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함정 (3)
별로 반갑지 않은 물건의 등장에 무휼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부분이 상스러운 욕설이라 듣는 귀가 썩을 것만 같았다.
“그만 좀 하지?”
무휼이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남자가 퍼뜩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그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쪽이 못생기고 인기 없는 게 왜 이 사람 탓이야? 그리고 뭐? 대줄 것처럼 굴어? 이 사람이 너 좋다고 고백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다 그쪽 망상이잖아.”
“뭐, 뭐 이런-”
“그리고 여자가 여지를 줬다고 책임 전가하면서 이렇게 구는 거, 엄연한 범죄야. 알아?”
무휼의 말이 이어질수록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칼을 쥔 손이 덜덜 떨리더니 이윽고 남자가 무휼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시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과 비명이 골목 안에 겹겹이 울렸다.
날붙이가 아스팔트에 떨어지며 쇠와 돌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영이 덜덜 떨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거봐, 별것도 아닌 게.”
여유로운 목소리에 시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와, 그 위에 올라타 남자의 팔을 뒤로 꺾은 채 제압하고 있는 무휼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해? 경찰에 신고 안 하고.”
다소 까칠하게 들리는 여상한 목소리에 멍하니 있던 시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적여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시영은 번호를 누르려 했지만, 손가락은 번번이 화면 밖으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온 신경을 쏟아 전화를 걸었다.
“거기 경찰이죠? 여기….”
“이 미친 새끼야! 이거 안 놔?”
거친 목소리에 시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힘이 빠져나간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지려 해, 그녀는 서둘러 양손으로 휴대폰을 받쳐야 했다.
무휼은 버둥거리는 남자의 팔을 고쳐 잡으며 체중을 실었다. 몸피가 두꺼운 장신이 위에서 덮쳐 누르는 무게에 남자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욕지거리만 내뱉었다.
그러나 남자의 사나운 언사가 향하는 방향은 자신을 내리누른 무휼이 아니었다.
“네년 때문이야! 네년이 나한테 꼬리만 안 쳤어도 내가 이렇게 망가지진 않았어! 어차피 너 나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 가게에 기웃거리던 놈도 네년이 꼬리-”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개가 꺾였다. 소리에 비해 타격이 큰 것은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남자의 입을 막을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
남자의 뒤통수를 내려친 무휼이 자리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시영을 향해 툭 내뱉었다.
“귀 막고 있어. 아, 천 쪼가리 같은 거 있으면 좀 주고.”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음성이었다. 꼭 무휼만 이 상황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평이하고, 어딘가 한편으로는 느긋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감화된 걸까. 시영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던 몸이 천천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눈앞을 가리던 공포가 사그라들자 그녀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제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시야에 바닥에 엎어진 채 아무 의미 없는 쌍욕만 내뱉는 남자가 들어왔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인 한심한 몰골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당한 것이 억울할 정도로 나약해 보였다.
“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시영은 무휼에게 다소 늦은 대답을 해주었다. 하도 씹어댄 탓에 피비린내가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고는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이 풀린 다리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긴 그녀가 도착한 곳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플라스틱 컵 앞이었다.
“그런 놈한테 천이라니. 과분하게.”
시영이 허리를 숙여 컵을 집어 들었다. 종이로 된 컵 홀더를 벗겨내는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시영은 컵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컵 홀더만 손에 든 채 무휼에게 걸어왔다. 그 와중에도 무휼 아래 깔린 남자는 시영을 향해 인상이 찌푸려질 만한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작작 좀 하지?”
시영이 남자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컵 홀더를 마구 구기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당신한테 관심 없고, 술 마시러 왔으면 곱게 술이나 처먹고 꺼지라고. 당신이 내 어떤 점을 보고 오해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신하고 사귈 바에야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아.”
“우, 웃기지 마! 맘도 없는 년이 그렇게 살살 웃으면서 술이나 따르고… 컥!”
남자가 컥컥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 컵 홀더를 쑤셔 넣은 시영은 그가 뱉어내지 못하게 남자의 뒤통수를 바닥에 꾹 잡아 눌렀다.
“손님한테 그럼 정색하겠냐? 그리고 바텐더는 그냥 술이나 따르는 사람 아니야, 이 스토커 새끼야.”
“커헉, 컥!”
남자가 발버둥을 치며 입 안의 컵 홀더를 뱉어내려 했다. 그러나 빳빳한 재질의 종이는 자꾸만 치아에 걸렸고, 뒤통수를 내리누르는 손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결국 저항하기도 지친 남자가 사지를 축 늘어뜨렸을 때, 골목 바깥쪽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섞여, 무휼은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어?”
