러보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가게 손님이세요.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진혁 씨.”
진혁은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보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능력 좋네. 남친도 있다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시영이 이를 악물었다. 경찰은 이미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손님 앞에서까지 이런 꼴을 당할 이유가, 그녀에게는 전혀 없었다.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계속 남친이라고 하시는 그 사람과는 같이 일하는 동료일 뿐이라고. 제 옆에 있는 이 스토커 때문에 귀갓길에 동행해 준 거라고요.”
“아니, 아가씨. 흥분하지 말고….”
“흥분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범죄 사실을 직시하고 이성적인 판단과 처벌을 요구하는 거죠. 계속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시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저로서는 일을 키우는 수밖에 없겠네요.”
“지금 뭐 고소라도 하겠다는 거요?”
경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시영은 지지 않고 그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필요하다면요.”
단호한 말에 수갑을 찬 남자가 놀라서 시영을 쳐다보았다. 설마 시영이 고소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시영에게는 증거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불안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시선이 시영의 앞에 놓인 휴대폰에 가 닿았다.
경찰이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성가시게 진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시영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스토커요?”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혁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아까부터 사나운 기세로 시영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를 향했다.
“잠깐 실례.”
진혁이 시영 앞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화면을 넘길 때마다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악질이네요. 이 정도 증거면 고소도 가능하겠어요.”
“저기요, 그쪽은 뭔데 참견입니까?”
경찰이 껄끄러운 얼굴로 진혁을 쳐다보았다. 진혁은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경찰에게 내밀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명함을 읽어 내려가던 경찰이 어느 한 곳에서 화들짝 놀라더니, 명함과 진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런 분이 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경찰의 반응에 놀랐는지 수갑을 찬 남자 역시 힐긋 진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시영 씨.”
진혁이 시영을 돌아보았다.
“고소할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회사 법무팀에 바로 연락하도록 하죠.”
“아뇨, 그러실 거 없어요.”
법무팀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남자가 이어진 시영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이 여자도 자신이 불리하다는 건 잘 알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뻔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영이 단호하게 뒷말을 이었다.
“제가 실력 있는 변호사분을 알거든요. 특히 이쪽 범죄에 관련해서는 무서운 분이죠. 조만간 서류 챙겨서 다시 오죠.”
시영이 담담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경찰은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듯, 당황한 얼굴로 시영과 수갑 찬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이봐.”
벌떡 일어선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시영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러나 시영은 그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그러고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최근에도 악질 스토커에게 징역 2년을 받아낸 분이에요. 이번에는 과연 얼마나 받아주실지 궁금하네요. 어떻게든 당신 이력에 빨간 줄만 그을 수 있다면 저는 환영이지만요.”
빨간 줄이라는 말에 남자가 입을 떡 벌렸다.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보니 시영은 그제야 속이 좀 후련해지는 듯했다.
물론 그녀라고 정말 고소를 할 생각은 없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당연한 일이,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일인지 이미 그녀는 너무 잘 알았다.
그저 오지 않을 고소장이나 기다리며 끝없이 괴로워하고 후회하길. 그녀는 제발 한 번만 선처해 달라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생각했다.
“그런데 진혁 씨는 여긴 무슨 일이신가요?”
그제야 그녀는 진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창 회사 일로 바쁠 그가 이런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경찰서까지 온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진혁은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아, 그게….”
한동안 머쓱하게 웃던 그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실종신고를 좀… 하고 싶어서요.”
“아이고, 실종신고 말씀이시죠? 아무렴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아 거, 좀 비켜봐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했던 경찰이 벌떡 일어서더니 수갑 찬 남자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시영을 흘긋 보고는 중얼거리는 어조로 말을 뱉었다.
“거 아가씨는…, 고소장 접수할 거면 다시 오시고. 그때는 내가 성심껏 도와드리리다. 어이! 거기 지금 한가한 놈 좀 와서 이놈 수갑 풀어줘라.”
경찰이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남자의 안색은 이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른 경찰의 손에 끌려 사라졌다.
몇 시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경찰의 태도에 시영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래도 진혁의 명함이 그 효과를 톡톡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진혁을 돌아보았고, 그는 저도 같은 심정이라는 듯 쓰게 웃었다.
“도와주겠다는 건 진심이에요. 단골 가게의 점원이 곤란해하는데 당연히 도와야죠.”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시영이 고개를 꾸벅였다. 진혁이 당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경찰이 다시금 재촉했다.
“자자, 사장님. 얼른 앉으시죠. 바쁘신 분인데 얼른 처리해 드려야지.”
“아, 네.”
진혁은 경찰 앞에 앉더니 이 자리에 있는 게 영 머쓱한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찾으려는 사람은 제 동생인데, 며칠 전부터 연락이 안 돼서요. 그 녀석 갈 곳이라고는 제 집이나 본가밖에는 없는데 그쪽에도 며칠째 안 들어간 것 같고….”
동생은 성인이라 실종신고까지 하는 건 과하다 싶었지만, 걱정이 되어 어쩔 수 없었다며 진혁이 덧붙였다.
그제야 시영은 그가 왜 왔냐는 말에 떨떠름하게 반응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역시나, 경찰은 팔불출 부모라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방 표정을 친절하게 고치고는 이어 말했다.
“찾으시는 분 성함이?”
“아, 김진-”
그때, 진혁의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동시에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시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 속의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지만, 시영은 직감적으로 그 전화가 호원이나 무휼이 건 것임을 알아차렸다.
전화를 받자,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사정 설명보다도 이쪽으로 와달라며 주소부터 불렀다. 시영은 그 주소가 어디를 뜻하는지 알아채자마자 비명처럼 말을 뱉었다.
“신우 대학병원이요?”
“신우 대학병원이라고요?”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휴대폰을 귓가에 댄 진혁이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