고개를 들어 시영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의 날카로운 눈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을 즈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다고.”
이번엔 확실히 시영의 목소리였다. 무휼이 쳐다보자, 시영은 시선을 바닥에 둔 채로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동안 괜히 호원 오빠한테까지 피해가 갈까 봐 혼자 참았거든. 이런 일… 처음이 아니니까.”
시영의 목소리는 살짝 힘이 빠진 듯했다. 그러나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속이 다 후련하다.”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러고는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경찰차를 향해 팔을 흔들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경찰은 시영에게 사정 설명을 듣더니 일단 함께 서로 가자는 말을 꺼냈다. 시영과 무휼은 곤란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호원 오빠, 혼자 있을 텐데. 괜찮을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일단 갔다가 최대한 빨리 돌아오면….”
그때, 무휼의 머릿속에 날카롭게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들어간 바늘에 손톱 밑을 찔린 것만 같은, 아찔한 감각이었다.
“잠깐만….”
무휼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입에 물려 있던 컵 홀더를 뱉어내며 경찰의 부축을 받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씩씩거리며 무휼과 시영을 노려보았고, 경찰은 그런 그를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경찰차에 태우려 하고 있었다.
“당신, 아까 뭐라고 했었지?”
무휼이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어딘지 멍한 말투로 물었다. 컵 홀더와 아스팔트 바닥에 쓸려 엉망이 된 얼굴을 소매로 슥슥 닦던 남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뭐?”
“아까, 가게 어쩌고 하지 않았냐고.”
“아아, 그놈.”
남자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떠올리기 싫은 것을 억지로 기억해내는 것처럼 잔뜩 미간을 찡그린 남자가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저년 일하는 가게에 최근 들어 기웃거리던 놈이 하나 있었지. 분명 저년이 또 헤프게 흘리고 다녀서 거기에 홀린-”
“그딴 개소리 말고!”
남자가 또다시 구시렁거리며 잇던 말을 무휼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단번에 끊어버렸다. 지금까지의 여유로운 태도와는 전혀 다른 사나운 기운에 남자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무휼이 성큼성큼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에 경찰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무휼은 가을 낙엽이라도 치우듯 손쉽게 경찰들을 밀어냈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동자에 새파란 안광이 비쳤다. 가로등 불빛에 역광이 진 가운데 새파란 눈동자만 빛을 뿜어내는 모습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짐승과도 같았다.
남자는 잔뜩 얼어붙은 채 숨만 헐떡거리며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앞에 선 무휼에게서는 당장에라도 남자를 맨손으로 찢어버릴 것만 같은 살기가 흉흉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새끼, 오늘도 왔었나?”
“그, 그게-”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잘못 말하기라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 나도 잘 몰라. 오늘도 당신들을 따라서 움직이느라-”
“왔는지, 안 왔는지. 그것만 말해.”
“와, 왔어! 왔었어!!”
남자가 조건반사처럼 단박에 대답했다. 움찔움찔하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늑대를 앞에 둔 새끼 양처럼 무력해 보였다.
“다, 당신들을 따라가느라 자세히는 못 봤지만… 어쨌든 오늘 그 녀석도 가게에 온 건 확실해!”
순간 무휼은 숨이 덜컥 멎는 것만 같았다. 김진수. 그 자식이다.
김진수가 지금, 바 ‘3월’ 근처에 있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누가 머릿속에 송곳을 찔러 넣은 것처럼 끔찍한 격통이 일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발밑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어지러워 무휼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무휼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남자가 숨이 차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 정말이야! 그 녀석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건 똑똑히 봤어!”
“…뭐?”
무휼의 잇새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되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끔찍할 정도로 멍청하게 들린다는 생각을 하며 무휼이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놈이, 들어갔다고?”
“그, 그래!”
남자는 갈고리처럼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무휼의 손이 당장에라도 자신의 살점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거라 믿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부, 분명히 봤어. 당신들이 나오자마자 그 자식이 가게로 들어가는 걸!”
살짝 벌어져 있던 무휼의 입이 악다물렸다. 그러나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힘을 줘도 바르르 떨리는 턱은 감출 수 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고?’
지금 가게 안에 있는 건-
“이호원.”
무휼의 잇새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소리라기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며 숨이 가쁘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권무휼!”
갑작스럽게 불린 이름에 무휼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휴대폰을 귀에 댄 시영이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호원 오빠, 전화를 안 받아.”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이상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불타는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처럼, 의식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두운 골목길을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우는 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야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걸 알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헐떡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가냘프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